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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7대 왕(1455~68 재위)세조 때에 양성지가 임금들의 시문(글과 문장)을 보관할 관청(규장각)을 두어야한다고 청하였으나 실시하지는 않았다. 이후 숙종대에 종정시(종친부라고하며 왕가 친족의 사무와 역대 임금과 관련된 기록을 관리하던 조선의 핵심 관청)안에 작은 건물을 마련하여 '규장각(奎章)'이라 하였고 규장이란 임금의 시문직제는 갖추지 않았다.

정조(1776~1800)는 영조(1725~1776)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1776년(정조 1년) 음력 9월 25일에 창덕궁 후원내 북쪽에(현 창덕궁 부용지)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직제학·직각(直閣)·대교(待敎)·검서관(檢書官) 등의 관리를 두었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규장각에는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우선 영조의 어필(御筆), 어제(御製)를 봉모당(奉謨堂)을 세워 봉안하고,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였으며 출판 등을 담당하던 교서관을 합쳐서 외각으로 삼았다.

1781년(정조 5)에 청사들 중 가장 넓은 옛 도총부 자리로 옮기고, 강화사고 자리에 강도외각(江都外閣)을 신축하였다. 또 내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국내 문서를 보관하는 서고(西庫)와 중국 문서를 보관하는 열고관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총 3만여 권에 달하는 현재 규장각도서의 기원이다.

관원으로는 내각에 종1품∼종2품의 제학 2명, 종2품∼정3품 당상관의 직제학 2명, 정3품∼종6품의 직각 1명, 정7품∼정9품의 대교 1명이 있었고, 외각에는 당상관으로 겸하는 제조 2명 아래, 정3품 판교, 종5품 교리, 겸교리, 별좌, 정, 종6품 별제, 정7품 박사, 정8품 저작, 정9품 정자, 종9품 부정자 등이 있었다.

내각에는 정식관원 외에 서얼출신의 명망있는 학자로 충원하던 검서관이 있었다. 각신들은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승지 이상으로 국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젊은 당하관 중에서 선발된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시험하였고, 국왕의 언동을 일일이 기록하였다. 또한 왕과 정사를 토론하였고, 교서를 대신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그 밖의 각종 정책결정이나 편찬, 간행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정조 사후에도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규장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궁내부에 소속되었고, 이듬해 규장원으로 변경되었다가 1897년에 규장각으로 환원되었다. 현재는 1989년에 이르러 서울대학교 안에 독립건물을 마련하여 보관하고 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당시 왕권을 위협하던 척리(戚里)·환관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케 하여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疾苦) 등을 살피게 하는 데 있었다. 또한 문교를 진흥시키고 타락된 당시의 풍습을 순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다. '우문지치'는 문치주의와 문화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정조는 많은 책을 출판하도록 하였다. '작인지화'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규장각에서 정조가 유생들을 모아 그 중에서 젊은 문신(文臣)을 뽑고, 뽑힌 신하들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 해서 평가하였다.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도 출세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내각의 관원인 각신(閣臣)은 삼사의 관원보다 더 청요직으로 여겨졌다. 정조는 규장각을 단순한 왕실도서관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었고, 정조대 다른 어느 기구보다도 넓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정치적, 문화적 기구였다.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즉위 직후 외척과 환관 등의 세력을 억누르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혁신 정치를 수행하는 중추 기관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이 달성된 후 정세 안정과 더불어 규장각은 정치 연구, 자문기관이 되었다. 밖으로는 청나라의 건륭(乾隆)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내외 서적의 수집, 편찬 및 간행에 중심적 구실을 하여 우리 문화재 정리와 보관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규장각이 관여하여 생산된 가종 서책 가운데 영구보존을 목적으로 강화도에 큰 외부 도서관이 필요했는데 이를 외규장각이라한다. 강화도에 큰 도서관을 건설한 것은 당시의 강화도가 서울과 가까웠고 섬은 외부침입이 어렵다는 이점을 활용한 것이다.

1782년에 강화도의 외규장각(外奎章閣, 외각)이 완성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으로 이르고,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면서 외규장각이 소실되고, 서적은 프랑스로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역대 임금의 시문과 저작, 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보관하고 수집하였다는 점에서는 국립 중앙 도서관과 비슷하며, 《일성록》 등의 특정한 주제의 기록물을 간행하는 일도 담당했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국회 도서관과 비슷하다.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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