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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길산과 예봉산 사이 s자 형 논둑길
 운길산과 예봉산 사이 s자 형 논둑길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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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이 나에게 있었고.
나에게로 가는 길이 너에게 있었다.

지금 가장 멀고 험한 길 걸어
너는 너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이승에서의 갈림길은 여기부터 시작이다.

이제 이쯤에서 작별하자.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것이 길이니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것이 길이니

- 진중리 마을안길 이정표에 걸려 있는 정일근 시인의 '갈림길' 모두

운길산과 골짜기길로 갈린 갈림길에 서있는 이정표와 정일근 시인의 시 갈림길
 운길산과 골짜기길로 갈린 갈림길에 서있는 이정표와 정일근 시인의 시 갈림길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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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엔 그곳에 길이 없었다. 누군가 그 길을 처음 걸었고 뒤따라 많은 사람들이 걷다보니 길이 되었다. 길은 사람들이 만들고 길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든다. 누군가는 그 길로 돌아오고 누군가는 그 길로 떠난다. 만남도 떠남도, 사랑도 이별도 길이 있어 이루어진다. 길이 곧 삶이고 삶이 곧 길이다.

길이 곧 삶이고, 삶이 곧 길이다

집을 나서면 모든 삶은 길로 연결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길을 찾아 나서지만 길이 모두 같은 길은 아니다, 그저 편리함으로 존재하기만 하는 길도 있지만 어느 길은 정겹고 고운 추억이 묻어 있고, 어느 길은 슬픔과 아픔이 깊이 배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처음 걸어보는 길에서도 오롯한 정다움이 묻어나는 길이 있는가 하면, 무언지 모르게 짜증스럽고 정이 가지 않는 길도 있다. 그래서 요즘 지방마다 나름대로 특색 있는 운치와 정감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고 널리 알리는 길들도 막상 찾아가보면 실망스러운 곳들이 많다. 더구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북적거리기 시작하면 어느새 식상하고 마는 것이 요즘 만들어 내놓는 길들의 실태다. 자꾸 걸으면 걸을수록 소록소록 정이 쌓이는 길이면 얼마나 좋으랴.

그래서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다 주춤하고, 멈칫거리는 봄을 재촉이라도 하는 듯 하루 종일 부슬비가 쏟아지던 지난 2월 9일 이름 없는 호젓한 길을 찾아 나섰다. 전철 중앙선 운길산역에서 내려 철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 운길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내리다가 그치기를 기대했던 빗줄기는 오히려 점점 굵어져 일행들 두 사람은 우산을 받쳐 들고 한 사람은 비옷을 입고 나섰다.

산안개 휘감아 도는 운길산과 겨울비에 젖은 가랑잎
 산안개 휘감아 도는 운길산과 겨울비에 젖은 가랑잎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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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길이야? 설마 이 빗속에 저 짙은 안개를 뚫고 운길산을 오르지는 않겠지?"

일행 한 사람이 궁금한 듯 묻는다. 진중천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자 마을이 나타난다. 바로 앞에 바라보이는 운길산과 골짜기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산자락과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안개구름이 환상처럼 꿈틀거린다.

"길이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고? 아닌데. 이승에서의 갈림길이 여기서부터 시작이라, 그럼 우리들도 이 갈림길에서 헤어지는 거야 허허허."

마을 입구 이정표에 걸린 송판에는 정일근 시인의 '갈림길'이라는 시가 매달려 차가운 겨울비를 맞고 있었다. 시를 읽으며 일행이 싱거운 농담을 던진다. 이 마을이 운길산 입구에 있는 진중2리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정표엔 운길산 방향만 표시되어 있을 뿐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진중리 마을 안길 옆에 있는 마을회관을 발견했다. 창문을 두드리자 아주머니 한 분이 웃으며 맞는다. 새우젓고개 방향으로 가는 골짜기 길을 묻자 방안 안쪽에 있는 할머니에게 다시 물어 왼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라고 가르쳐준다.

운길산과 예봉산 사이로 뚫린 호젓한 골짜기 길로 들어서다

마을을 벗어나자 곧바로 논둑길이다. 산골짜기 양편에 있는 논들 사이로 뚫린 길은 여느 논둑처럼 좁은 길이 아니었다. 우마차와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길은 군데군데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런 논둑길은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넓어져 차량이 드나드는 좁은 도로로 이어졌다.

