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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지난 2000년 2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시민참여저널리즘의 새 장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매년 시민들과 함께 한 참여민주주의의 현장 속에서 의미있는 뉴스의 인물들을 찾아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해왔습니다. 그들의 면면이 바로 <오마이뉴스>가 만들어낸 지난 10년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에, [창간 10돌 기념] '올해의 인물, 그 후'를 조망하는 연속 기획기사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말]
 105동 101호 현관 앞에는 이곳이 대추리 마을회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105동 101호 현관 앞에는 이곳이 대추리 마을회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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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평택시 팽성읍 송화3리 포유(For U) 빌라. 이곳은 미군기지 이전에 맞서 고향을 지키기 위해 3년 6개월을 싸워왔던 대추리 주민 41가구, 120여 명이 모여 사는 임시 주거 단지다. 마지막까지 토지 수용을 거부했던 대추리 주민들은 지난 2007년 2월, 정부와 이주에 합의한 후 원래 살던 곳에서 3Km가량 떨어진 이곳으로 이사했다.

지난 2006년 말 <오마이뉴스>는 '올해의 인물'로 대추리 주민들을 선정했다. 일제 때 한 번, 한국전쟁 시기에 다시 한 번 삶터에서 쫓겨난 대추리 주민들은 수십 년간 피땀을 흘려 척박한 황새울 들녘을 개간해 문전옥토로 만들었기에, 당시 다시는 밀려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관련기사 -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날까" 2006년 대추리 주민들의 희로애락)

2004년 미군기지 이전이 결정된 이후 '국익'이라는 이름의 망령에 맞서 삶의 터전을 온전히 지키려던 대추리 주민들은 힘들었지만 당시까지 3년간 꿋꿋하게 싸우고 있었다.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려는 수많은 '지킴이'들의 연대도 끊이지 않았다. 경찰과 용역업체 직원, 군까지 동원된 대규모 강제철거 작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던 대추리 주민들의 싸움은 2007년 3월 24일 935번째 촛불행사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이곳 송화리에서는 주민들이 땀 흘려 농사를 짓던 황새울 들녘이 보이지 않는다. 미군기지 활주로를 중심으로 먼저 살던 곳에서 정반대쪽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스산한 겨울바람 사이로 미군 헬리콥터가 낮게 날고 있었다. 105동 101호 앞에는 파란 아크릴 판에 흰 글씨로 '대추리 마을회관'이라고 쓴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마을 회관에서는 출장 진료를 나온 보건소 직원이 20여 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혈압을 재고 있었다. "농사일에서 손을 놓으신 후로는 어르신들이 잔병치레가 많아지셨어요." 신종원(48) 대추리 이장의 말이다. 이제 이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신 이장과 김지태(51) 전 이장, 단 두 사람뿐이다. 그나마 차로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충청남도 둔포, 당진, 서산 등지에 조금씩 땅을 사서 출퇴근하면서 농사를 짓는 형편이다.

"보상금 많이 받았냐는 비아냥, 대추리 주민 두 번 죽이는 일"

 신종원(48) 대추리 이장은 '보상금은 많이 받았느냐'는 주변의 비아냥에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신종원(48) 대추리 이장은 '보상금은 많이 받았느냐'는 주변의 비아냥에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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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받은 돈 가지고는 이 근방 어디에도 살 수 있는 땅이 없었어요. 대추리는 기름진 땅에 최상의 수리시설을 갖추어서 그야말로 문전옥답이었어요. 걸어만 다닐 수 있으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좋은 환경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교통수단도 없는 어르신들이 어떻게 수십 킬로미터씩 이동해가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죠."

이 마을 구성원 중 70% 이상이 60대 이상 노인층이다. 평생을 농토를 가꾸며 살아온 대추리 어르신들에게 강제 이주는 곧 생계수단이 없어지는 것을 뜻했다. 스무 살에 시집와 꼭 50년간 대추리에서 살았다는 이아무개(74) 할머니는 "빌라 주변의 밭 서너 평을 빌려서 고추나 배추를 심는 것이 고작"이라고 말했다. 대추리 주민들이 이주에 합의할 때 정부는 주민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취업을 알선해 주고 복합 영농 단지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대추리 주민들에겐 '빛 좋은 개살구'였다.

