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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이하 급식네트워크)의 상임대표 배옥병은 참으로 듬직한 사람이다. 1957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후 농사를 짓다 1975년 당시 구로공단에 있던 가발공장 (주)서통에 취직되어 일명 '공순이'로 수도 서울에 입성한 이래 그는 여태껏 그 구로에서 '꾸준하게' 살아오고 있다.

 

 

1980년 5월17일 (주)서통에서 처음으로 노조를 결성해 노조위원장으로 '운동권'에 첫발을 들여 놓은 이래, 대학생 출신으로 그의 삶의 동반자가 된 '위장취업자' 남편을 만나 결혼한 곳도 바로 그곳 구로였으며, 해직 후 1984년부터 노동자복지협의회, 한국여성노동자회, 남부교육시민연대, 남부교복공동구매추진협의회, 구로구학교급식법개정과조례제정을위한운동본부 등의 지역운동을 시작한 곳 역시 그곳 구로였다.

 

또한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학부모회를 거쳐 지금의 급식네트워크까지 꾸준히 학부모운동을 전개해온 것도, 그 기반은 바로 그의 공식적인 삶의 출발지이자,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어도 결코 떠날 수 없었던 수도 서울의 '구로공단'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삶의 첫 출발지였던 서울 '구로공단'을 지금까지, 1981년 노조활동으로 1년6개월 실형을 살았던 그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참으로 희안(희망과대안)하다.

 

젊은 처자들과 아줌마들

 

"재미있었어요."

 

그는 지금 학교급식운동을 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가 노조위원장으로 '꿈'에도 그리던 노조를 설립한 것은 1980년 5월 17일이었다(당시 그가 다니던 회사에는 위장취업자들이 없었지만, 그는 이미 1978년부터 새문안교회 대학청년부에서 구로지역에서 시작한 '노동야학'에 몸담고 있었다).그러나 그날 밤 12시 떨어진 신군부의 계엄령으로 광주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시민항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빛고을' 광주가 신군부의 군홧발 아래 무참히 진압된 후에는 극심한 '폭압'이 휘몰아쳐 왔다. 8월 이후에는 노조의 존립을 위해 노조위원장 자리까지 내놓고 일반조합원으로 활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폭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12월 8일 새벽 4시 6명의 노조간부들과 함께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28일 동안의 모진 고문이 포함된 조사와 1주일 동안의 순화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1981년 다시 노조활동을 재개했다. 1200명이나 되었던 공장직원들은 1, 2, 3차에 걸친 해고를 거치면서 600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그는 그 해 6월 1일 경찰에 연행되어 1년6개월의 실형선고와 함께 해고를 당하면서 더 이상 (주)서통에서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후 그가 선택한 삶은 1984년부터 결혼과 함께 시작된 노동자복지협의회, 한국여성노동자회 등으로 이어지는 (구로)지역운동이었다. 그러던 그가 운명의 '학부모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그의 큰 아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1994년의 일이었다.

 

"(여전히) 구로에서 여성복지회관을 통해 지역대중 활동(한글과 컴퓨터 강좌)을 하고 있던 때였어요. 그런데 학부모회를 나가보니 (그동안 볼 수 없던) 지역의 대중들이 여기 다 모여 있는 거예요. 아, (내가 활동할 곳은) 바로 여기구나, 했지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그는 학부모 활동을 한달음에 시작했다.(그렇게 시작한 '학교' 활동에는 지역의 현안들이 죄다 들어 있었다) 학교운영위원으로 출마하고 또 운영위원장까지 맡아 일을 하면서 그는 마치 20대 초반 서울에 처음 올라와 (주)서통에서 노조활동을 막 시작했던 즐거웠던 '젊은 처녀' 시절로 되돌아간 듯 '행복했다'고 말한다(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이 두 가지를 꼽고 있다).

 

도대체 뭐가 그리 행복했을까? '젊은 처자'들과 '아줌마'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인 '여인네들의 수다',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를 아주아주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은! 그것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은근슬쩍, 쓸데없는 듯한 말들을 지껄이면서도, 또 그렇게 짓고 까불며 함께 박장대소하면서도, 어느새 '이 인간들이 얼마나 나에게 공감하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하나로 어울려 얼마만큼이나 함께 행동할 수 있는지'를 요모조모로 가늠해볼 수 있는 수단이 되어주기도 하는, 시끌벅적한 여인네들의 '수다'는 어쩌면 신라시대의 화백제도처럼 밑으로부터의 완전 '만장일치'의 공감대를 형성케 해, 어느 순간 그네들의 막강한 힘을 하나로 발휘할 수 있게끔 해주는 마법의 요술지팡이일지도 모른다. 그러기까지 그네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쓸데없이' 짓고 까부는가? 민주주의란 그만큼 함께 공들인 시간의 '퇴적물'인 것이다.