냇가에 서있는 얼음기둥
 냇가에 서있는 얼음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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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길이 운길산과 예봉산 사이에 있는 길이야, 왼편에 솟아 있는 저산이 예봉산, 그리고 오른편에 솟아 있는 저 산은 운길산이지."

양쪽에 솟아 있는 두 산을 가늠해보고 있을 때 예봉산 터널을 빠져나온 용문행 전철이 긴 꼬리를 끌며 우르릉 우르릉 달려간다. 길은 얼어붙은 진중천 옆으로 이어져 있었다. 길가엔 겨우내 말라있던 갈대와 억새들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후줄근하게 젖어 있는 모습이 처연하다.

길옆 운길산 쪽 골짜기엔 동국대학교 연습림 관리소 출입문이 열려있다. 이곳을 지나쳐 조금 더 들어가자 냇가에 두 개의 커다란 얼음기둥이 서 있다. 지난 강추위 때 일부러 얼린 듯한 10여 미터 높이의 얼음덩어리가 빗속에서도 새하얀 몸체를 뽐내고 있는 모습이 여간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골짜기 안쪽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희뿌연 모습으로 갇혀 있고 비도 그칠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아주 완만하게 경사진 길은 내리는 빗물이 흘러내려 바짓가랑이를 적셨지만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왼편엔 옥수숫대, 오른편엔 고춧대들이 서 있는 길을 지나자 조곡마을 10여 채의 농가들이 나타난다.

옥수숫대와 고춧대가 서있는 사이로 뚫린 길
 옥수숫대와 고춧대가 서있는 사이로 뚫린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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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길이나 농가 어느 집에서도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이어서 주민들은 방안에 들어 앉아 빈대떡이라도 부쳐 먹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마을을 지나자 골짜기 안쪽에서 빗소리에 뒤섞여 독경소리가 들려온다. 골짜기 안쪽 어디 쯤 절집이 있는 것이리라.

잊고 살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난 수십 년 전의 그리운 추억 한 조각

돌담 옆을 끼고 오르는 길가 어느 집에서 개 한 마리가 어설픈 소리로 두어 번 컹컹 짓다가 제풀에 그만 둔다. 골짜기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는 것은 독경소리 뿐이었다. 차량도 오가는 사람도 하나 없는 겨울비 내리는 골짜기 길을 터덜터덜 걷는 우리일행들의 모습을 혹시 누가 보았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내 젊었을 때 이곳을 한두 번인가 와봤었던 것 같아."

두 사람은 앞서가고 함께 뒤처져 걷던 일행 한 사람이 문득 생각난 듯 옛날이야기를 꺼낸다. 대학시절 가깝게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이 골짜기 어디 쯤 살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해 여름인가 이곳을 다녀간 기억이 있다는 것이었다.

주필거미박물관 입구
 주필거미박물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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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십 년간 잊고 살았던 옛 연인을 그려보는 것 같았다. 참 참한 여자였다고 한다. 마음씨도 행동도, 그래서 마음에 상당히 깊이 담아두고 있었는데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군대에 가있는 동안 그녀는 시집을 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혼자만의 연민이었는지도 모른단다. 그래서 제대 후 소식을 듣고도 원망이나 미움 같은 것은 없었지만 돌이켜 보니 아쉬움이 컸던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 길이 초행이 아니라 그리움이 담겨 있는 옛길이었네"
"길도 주변풍경도 너무 많이 달라졌지만 희미한 기억이 조금 남아있는 것 같구먼, 돌아보면 그리운 추억이기도 하고…."

몇 년 전에 운길산과 예봉산을 올랐을 때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었는데 겨울비 맞으며 걷는 길에서 문득 수십 년 전의 아련하고 그리운 추억을 떠올린 것이다. 그렇게 도란도란 걷다보니 주필거미박물관 앞이다. 생태수목원을 겸한 박물관은 동국대 교수이며 거미박사로 유명한 김주필 박사가 많은 돈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주 특별하고 귀한 박물관이었지만 날씨 때문인지 정적에 싸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새우젓고갯길 정자와 빙핀길
 새우젓고갯길 정자와 빙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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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자 개울 건너 왼편 산자락에 세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계종 소속 사찰인 세정사 입구도 고즈넉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마침 승용차 한 대가 위쪽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운길산역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4km나 되었지만 이곳까지 오는 길에서 유일하게 만난 차량이었다.

