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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균 판서고가 높은축대 위에 자리한 김세균 판서고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 김세균 판서고가 높은축대 위에 자리한 김세균 판서고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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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 김세균(1812~187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공익(公翼)이고 호는 만재(晩齋)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헌종 7년인 1841년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사헌을 거쳐 고동 8년인 1871년에 이조판서를 지냈다. 후에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수원유수가 되었다. 왕명으로 <기년아람>의 속편을 편찬하였으며, 저서에 <완염통고(琬炎通考)>가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자리를 옮기면서 안채와 떨어진 사랑채

현재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뒤로 덕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세균 판서고가는, 원래 한수면 북노리에 있었던 고가다.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겼으며,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집은 본래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 있었다. ㄱ자형의 현재 집은 사랑채고, 안채는 이전 시 딴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많은 문화재들이, 이전을 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택들은 워낙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 데다가, 일반적인 문화재들처럼 한 부분씩 떼어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을 전체로 옮기는 기술이 발달이 되었지만, 아마 1983년경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테니, 집의 기둥 하나, 기와 하나도 다 해체해 옮긴 후 다시 조립을 했을 것이다.     

돌담 돌담이 아름다운 집.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김세균 판서고가는 아름다운 돌담이 눈길을 끈다.
▲ 돌담 돌담이 아름다운 집.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김세균 판서고가는 아름다운 돌담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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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지역에서 이곳으로 1983년에 옮겼다. 안채는 딴 곳으로 가고 사랑채만이 이건되었다.
▲ 사랑채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지역에서 이곳으로 1983년에 옮겼다. 안채는 딴 곳으로 가고 사랑채만이 이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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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만 남은 김세균 판서고가

김세균 판서고가는 몇 번을 찾아갔다. 갈 때마다 문이 잠겨있고 안에 사람이 없어, 매번 주변을 돌면서 촬영을 해야만 했다. 어떤 것이든지 속 시원히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으면 답답하다. 김세균 판서고가 역시 안으로 들어가 마음껏 휘젓고 다니면서 보아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월장을 할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밖에서만 보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난감하다. 많은 고택을 돌면서 이렇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현재 김세균 판서고가는 사랑채와 광채만이 있다.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한 이집은 돌계단을 올라 일각문으로 마련한 대문이 있고, 대문의 우측에 광채가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본 광채는 세 칸 정도로 지어졌으며, 두 개의 판자문을 두고 있다.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ㄱ자 형으로, 앞으로 ㅡ자 형 네 칸으로 되어있고, 뒤로 날개를 붙여 세 칸을 달아내었다. 이 날개채의 끝은 사랑방으로 제사의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광채 대문 옆에 자리한 광채. 세칸으로 지어졌으며, 두개의 판자문을 달고 있다.
▲ 광채 대문 옆에 자리한 광채. 세칸으로 지어졌으며, 두개의 판자문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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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일각문으로 된 대문. 이 대문은 집을 옮길 당시 집안의 일각문을 가져와 대문으로 삼은 듯하다.
▲ 대문 일각문으로 된 대문. 이 대문은 집을 옮길 당시 집안의 일각문을 가져와 대문으로 삼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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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끝에 놓은 개방된 대청이 특별해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개방된 대청을 한 끝에 놓았다는 것이다. 안을 자세히 볼 수가 없어서, 겨우 발 하나 디딜 틈도 없는 축대 위에 발끝을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안의 사랑채는 그래도 특별함이 있다. 대문간에서 바라다보는 사랑채는 좌측 끝에 툇마루를 더하여 뒤로 길게 대청을 드렸다. 이 대청은 위로 들어 올리는 문을 내어 개방이 되어 있고, 밖의 벽으로도 전체를 문을 내어 누정과 같은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옆으로는 두 칸의 방을 드렸는데, 그 앞에는 툇마루를 넓게 깔았다. 그리고 맨 끝의 한 칸은 툇마루에 연결해 판자벽을 달아 마감을 하였다.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은 이곳은, 오래도록 손을 보지 않았는지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이곳의 뒤편엔 까치구멍과 판자문이 있다. 아마 부엌의 용도로 지어진 구조물인 듯하다. 앞으로 보면 방인데, 뒤로 돌아가면 부엌인 이 방은 이 집의 구조가 특이함을 알게 해준다.

대청 사랑채 한 끝에 자리한 대청. 문을 위로 올리게 조성이 되었다. 바깥벽을 모두 문으로 낸 것으로 보아 누정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 대청 사랑채 한 끝에 자리한 대청. 문을 위로 올리게 조성이 되었다. 바깥벽을 모두 문으로 낸 것으로 보아 누정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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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 앞으로 두 칸의 방을 드렸다. 그리고 맨 끝에는 부엌인데도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이 꾸며졌다
▲ 툇마루 앞으로 두 칸의 방을 드렸다. 그리고 맨 끝에는 부엌인데도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이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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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 앞에서는 방과 같은데 뒤편으로 돌아가면 까치구멍과 판자문이 있다. 부엌으로 사용된 곳이다.
▲ 뒤편 앞에서는 방과 같은데 뒤편으로 돌아가면 까치구멍과 판자문이 있다. 부엌으로 사용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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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가 안채의 구실에 제몫을 다하는 집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사랑채이면서도 안채의 구실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의 ㅡ자 형의 공간 네 칸에 두 칸의 방이 있고, 뒤편에 꺾인 부분에도 두 칸의 방을 두어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아마 이 집이 원래의 안채와 사랑채를 그대로 다 옮겨왔으면, 지금보다도 더 품위가 있는 집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고택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있으면 손을 보는 듯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잃고 조금씩 변해가는 고택을 보면서 마음이 허전한 것은, 난 역시 있는 그대로가 더 좋다는 사고를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인가 보다.

제사방 사랑채 뒤편이 맨 끝방을 사랑방으로 두고, 제사의례를 하는 공간으로 마련하였다.
▲ 제사방 사랑채 뒤편이 맨 끝방을 사랑방으로 두고, 제사의례를 하는 공간으로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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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과 담 눈이 쌓인 담장과 장독이 조화를 이룬다.
▲ 장독과 담 눈이 쌓인 담장과 장독이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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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균 판서고가를 돌아보면서, 툇마루에 놓인 메주뭉치가 보기 좋아 혼자 웃는다. 남들이 보면 무엇이라고 할까? 아마 고택답사를 하면서 이렇게 혼자 웃으면서 다닌 적이 꽤나 많은 듯하다. 그만큼 고택에 빠져 있기 때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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