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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로마시대에 로마 사람들은 로마의 7개 언덕에 모여 살았고, 이 7개 언덕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쾌적하고 전망이 좋았던 팔라티노 언덕(Monte Palatino)은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황제 그리고 귀족들의 사랑을 받는 고급 주거지로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나는 아내와 딸의 손을 잡고 팔라티노 언덕을 걸었다. 하늘은 파랗고 맑았다. 발 아래의 포로 로마노(Foro Romano)와 로마 시내는 찌는 듯이 덥지만 이 언덕 위는 시원한 바람에 상쾌했다. 40~50m 높이의 언덕은 둘레길이가 1737m인 사각형 모양에 평평한 고원과 같은 지형이었다. 지대가 높고 주변에 큰 길이 없어 소음도 없이 조용했다. 이 넓은 언덕이 상류층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던 것은 과거에도 삶의 환경이 이처럼 쾌적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덕 위에는 여행자들이 많지 않았다. 입장료가 비싼 데다가 허물어진 유적의 외관이 포로 로마노나 콜로세움 쪽에서 대충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팔라티노 언덕에 오른 여행자들은 로마의 유명 여행지마다 만나는 인파를 피해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주변에는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벤치도 꽤 눈에 띄었다.

 

 

광활한 언덕의 유적으로 길을 인도하는 키 큰 나무들이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의 나무들은 한국 사람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소나무들이었다. 이 인상적인 소나무들은 분명히 전체적인 외양이 소나무이지만 우리나라 소나무에 비해 나무기둥과 가지들이 통통하고 튼실했다. 예상 밖으로 만나게 된 숲길은 포근했다.

 

나 어릴 적 로마시대를 소재로 했던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로마의 신전들 사이에 항상 신비스러운 소나무가 서 있었다. 나는 당시에도 이 소나무들이 영화 속에서 설정된 가공의 나무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신비스러운 소나무가 길을 만들어 언덕 위의 산책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로마시대에도 이 소나무들의 조상 나무들이 이 언덕을 굽어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류 역사 전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팔라티노 언덕 위 곳곳에는 잡초가 자라고 이름 모를 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언덕 아래 포로 로마노보다 언덕 위 꽃들은 더 늦게 만개하는 것 같았다. 무너진 대리석 기둥 조각 사이에 꽃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로마시대 왕들의 언덕은 허물어졌지만 그 역사의 유적 속에서 나는 한적한 자연을 만끽하고 있었다. 봉우리를 터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분홍 꽃잎은 곤충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나는 나팔꽃을 닮은 이 꽃 봉우리 하나를 꺾었다.

 

꽃과 잡초 사이에는 허물어진 유적 천지에 큰 돌, 작은 돌이 널려 있었다. 고대 로마가 이 팔라티노 언덕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언덕의 비탈에는 로마 도시 발달 시기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유적들이 발굴되어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의 역사와 황궁에 대해서 이것저것 공부를 하고 왔지만 막상 언덕 위에 올라서자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현장 공부가 아니라 책을 통해 얻은 간접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인들이 보던 풍경이 지금 내 눈 앞의 풍경과는 얼마나 다를지를 상상해 보았다.눈앞의 유적이 정확히 어떤 용도의 건물이었는지는 완벽하게 연결할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거주공간이었던 도무스 아우구스타나(Domus Augustana)와 황제의 집무공간이었던 도무스 플라비아(Domus Flavia)는 구별이 되었다. 두 건축군은 워낙 외양이나 규모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언덕 정상의 황궁 주변에 로마시대 귀족들의 저택이 산재해 있었다.

 

 

팔라티노 언덕의 서쪽 기슭, 무너진 귀족들 저택 사이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년~14년)와 그의 부인 리비아(Livia)가 살던 리비아의 집(Casa di Livia)이 소박하게 남아 있다. 집 이름이 리비아의 집인 것은 총명한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와 로마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을 지중해를 아우르는 국제적인 국가로 만들고 로마에 의한 국제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를 시작한 황제였다. 나는 이 언덕에 오르기 전,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흔적이 남은 이 집에 대한 기대가 가장 컸었다. 황제가 살던 집은 아주 매력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집은 예상 밖으로 충격적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검소하고 물욕이 없었던 왕이라고 들어왔기는 해도 그가 태어나고 살았다는 집이라고 하기에는 집이 충격적으로 누추했다. 로마의 대부분 건물에 장식된 대리석 장식이 없는 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모두 뜯어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귀족의 집들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화려한 채색의 모자이크벽화도 없었다. 단순한 프레스코화만 벽면에 몇 점 장식되어 있을 뿐이었다.

 

방의 작은 크기는 과거 황제가 살았던 집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마치 우리나라의 아파트 방만한 크기의 방이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집은 역대 로마의 귀족들 저택 중에서 가장 작지만 그가 다스리던 당시에 로마의 영토는 역사상 가장 넓었다고 한다. 로마의 장엄한 건축물들 사이에 이런 초라한 황제의 주거지가 있었다.