세정사 입구를 지나자 곧 중리마을이 나타난다. 중리마을은 몇 가구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안개와 빗속에 푹 가라앉아 있었다. 중리마을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 새로 놓은 듯한 다리를 건너가자 넓은 길이 끝나고 산길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부터 고갯마루까지는 등산로를 올라야했다.

그러나 등산로도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고 길도 좋은 편이어서 산책하듯 걸을 수 있었다. 고갯마루까지는 1.2km, 앙상한 나무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걸어 고갯마루에 당도했다. 새우젓고개다. 그런데 이정표엔 새재고개라고만 적혀있다. 새우젓고개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워버린 걸까?

새우젓고개는 우리들이 올라온 조곡과 운길산역으로 가는 길 외에도 운길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적갑산, 철문봉을 지나 예봉산으로 오르는 길, 갑산으로 오르는 길, 시우리(광명)으로 가는 길 등 다섯 갈래나 되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어서 이 지역 산길의 요충인 셈이었다.

도곡리로 내려가는 길
 도곡리로 내려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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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자는 벌써 다른 사람들이 모두 차지해버렸는걸, 이제 어쩐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고갯마루를 넘어 넓은 길가에 있는 약수터 정자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는데 도착해 보니 정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들보다 조금 앞서 도착한 열댓 명의 등산객들도 점심을 먹으려는 듯 정자 안에 자리를 펴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은 정자에 오르려다가 빙판에 미끄러져 꽈당! 넘어진다.

길가 이정표에 매달려 있는 시 한 수에서 얻은 인생지표

흙누리 도예공방
 흙누리 도예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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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에서 점심 먹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부터 갑산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길이 문제였다. 본래 이 길은 제법 넓고 좋은 길이었다. 그런데 북풍받이 응달길이 강추위에 꽁꽁 얼어 있었는데 비까지 뿌려 길은 완전히 미끄럼판이 되어 있었다.

길 가장자리 눈길을 밟으며 조심조심 걸어 내려가노라니, 길가에 서있는 이정표에 걸려 있는 오세영 시인의 '강물'이라는 시 한 수가 눈길을 붙잡는다.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짧지만 참 의미 깊은 시다. 요즘처럼 바쁘고 다급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꼭 기억하고 삶에 적용해야 할 명구가 아닌가. 아니 어쩌면 밀어붙이기에 몰두하는 정치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빙판이 사라진 내리막길을 느긋하게 걸어 도곡리에 당도했다.

이미시문화서원 마당풍경
 이미시문화서원 마당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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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소시가지가 가까워지면서 마을모습은 농장과 축사. 그리고 음식점들과 함께 멋진 문화공간들도 나타난다. 허술하지만 예스러운 '흙누리 도예공방'과 '이미시 문화서원'이 그들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었으면 여유롭게 돌아보며 즐길 수 있는 곳들이었다. 도곡리 마을 안길 이름은 '궁말길'이었다.

"오늘은 산길에서 도시락 못 먹었으니 저 앞 음식점에서 먹고 가야되겠구먼."

일행 한 사람이 음식점 한 곳을 지목하고 앞장을 선다. 바로 앞에 중앙선 전철 고가다리가 있는 곳이었다.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운길산역에서 시작한 걷기가 마침표를 찍는 시간이었다.

가끔씩 만나는 이정표에 매달려 있는 유명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차가운 겨울비 속을 도란도란 함께 걸은 거리는 9.5km. 거미박물관과 세정사, 그리고 도곡리의 문화시설들은 돌아보지 않고 길을 따라 걷기만 했지만 빙판길 때문에 걷는 속도가 느려 3시간 30분이 지나 있었다. 누군가가 그리울 땐 한 번쯤 걷고 싶은 호젓하고 정겨운 길이었다.


태그:#운길산, #예봉산, #새우젓고개, #이승철, #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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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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