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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은 조수경이 의뢰했던 문제로 옮겨가고 있었다.

"8·15 이후 북한에서 테러를 자행한 집단은 대부분 소련과 결탁한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위에 허가이가 있었습니다."
"허가이? 그게 한국사람 이름인가?"

"맞습니다. 이름에서부터 그의 경도된 소련 성향을 알게 해 줍니다. 그의 자식들은 리라, 마이아 등의 러시아 이름을 썼습니다. 허가이를 중심으로 한 소련계 한인들은 북한 권력을 장악하려고 기도했던 외세 결탁 세력의 대표 집단입니다. 실상 그들은 소련인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소련이 공식적으로 파견한 소련계 한인 438명 중 하나였으니까요."

김인철은 허가이의 출생지가 소련이라는 설도 있고,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소련으로 이주했다는 설도 있다고 했다. 그는 모스코마 로모노스프 대학을 졸업했고 우즈베크 공화국 타슈켄트 주당(州黨) 비서를 지냈다.

일제 강점기에 멀쩡히 소련인 행세를 하던 허가이는 8·15 이후 갑자기 귀국하여 소련을 업고 북한의 거물로 떠오른다. 그는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직부장과 상무위원을 겸임했다. 그는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검열위원장에 오르고 북로당과 남로당의 연석회의에서 당 제2부위원장으로 선출된다.

허가이는 1950년 조선노동당 제1서기가 되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허가를 얻어냈다. 6·25 전쟁 중에 부수상이 된 그는 끝까지 휴전에 반대한 주전파였다. 그는 수많은 당원들을 불순, 비겁분자라는 올가미를 씌워 책벌했다. 그에게 책벌 당한 인원이 무려 45만 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는 지식수준을 문제 삼아 농민들을 배척하기도 했다.

허가이의 행동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김일성이 그에게 민족을 적대시하는 불온한 책벌주의가 있다고 하여 비판한다. 이후 그는 서서히 권력을 잃게 된다. 그는 자살했다는 설과 타살 당했다는 설이 함께 나돈다. 이렇게 그는 출생과 죽음이 둘 다 분명치 않은 인물이었다.     

"허가이와 연계된 테러 집단이 해방정국에 북한에서 설쳤다는 것이지?"
"저는 그렇게 봅니다. 국내파 공산당수 현준혁도 테러로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에는 이승만보다 더 친미적인 서재필이 있었듯이, 북에는 김일성보다 더 친소적인 허가이가 있었다는 것인가?"

"게다가 허가이는 폭력적이었고요. 아무튼 외세결탁세력에게는 똑같이 우리 민족을 미개한 집단이라고 매도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조국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미국과 소련을 자신의 모국이라고 여겼습니다."
"요컨대 테러가 외세 결탁 세력의 특기라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한편, 이후 냉전 시대에 벌어진 대남 테러들은 대부분 허가이를 추종했던 소련파들이 주도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순수 북풍이었을 것이고."
"맞습니다. 최소한도 두 가지 테러, 즉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등은 그들의 소행입니다."
"그것은 음습하고 무자비한 폭력 테러였어."
"하지만 선배님, 북한의 소련파가 자행한 대남 테러가 있었다면 남한의 미국파가 저지른 대북 테러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고 볼 수밖에 없지."

조수경은 김인철에게 언제 시간이 날 때, 북한 김일성 정권의 성립 과정에 대해서도 말해 달라고 했다.

"그건 이미 남한에서도 책으로 많이 나와 있습니다."

조수경은 후배에게 조금 부끄러웠다.

"후배, 지난번에 말한 아브라함이라는 미국인 알지?"
"그럼요. 경찰청에서 특강도 했잖습니까? 그때 선배님을 띄워주기도 했고요."
"나에게 도움을 많이 주고 있어. 나중에 안 일인데 내 아버지의 청년 시절 친구였대."
"선배님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인혁당 사건 알지?"
"네. 압니다."
"그때 돌아가셨어."
"아니, 사법살인으로 즉결 사형 당했다는 그 여덟 명 중의 한 분이란 말씀인가요?"

조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미국인들은 편리하게 '아이 엠 쏘리'라고 하는데... 아무튼 선배님 참 대단하십니다."
"뭐가?"
"그러면서도 선배님은 건전하고 긍정적인 대한민국 경찰이 되셨잖습니까?"

"아버지를 내가 체험했더라면 나에게 한이라는 것이 안 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어.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그들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지."
"그건 선배님이 머리가 좋은데다가 심성이 곱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아버님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라면 따님은 온유한 자입니다."
"나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했잖아. 그럼 후배는 뭔가? 제 1번, 마음이 가난한 자인가?"
"저는 지갑이 가난한 자입니다."
"아무튼 그 산상수훈을 아브라함이 비행기에서 펴 놓고 있었어. 지금 생각하면 다소 의도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덟 복인과 여덟 악인이라..."

김인철은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힘없이 말했다.

"그러면 처음 하던 얘기 다시 하자고. 나에게 남과 북 테러 집단을 연구해 보라고 조언한 것은 아브라함이었어."
"...그랬군요. 범인이 테러 집단이라면, 그들은 반통일 세력이라는 건가요?"

"일단 그렇게 된다고 보아야지. 그런데 아브라함부터 미스터리의 인물이야. 그는 남북한을 무시로 왕래하면서 미국 국적도 있고 러시아 국적도 있으니 뭐라고 해야 하나? 친미이기도 하고 친소이기도 한 것인가? 둘 단가, 아니면 둘 다 아닌가?"
"그런 경우는 저도 처음 들어 봅니다. 그는 범상치 않은 인물입니다.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주철식은 요즘 상태가 어떻지?"
"다소 안정을 찾아가는 모양입니다."
"당분간 그를 지독히 심심하고 무료하게 만들어야 해. 방에는 연필과 종이만 넣어 주고. 그러면 뭐라도 끼적거릴 거야."

조수경은 주철식을 본격적으로 신문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날 밤 조수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메일은 첫 문장부터 수사에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 수경, 범행의 행동대원 하나가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편지를 쓰는 거요. 나도 하는 일 없이 호텔에만 머무르고 있으니 조금 무료해지기 시작했고. 사실은 수사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조수경은 메일을 읽다 말고 머리를 들며 눈을 감았다.

'연쇄살인범은 경찰 수사를 알고 싶어 한다.'

의외로 아브라함의 메일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 나는 일단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수경의 생각은 어떤지?


태그:#허가이, #김일성, #서재필,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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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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