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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종로·중구 걷기 모임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만나 일본문화원 옆에 있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가(私家)인 '운현궁(雲峴宮)'을 둘러보는 것으로 출발을 했다. 운현궁은 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 황제가 출생하여 12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잠저(潛邸)이다.

운현궁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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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운현궁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고종이 즉위한 다음, 이하응(李昰應)은 흥선대원군이 되었고, 살아있는 임금의 아버지였던 그는 운현궁에서 섭정을 통해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의 운현궁을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 현재의 삼환기업과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의 일부까지를 포함하여 사저의 규모를 늘렸다.

하지만 두어 번의 실각과 입각을 거듭하면서 일제의 압력으로 집의 규모는 점점 줄어 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안방이었던 아재당(我在堂)은 사라지고, 현재는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고종이 가례를 올렸던 안채인 노락당(老樂堂)과 별채인 이로당(二老堂), 경비와 관리를 담당하던 사람들이 기거하던 수직사 정도만 남아 있다.
            
운현궁 뒷편에 일본식 건물이 보인다. 운현궁을 감시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운현궁 운현궁 뒷편에 일본식 건물이 보인다. 운현궁을 감시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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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원군의 조부와 부친의 사당도 없어지고, 고종이 창덕궁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때 쓰이던 전용문이었던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 이용하던 공근문(恭覲門)은 모두 헐리고 흔적만 남아있다.

대원군의 사저가 운현궁이라고 불리게 된 연유는 인근의 운현(구름재)고개에서 유래한다고 하며, 4개의 큰 대문이 있어 마치 궁궐을 연상할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1977년 사적 257호로 지정된 운현궁은 영주의 선비촌 등을 관리하는 예문관에서 운용을 담당하고 있으며, 특히 주말에 다양한 문화행사가 자주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찬바람 부는 운현궁에서 나는 몰락한 왕족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가끔 궁궐에서 발견하는 초라한 왕가의 모습을 이곳에서 느끼는 것은 이웃한 일본문화원과 현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안에 있는 일본식 건물을 보면서 일제에 감시당하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나약한 조선왕조의 발버둥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운현궁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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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이 나온다. 천도교는 1860년 수운 최제우가 동학으로 창시한 새로운 종교다. 구한말 전봉준이 동학농민전쟁을 주도하던 시절 동학은 조선최고의 철학과 사상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지만, 일제와 이승만의 친미기독교 정권에 의해 그 힘이 약화된다.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 선생이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고쳐, 한때 신도가 3백만에 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이곳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1 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처음 배포한 배포터이기도 하고, 손병희 선생의 사위였던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선포한 곳이며, '색동회'라고 하여 국내 최초의 아동문화단체가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천도교가 주관이 되어 창간한 청년들을 위한 월간지 <개벽>의 발행과 편집을 담당하던 곳이기도 하다. 천도교에는 <개벽> 이외에도 <어린이> <부인> <신여성> <학생> 등의 월간지를 발간하여 암울한 시기 각 분야의 계몽운동을 주도했었다.

나는 늘 천도교가 왜 이렇게 초라한 종교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일제와 그 뒤를 이은 친미 기독교 정권의 영향으로 우리의 민족종교는 너무 많은 차별과 탄압을 받았나 보다. 민족 종교가 마치 이단(?)으로 비춰지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음식점이다
▲ 민가다헌 음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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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회관을 나와 음식점 '민가다헌' 앞에 선다. 구한말, 명성황후의 친척인 민병옥이 살던 저택으로 한옥에 현관을 만들고, 화장실과 욕실을 내부로 넣고 이를 연결하는 긴 복도를 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태의 근대적 건축 개념이 도입된 한국 최초의 개량 한옥으로 현재는 주차장이 되어버린 앞의 정순주가(현재는 월계동으로 이전 복원, 민속자료 16호)와 쌍둥이 건물이다.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당시 조선최고의 건축가 박길용의 작품으로,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초기 개량한옥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민속자료로서 현재 민속자료 1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다.

민가다헌을 둘러 본 다음, '경인미술관(耕仁美術館)'으로 이동했다. 원래 철종의 사위인 조선 말기의 정치가인 박영효가 살던 집으로 1980년대 미술관, 찻집, 아틀리에 등을 운영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한옥의 내부는 개조하여 찻집 다원으로 꾸몄으며, 야외에는 전시장 외에도 정원 곳곳에 조각, 입체 및 설치작품이 들어서 있다. 매년 봄, 가을에 정기 야외 콘서트를 개최하고 작가와 관객의 만남도 자주 열고 있다.
        
미술관과 찻집이다
▲ 경인미술관 미술관과 찻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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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이곳에서 친구들과 자주 차를 마시곤 했다. 나름대로 운치가 있고 다양한 전시를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인사동에 가는 일이 줄기도 했지만, 상업화된 모습이 싫어 자주 찾지 않는 관계로 이곳도 자주 찾지 못해 늘 마음 한 곳이 허전하다.

이제 경인미술관을 나와 인사동 길로 들어선다.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를 흐르던 물길을 복개하여 길을 낸 관계로 인사동 길은 구불구불한 물길 형태의 도로 모양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원래 인사동에는 가구점, 고서점, 골동품상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인사동에 골동품과 고서점에 많은 것은 일제의 조선 문화재 반출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사동은 현재 한국 제일의 역사문화거리로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아쉽게도 이제는 국산품은 많이 줄고 중국과 동남아에서 건너온 물품들이 넘쳐나고, 값싼 짝퉁이 판을 치고 있어 안타까운 점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은가 보다. 우리의 한글을 지키기 위해 스타벅스와 같은 외국계 커피전문점은 영어 이름을 포기하고 인사동에 들어와 있고, 제발 이제는 더 이상 술집이나 옷가게 등은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구불구불한 인사동 길
▲ 인사동 길 구불구불한 인사동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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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점포 앞에 도로를 점거하고 무단으로 값싼 외국산 물품을 파는 뜨내기 장사꾼이 아니라 당당하게 우리의 골동품과 그림, 차, 술을 파는 역사문화의 거리로 자리 잡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이에 서울시와 종로구는 인근의 종로3가에서 창덕궁까지를 제2의 인사동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가 보다.

아무튼 현재의 인사동은 왠지 싸고 허술하고 어설픈 거리로 비쳐지는 것은 사실이다. 보다 높은 자정의식과 역사 문화적 눈높이가 요구되는 시기인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시 종로/중구 걷기 모임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daipapa



태그:#운현궁, #인사동, #천도교 , #경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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