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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병원보다 빠른 시기에 한센병 치료를 시작한 병원은?

 

한센병 치료 병원은 소록도에만 있었을까? 한센병 환자는 섬에 격리시켜서만 치료했을까? 아니다. 여수에는 한센병을 치료했던 민간 의료기관이 있었다. 그것도 소록도 병원보다 더 앞선 시기에 치료를 시작한 병원이 있다.

 

요즘은 한센병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나병, 문둥병이라고 불렀다. 굳이 어려운 외국 병명을 쓸 이유는 없겠지만, 너무나 혐오스러운 병이다 보니 이미지를 변화시키려고 병명을 바꿔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수공항에서 덕양역까지 걸어가는 길에 애양원을 들렀다. 애양원은 1909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 봉선리에 설립되었다가 환자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1926년 이곳 여수로 이전하였다. 1967년부터 소아마비환자를 위시한 일반 장애아를 수술하기 위한 재활병원으로 확장되었다. 우리가 한센병 치료병원으로 잘 알고 있는 소록도병원이 1916년에 개원했으니 훨씬 앞선 시기에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한센병 치료를 시작했을까?

 

애양원이 설립된 일화가 있다.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목포와 광주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909년 4월 광주에서 활동중인 오웬(Clement C.Owen) 의사가 급성 폐렴에 걸렸으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트(Wiley H.Forsythe)의사가 광주로 급히 오게 되었다.

 

포사이트 의사는 광주 못 미쳐서 길가에 누워 있는 한센병 여자 환자를 보았다. 그는 감염에 대한 위험을 생각지 않고 그녀를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서 왔다. 이 한센병 여인은 광주 선교 진료소 입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수주일 후에 죽었다.

 

그때 이 여인에게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던 광경을 지켜보았던 윌슨(Robert M.Wilson)이 1909년 여름 인근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짓고 한센병자 20여명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후 찾아드는 한센병자 수는 나날이 늘어나 1924년에는 56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천국으로 가는 문 애양원

 

한 소녀가 문 밖에 서있네

눈물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

이 작은 문둥이 소녀가 버림을 받았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나는 소녀가 하찮은 돈을 지불하고

천국을 사는 것을 보았네.

그 소녀는 문을 통과하였고

나를 보고 미소 지었네.

나에게 천국이 무엇이라고 일러주는

미소를

 

버림받은 사람 - by Mr. Arther Hanson of Shanghai

 

이 시는 1924년 상하이에서 광주나병원을 방문했던 Arther Hanson이 병원 문 밖에서 울고 있던 소녀를 발견하고 자신의 돈으로 병원을 입원시키면서 쓴 시다. 당시에는 입원을 못한 나환자들이 문 밖에서 노숙을 하였으며, 일단 병원에 입원을 하면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되고 치료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환자들은 애양원 문을 천국으로 가는 문이라고 하고, 애양원을 천국이라고 했다.

 

1925년에는 여수에 터를 마련하고 광주에서 옮겨올 준비를 했다. 1928년에 한센병자 600여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다. 애양원이라 칭하게 된 연유는 서로 어려운 병고에 시달리고 있지만 서로 사랑하고 도와 가며 살아가자는 뜻으로 愛養院 즉 "사랑의 동산"이라고 했단다.

 

환자들이 기거하던 건물은 폐가로 남고

 

애양원 병원을 지나 역사관으로 가는 길에는 이국적인 건물이 보인다. 마치 외국의 별장 같은 풍경이다. 문에는 토플하우스라는 이름을 달았다. 옆으로 건물의 역사를 적어 놓았다. 1953년 신축하여 1955년 한성신학교로 사용하다 1962년 폐교되었단다. 2000년에 토플하우스(TOPPLE HOUSE)로 개보수하여 기독교인의 쉼터와 수양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념과 가는 길 주변으로 폐가들이 보인다. 돌담을 치고 양철 지붕을 한 같은 형태의 건물들. 가까이 들어서니 격자형 나무 창틀 유리 속으로 햇살이 스며든다. 노란 장판을 깐 빈방은 깨끗하다. 예전에 한센병 환자들이 기거하던 방이란다.