"정말 형편이 안 좋은 분들이 많이 계세요. 남의 땅에다 집을 짓고 논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신 분들은 보상금이라야 달랑 농가 주택 한 채 값인데, 이주단지에 들어가기 위해 4000만 원 정도씩 대출을 받으셨어요. 이런 분들이 한 15가구 정도 되는데 정말 걱정입니다. 평택시에서 취업 알선이라고 내놓은 게 공공근로 일자린데, 이것도 한시적이어서 내년이면 끝이 나요. 하루에 3만3000원 정도 받으시는데, 주말 빼고 나면 한 달에 70~80만 원 정도 버는 것이 고작입니다. 공공근로도 73세 이상이면 못하는데, 이분들이 지금 어딜 가서 일자리를 찾으시겠어요? 대출금은 고사하고 생계대책도 막막한 형편이에요."

이주단지 주변에 복합 영농 단지를 건설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이 사실상 무산된 것에 대해 신 이장은 특히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에는 어떻게 하겠다고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예산이 없다고 해요. 정부에서는 이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평택지원특별법에 따라 특별지원금을 편성했다는데, 이걸 이미 다 써버렸다는 것이 평택시의 입장입니다. 당최 그 돈을 다 써버렸다는 게 이해가 안 돼 내역이라도 밝혀 보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하지만 신 이장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도 같은 고장이기는 하지만, 나고 자란 마을만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왜 싸워 왔는지 속내를 모르는 주변 사람들이 왜곡된 보도만 듣고는 '보상금은 많이 받고 나왔냐'고 비아냥거릴 때마다 속에서 열불이 납니다. 대추리에 살면서 정부로부터 받았던 멸시와 설움만큼 냉랭함이 이곳에는 있어요. 정부 관계자들이 우리를 대추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했던 악선전의 후유증 때문이겠지만, 이건 대추리 주민들을 두 번 죽이는 셈이에요."

그동안 세상을 떠난 어르신도 두 분이나 된다. 작년 1월에는 엄팔복 할아버지가, 9월에는 조순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3년 6개월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고향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함께해 온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몸져누워 거동을 못하시는 것을 보면 신 이장의 마음은 타들어 간다고 했다.

"언제나 앞장서서 힘을 보태 주셨던 분들이신데, 몇 년 동안 고생만 하시다가 이렇게들 돌아가시는 걸 보면 참, 뭐라 드릴 말이 없어요."

"미군기지가 50년, 100년 더 가겠습니까? 고향 갈 날 올 겁니다"

 대추리 주민들이 사용하던 농기구 뒤편으로 41가구 120여 명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는 송화3리 임시 이주 단지가 보인다.
 대추리 주민들이 사용하던 농기구 뒤편으로 41가구 120여 명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는 송화3리 임시 이주 단지가 보인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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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4월 최후까지 대추리에 남아 있던 가구는 약 50세대. 그중에서 44세대가 이후에도 함께 살기 위해 모였다. 이들이 옮겨갈 이주단지는 이곳에서 3Km 남쪽인 팽성읍 노와리의 국립 종축장 주변이다. 가축 분뇨 냄새가 심해서 살기에는 썩 좋지 않은 환경이지만, 주민들은 오순도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열악한 조건을 감수하고 대추리에서 더 멀어지는 곳으로 갈 예정이다. 이미 이주 단지의 주택공사는 거의 끝난 상태. 하지만 신 이장은 이주를 위해선 먼저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3년 전, 정부와 이주에 합의를 할 때 우리가 가서 살 이주 단지의 지명을 '대추리'로 쓴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의 가장 큰 요구 사항이었죠. 그것을 전제로 싸움을 접겠다는 조건이었어요. 우리 고향 대추리는 미군이 이 땅을 떠나는 시점까지 많은 사람들이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합의서에 이주 단지의 이름을 대추리로 한다는 그런 문구를 명시했던 거죠. 이게 받아들여질 때까지 주민들은 이사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어요. 먼저 평택시에서 법정리명으로 대추리를 쓸 수 있도록 하는 조례를 만들어야겠지요."

신 이장은 정부와 합의한 조건이 받아들여져 대추리 이주단지로 입주를 하게 되면 '대추리 싸움'을 함께했던 지킴이들을 모두 초청해 마을 잔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 대추리' 마을에는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을 기록한 작은 기념관을 세울 예정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오기 전, 대추리 주민들은 저마다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한 물건들을 담은 '타임캡슐'을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에 묻었다.

"미군 기지가 앞으로 50년, 100년을 더 가겠습니까. 흥하면 언젠가는 망하는 법인데, 그런 날이 꼭 올 겁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내 아이들 때라도 돌아가야죠."

나직하지만 다부진 신 이장의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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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