 

대중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타고난 대중 활동가인 그는 대중들을 아주 신뢰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대중들과의 활동 경험에서 몸소 배운 것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스스로 결정해요. 또 문제의식을 느끼면 과감하게 떨쳐나서요.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게 되지요. 활동가의 역할이란 그저 (그들에게) 그런 자리를 하나 만들어주면 되는 거예요."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학교운영위원장으로 일하던 1998년 방학 중에 초등학교 앞으로 아주 위험한 도로가 하나 생기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부랴부랴 조사를 해보니 이미 통장이 25명의 서명을 받아 보상금까지 다 지급받고 도로공사가 70% 이상 진행된 상태였다. 그는 당연히 학부모총회로 이 문제를 가져갔다.

 

"어떻게 할까요?"

 

그의 물음에 "구청장을 만나러 갑시다"란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럼 언제 갈까요?" 하는 물음에는 "이렇게 모이기도 힘든데 지금 당장 갑시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학부모들이 그 즉시로 '우르르' 구청으로 몰려가 3시간 만에 구청장을 만나 안전한통학로 대책을 세울 때까지 공사를 중단시키로 합의했다.

 

"그날 모였던 약 300여명의 학부모들 중 1/3이 구청장 면담에 참가했어요."

 

그는 이러한 대중적 힘을 조직으로 모아내 '구로초등학교 통학로 교통안전확보를 위한 학부모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 6년 동안 서울시와 구로구를 수차례 항의방문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전문가 토론회, 지역주민 간담회 등을 통해 학생과 학부모가 하나 되어 '어린이에게 안전한 통학로를!' 직접 실현시켰을 때 큰 보람과 함께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학교급식운동도 그렇게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파동으로 인한 촛불집회가 시작되기 전에도 먹을거리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은 대단했다. 2002년 급식네트워크가 발족하게 된 것도 바로 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소중한 아이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우리 사회 먹을거리에 대한 불신감! 이를 바로잡고자 출범한 급식네트워크가 이른 시일 안에 많은 성과를 낸 것은 당연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바로 그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것! 학교현장에서 학부모들이 가장 크게 느끼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니, 그가 대표로 있는 급식네트워크가 실패할 위험성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현재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이슈화되고 있는 '무상급식운동'은 그만큼 풀뿌리 단계에서부터 아주 오랫동안 '대중'들 속에서 착실하게 준비되어온, 그래서 이제는 정부여당인 한나라당 안에서도 '무상급식'에 대한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이길 수 있는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학교급식운동이 일상의 문제를 이슈화해내어 대중적 방식으로 풀어나간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으로서 한국 사회운동의 새장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사)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

 

학교급식운동은 2002년 "아이들에게 건강을, 농민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하루 약 745만 여 명이 한 끼 이상을 먹고 있는 학교급식을 개선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달려왔다. 학교급식은 안전한 우리 농산물사용을 원칙으로 학교장이 직접운영하며, 의무교육 기간인 초중학교까지 무상급식 실시와 고등학교 역시 의무교육을 제도화하고 연차적으로 무상급식을 확대해 가는 국가공교육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뜨거운 열망들을 담아,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여 학교급식법 개정과 조례제정을 하자는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창립 되었다.

 

학교급식운동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에 변화를 가져왔다. 학교급식이라는 평범한 의제를 국민적 운동으로 만들고 식품안전, 환경, 교육, 농업, 수입농산물과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문제 등에 대한 국민들의 문제의식을 확산시키고 학교급식법 개정, 친환경농산물 사용 확대를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학교급식지원조례제정 운동을 통하여 전국 16개 광역시․도에서 100% 조례가 제⦁개정되어 시행 중에 있으며, 234개의 기초 시․군․구 중 192개에서 조례가 제⦁개정되었다. 이들 조례에서는 국내산 우리농산물과 친환경농산물 사용을 명시하고 있으며, 101개 시․군․구에서 주민조례 발의를 통해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수백만 명의 지역 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은 주민자치에 의한 권력 견제와 지역주민의 자치역량을 높이고 생활상의 요구를 통해 삶의 질을 개선한 지역자치운동이며, 풀뿌리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생활정치로서 기존의 중앙 중심적으로 펼쳐졌던 시민운동과는 달리 지역에서의 자치운동을 통해 그 영향력이 지방정부를 거쳐 중앙정부에까지 퍼져나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참여민주주의 운동을 펼쳐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학교급식운동의 큰 특징은 학부모단체와 교원단체, 시민단체는 물론 소비자단체, 지역 학교운영위원협의회와 농민회, 노동조합, 정당 등까지 참여하고 있어 연대의 범위가 전에 없이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아이들의 건강을 지키고 우리 농업을 살리자」는 학교급식운동의 대의명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급식운동이 섬세한 관찰과 새로운 접근을 통하여 느리지만 지역민의 현실과 생활에 근거한 구체적인 운동으로서, 거대담론에 가려져 일상생활에서의 약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없었던 일들을 지역자치운동을 통해 힘 있게 추진해 온 것"이라고 힘 있게 말했다. 