 

방문은 잠겼지만 건물 가운데 문이 열린다. 연탄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양쪽으로 두 개다. 방 한 칸씩 차지하고 부엌은 공동으로 생활해야 하는 작은 집. 부엌을 가로지르는 가운데로 백열전구가 허공에 멈춰서 있다. 지금은 이런 집에서 살기가 힘들겠지. 지금은 평안양로원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단다.

 

애양원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역사관

 

길 위로 높은 첨탑이 보인다. 애양원 교회다. 교회 앞에 손양원목사 순교비가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뒤로 역사관이 있어 계단으로 올라선다. 이 역사관은 1926년부터 1967년까지 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란다. 1972년부터 1992년까지 양로원으로 사용되다 2000년 애양원 역사관으로 개관되었으며, 2002년 문화제 제33호로 등록 되었다.

 

기념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다란 교회종이 놓여 있다. 기념관 입구에는 애양원의 역사와 애양원의 주인이라는 140명의 흑백사진이 채우고 있다. 우리를 반겨주는 관리인은 이분들이 한센병 환자이며 현재 70분이 살아계신다고 한다.

 

애양원이 개원해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사진과 당시 사용하던 의료기구, 환자들의 기록 등을 전시해 놓았다. 옛날에 쓰던 신기한 계산기, 전화기 등 생활용품도 볼 수 있고, 오래된 X선 촬영기에서부터 수술실 풍경 등 우리나라 근대 의료의 역사를 보여준다.

 

한센병은 왜 걸려요?

 

역사관을 둘러보던 중. 아들이 한센병은 왜 걸리는지 물어온다. 나도 모르겠다.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전염병 정도? 마침 관장님이 넉넉한 웃음으로 나타나신다. 아들에게 물어 보랬더니 역사관 분위기 탓인지 용기가 나지 않은가 보다.

 

"한센병(Hansen's disease)은 왜 걸려요?"

"한센병은 접촉성전염병으로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됩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난하고 살기 힘든 시절, 청결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다보니 걸린 병이라고 보면 돼요. 요즘은 거의 없어졌지."

"1층 전시실에는 한센병이 전염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소아마비 환자들과 같이 치료했다고 하던데요."

"한센병이 접촉성전염병으로 직접 피부접촉 등을 통해서 전염이 되기 때문에 옆에 있는 것만으로 감염이 되지는 않아요."

"에이즈와 비슷한 거네요."

"그렇다고 이해하면 되요. 치료를 하면 환자들이 내성이 생겨 직접 접촉에 의해서도 잘 전염이 되지 않아요."

 

슬픈 얼굴을 보여주는 당신들은

 

우리말로는 나병이지만 문둥병으로 불리어졌던 한센병. 코가 뭉그러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려진다는 병. 영화 <벤허> 속에서 안타깝게 보던 장면이 오버랩된다. 2층 전시실에서 만난 한센병 환자의 사진. 천형이라 했던가?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몰골을 받아주고 치료해 주었던 애양원이 없었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정말 보여주기 싫었던 얼굴을 사진기 앞에 섰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잘린 손가락을 보여주기 위해 요즘 인기 가수들이 하는 춤동작 마냥 사진기 앞에 선 당신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서글퍼진다.

 

비록 사진으로 보았지만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 오는 것 같다. 소록도의 아픈 역사와는 달리, 낮선 이국땅에서 종교적 신념하나로 아무도 거두려 하지 않았던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했던 선교사 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점심시간이라 일일이 따라다니며 설명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관장님의 환한 미소를 뒤로하고 역사관을 나온다. 마음이 넉넉해진다.

덧붙이는 글 | 애양원 가는 길은 여수에서 35번 시내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운항되며, 순천에서는 96번 버스가 40~5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애양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수 http://www.wlc.or.kr와 http://www.aeyangwon.org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태그:#애양원, #한센병, #애양원 역사관, #문등병, #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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