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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처음에는 99칸의 대 저택이었다고 한다.
▲ 해평윤씨 동강공파 종택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처음에는 99칸의 대 저택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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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 점동면 사곡리 179번지에는 해평윤씨 동강공파의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몇 번을 찾아갔지만 갈 때마다 문이 잠겨있어 안을 볼 수가 없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안채로, 어디를 통해도 출입문을 빼고는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만큼 안채를 중시한 집으로, 조선말기 경기지역 양반가의 생활상의 한 면을 볼 수가 있는 가옥이다.

이집은 달걀봉 줄기를 배산으로 남향으로 앉아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가옥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윤세주가 고종 28년인 1891년에, 외가인 경주김씨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와 터를 잡고 지은 집이라고 한다. 안채에서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앞으로는 사랑 중문채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안채 쪽으로는 안채 중문간을 겸한 약방채가 놓여있었고, 바깥쪽 솟을대문 좌우로는 행랑채가 있던 집이었다. 그러나 솟을대문과 행랑채는 1950년대 후반 앞쪽으로 흐르는 청미천의 범람으로 무너지고, 사랑채는 1963년에 소실되고 말았다.

장대석 기단위에 지은 요새

해평윤씨 종택의 안채는 한 마디로 요새와 같다는 생각이다. 안채의 남쪽 가운데 있는 문을 통하지 않고는, 출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통로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다만 사랑채쪽으로 난 문이 있고, 그곳에 툇마루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사랑채와 연결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한다.

안채는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문으로 오르는 계단도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놓았다. 집 전체를 돌아보면 주추 하나하나가 모두 마름모꼴의 숙련이 된 석공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정성을 들여 집을 지은 것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바람벽이 있어, 안채가 노출되는 것을 막았다. ㅁ자 형으로 되어있는 안채는 가로는 7칸 반, 세로는 8칸의 규모로 지어졌다.

안채는 문을 총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잘 꾸며진 요새같은 집이다.
▲ 안채 안채는 문을 총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잘 꾸며진 요새같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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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춧돌을 보면 숙련된 석공의 솜씨로 다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잘 지어진 집이다.
▲ 종택의 주추 주춧돌을 보면 숙련된 석공의 솜씨로 다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잘 지어진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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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옥의 안채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경기지방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안방과 대청을 나란히 두고, 좌측 날개채에는 사당방을 드렸다. 사당은 2칸으로 나뉘어져 1칸은 남악공 윤승길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다른 1칸에는 5대조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매년 음력 10월 1일이 되면 영정의 표쇄 차례를 올린다고 한다. 이 가옥은 툇마루가 발달하여 집안의 뒤편에도 전체를 툇마루로 연결을 하였다. 뒤편의 긴 툇마루를 빼고도, 방의 뒤편에는 짧은 툇마루를 두어 전체적으로는 드나듦이 없는 4각형의 형태로 꾸며졌다.

안채의 뒤편을 모두 툇마루로 연결을 하였다. 46칸의 안체 모습만 보아도 지난 날 이 가옥의 모습이 그려진다.
▲ 안채 뒤편 안채의 뒤편을 모두 툇마루로 연결을 하였다. 46칸의 안체 모습만 보아도 지난 날 이 가옥의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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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에 마련한 사당방. 두 칸으로 꾸며져 있다.
▲ 사당방 안채에 마련한 사당방. 두 칸으로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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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글씨가 압권, 터진 뒤 담장도 이색적

안채의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 담벼락 끝에는 기와로 글씨를 넣어 '부귀(富貴)'라는 문양을 만들었다. 안채는 바깥벽을 모두 이중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안채의 문을 들어서면 우측에는 광을 두었다. 광의 위편에는 까치구멍을 내어 환기가 잘되게 꾸몄으며, 판자를 적절히 이용하여 단조로움을 탈피했다. 안채 한 동만 남았지만, 집의 구조를 보아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을 그려보기에는 어렵지가 않은 집이다.   

집 뒤편으로 돌린 담장을 보면 장독대 뒤편이 담장이 터져 있다. 이렇게 담장을 튼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으로 사람들이 출입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집주인이 다니지는 않았을 테고, 집의 하인들이 다니던 통로는 아니었을까? 그 문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산에서 나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저 담장에 커다랗게 뚫린 구멍이지만, 한 때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 문이었을 것이다.

기와로 글씨를 만든 담벼락. 작은 것 하나까지도 신경을 써서 지은 집이다.
▲ 문양 기와로 글씨를 만든 담벼락. 작은 것 하나까지도 신경을 써서 지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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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편 산으로 난 담장에 난 구멍. 이곳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아마 뒷산으로 가기위한 동선이었을 것이다.
▲ 뒤편 담장 뒤편 산으로 난 담장에 난 구멍. 이곳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아마 뒷산으로 가기위한 동선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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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터 바라다만 보아도 상상이 가

현재 해평윤씨 종택의 안채를 보면서 우측에는 기단을 쌓은 터가 남아있다.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을 보아 이 자리가 사랑채가 있던 곳이라는 것은 쉽게 알아볼 수가 있다. 아직까지 주춧돌이 여기저기 남아있고, 중앙에는 구들을 놓았던 탄 돌들을 쌓여있다. 이렇게 남아있는 자재를 이용하면 예전의 모습을 복원할 수도 있을 텐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해평윤씨 동강공파 종택의 예전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는 없는 것인지.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채가 있던 터. 장대석 기단위에 지은 사랑채는 1963년 소실되었다
▲ 사랑채 터 사랑채가 있던 터. 장대석 기단위에 지은 사랑채는 1963년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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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사랑채의 구들돌. 검게 된 구들돌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 구들 불타버린 사랑채의 구들돌. 검게 된 구들돌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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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한 동만 갖고도 예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해평윤씨 동강공파 종택. 처음에는 99칸의 큰 저택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안채 46칸만 남아있지만 그래도 당당하다. 요새와 같은 안채만 남아있어 아쉬움이 남는 가옥. 여주 해평윤씨 종택은 선뜻 뒤돌아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집이다.


태그:#해평윤씨, #동강공파 종택, #여주, #점동, #문화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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