 

'희망과대안'이 해야 할 일

 

"지방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하려면 연합정치가 이루어져야죠. 이를 실현하려면 결국은 정책연합을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 될 텐데, 그 과정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현재 5+4모임(야5당과 '희망과대안'을 중심으로 한 시민 4단위의 모임)이나 활동가 등 상층의 고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밑으로부터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그 힘이 있어야만 5+4모임 내부의 다름과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텐데, 현재는 상층에서 연합정치를 끌어가려고 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라고 크게 염려했다. 정책도 너무 거시적으로, 위에서만 접근하지 말고 국민들, 다수가 원하는 것을 중심으로 밑에서부터 잡아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 발족한 전국교육희망네트워크(이하 교육희망넷)의 활동 방식을 사례로 들었다. 교육희망넷은 지난달 11일부터 16일까지 10대 과제를 선정하기 위한 온라인 투표를 진행했다. 미리 선정된 17대 과제 중 1인당 5가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번 온라인투표(학생, 학부모, 시민 대상)에는 총 1312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그 과정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마감을 하루 앞두고 어떻게 알아내었는지 학생들의 집단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그때까지만 해도 후순위에 자리 잡고 있던 '학생들의 인권보장'이 총 891표를 얻어 '뜻밖의' 1위를 차지한 것이다. 2위는 721표를 얻은 '보충수업, 자율학습 폐지', 그리고 3위는 696표를 얻은 '모든 일제고사 폐지'였는데, 모두가 학생들의 실제 생활과 직결된 의제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0대 과제를 순위대로 살펴보면 ▲교육비제로, 무상교육실현(532) ▲수능시험폐지, 대입제도개혁(447) ▲학급당 학생수 25명 실현(441) ▲초중고교 무상급식실현(431) ▲학생회와 동아리활성화(234) ▲대학평준화, 국공립대네트워크(234) ▲21세기 학교로의 시설혁명(202) 등이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학생회와 동아리활성화'가 '대학평준화, 국공립대네트워크'와 똑같은 표를 얻었다는 점이다. 어른의 손으로만 10대 과제를 선정했다면 과연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대거 참가해 얻어낸 위의 결과표들을 보면 이미 학창시절을 떠나버린 어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질 않는 '현재의' 학생들의 '직접적인' 고통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아니, 밀려온다. 이러한 학생들의 직접적인 '아픔과 고통'을 모른 채 하면서 과연 '교육개혁'을 말할 수 있는 자, 그 누구인가?

 

대중과의 접촉, 시민사회의 또다른 과제

 

대중들의 직접적인 참여는 가끔씩 놀라운 경험을 보여주곤 한다. 2008년 촛불이 바로 그랬다. 그때 나타난 촛불은 이미 새로운 대중이었다. 시민사회단체가 전혀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던 그 촛불정국 속에서 만난 새로운 대중들과는 이제 어떻게 소통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어떻게 만나갈 수 있단 말인가?

 

"'희망과대안' 회원 113명은 모두 각 영역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루어지는 모임을 통해서 이들의 생각을 다 모아내기에는 역부족이죠. 오랜만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가 않아요. 운영의 묘를 잘 살려야 할 텐데, 이를테면 각 분야별 정책을 만들어낼 때 분야별 모임을 추진한다든지 등등… 어쨌든 회원들 하나하나가 책임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들을 부여해야 할 거예요."

 

그도 고민하고 있었다. 113명의 사람들. 이들을 어떻게 소통하여 하나로 꿰어낼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쉽지 않은 문제이기는 하다. 사회혁신기업가 원낙연의 지적대로 '소통'의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인 문제였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어렵더라도 언젠가는 꼭 한 번 풀어내야만 할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희망과대안도 일산 '마르다의 집'에 함께 모여 앉아 질펀한 '수다'를 크게 한 번 쏟아내야 하는 것은 아닐지, 고민이 더 많아진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세상은 넓고, 또 해야 할 일은 '참으로' 많은 것만 같다.


태그:#희망과대안, #선거연합, #학교급식, #배옥병, #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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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대안은 대안적 메시지 생산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균형회복과 좋은 정치세력 형성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9년 10월 19일 학계, 종교계, 시민사회 인사 113명이 참여하여 창립된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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