 

초라함을 마다하지 않았던 영웅의 자취를 보기 위해 많은 여행자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도무스 아우구스타나의 장엄한 구조물들에 비하면 볼품 없는 이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로마의 그 흔한 거대함보다는 초대 황제로서 검소하게 살다간 한 인간의 매력이 외국의 여행자들까지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언덕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도무스 아우구스타나(Domus Augustana)는 오히려 더 한가한 편이다. 나는 언덕 위쪽 정상부에 장엄하게 세워진 도무스 아우구스타나 입구를 향했다. 도무스 아우구스타나는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이 이 팔라티노 언덕에 연달아 짓기 시작한 궁전의 유적이다. 그 이후의 황제들은 이곳에 장엄한 궁궐과 정원을 만들고 언덕 아래의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문세가와 부자들은 전망 좋은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도무스 아우구스타나는 팔라티노 언덕으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전임 황제였던 네로(Nero, 37년~68년)가 거대하게 세웠던 궁전에 대한 비판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궁전의 건물들은 수평으로도 뻗어 나가지만 땅의 아래로도 구획되어서 공간 배치를 최대화하고 있었다. 갈색 잔디밭과 흙 길 위에 폐허 같이 남은 벽돌 유적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었다.

 

나는 이 도무스 아우구스타나에 남은 벽돌 구조물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북방의 게르만족들에 의해 팔라티노 언덕은 파괴되고 한때 이곳은 새로운 건축물에 사용하기 위하여 대리석을 떼어가는 채석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대제국의 화려함은 제국의 쇠락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이미 허물어지고 없었다.

 

허물어진 유적 속에 남은 것은 붉은 살을 드러낸 벽돌 기둥들이고 겨우 목숨을 유지한 몇 개의 대리석 부재들이 땅 위에 뒹굴고 있었다. 오랜 동안 도굴꾼의 약탈로 인해 곳곳에 구멍이 뚫린 건물도 많다. 유적지 건물의 구멍 중에는 과거 발굴조사 때의 굴착작업으로 인해 생긴 구멍들도 있다.

 

후세 사람들이 대리석을 떼어간 자리에 남은 벽돌 구조물들은 흉측했지만 남아있는 구조만 보아도 당시에 얼마나 거대한 구조물들이 이 언덕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지 짐작이 됐다. 나는 2천년의 세월 동안 언덕을 지키고 있는 벽돌 구조물들에 손을 갖다 대 보았다.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던 벽돌은 방금 햇살을 받았기 때문인지 따뜻했다.

 

지금은 오후의 햇살에 의해 건물에 온기가 남았지만 로마시대 당시에는 이 건물 내부에 사람들이 내뿜는 온기가 차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건물의 천장이 날아가 버리고 없지만 당시에는 천장 아래에 벽돌벽과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궁전의 내부가 따뜻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팔라티노 언덕의 벽돌들은 2천년 동안 온기를 내뿜고 있었을 것이다. 따뜻한 벽돌은 화려했던 대리석 겉옷을 벗고 황량한 언덕 위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 내 눈앞에 놀라운 건축물이 나타났다. 스타디움(stadium). 요즘도 아주 흔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건축물이 도무스 아우구스타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 건축물의 출현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 유명한 로마 유적지 관광엽서에도 잘 접하지 못했던 유적이었다. 크고 아름다우며 감동적인 건축물이 팔라티노 언덕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이런 건물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나는 오늘 오후에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오기를 너무 잘했다고 말했다.

 

스타디움은 로마황제들의 궁전 중에서도 내부 정원 안에 자리잡은 건축물이다. 스타디움은 기본적으로 직사각형의 모습이지만 모서리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무슨 경기가 열렸던 경기장의 모습을 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중앙분리대가 없는 경기장을 '스타디움(stadium)'이라고 불렀고, 현재에도 '스타디움'이라고 불리는 경기장의 어원이 되었다.

 

이 스타디움은 팔라티노 언덕에 도무스 아우구스타나를 완성시킨 도미티아누스 황제(Titus Flavius Domitianus, 51~96년)가 경기장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옥외공간이었다. 그래서 스타디움은 도미티아누스 스타디움(Stadium of Domitianus)이라고도 불린다. 혹자는 이 스타디움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비밀정원이었다고 하지만 이름과 같이 여러 경기도 열렸을 것이다. 이 스타디움에 황제가 앉아서 경기를 즐기던 관람석 발코니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스타디움에서 어떤 경기를 했는지, 황제가 이 스타디움에서 직접 경기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구조물의 모양이 현대의 육상트랙이나 전차 경기장 같이 생겨서 그렇게 유추할 뿐이다. 체육경기를 하기에는 약간 짧은 184m의 길이를 가지고 있지만 무언가를 이 안에 가둬두고 경기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타디움의 한쪽 가장자리에서 발밑의 스타디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 스타디움은 언덕의 땅을 파고 들어가 건설된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사방이 땅으로 둘러싸인 벽면을 만들었고 황제가 발코니 위에서 한 눈에 경기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땅 속의 특이한 구조는 이 구조물이 현대에까지 보존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스타디움의 바닥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기둥들이 부러진 채로 땅 바닥에 누워있다. 나는 로마시대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대리석 기둥들이 도열하듯이 스타디움의 측면으로 서있는 모습이 매우 품위있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반원형 모양으로 땅위에 남은 구조물은 아마도 분수 아니면 꽃을 가꾸던 정원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스타디움이 황제가 경기도 즐기면서 산책도 하던 경기장 겸 은밀한 정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 보았다.

 

드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스타디움은 내가 이탈리아에서 본 어느 건축물보다 아름다웠다. 이탈리아의 거대한 건축물들은 벅찬 감흥을 주지만 도처에 비슷한 건물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스타디움은 참으로 독창적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이 위대한 건축물을 보면서 이탈리아 여행 중 가장 큰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잘 만들어진 2천 년 전 건축물이 온갖 거대한 건축물을 경험한 현대인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곳은 정말이지 기분이 묘한 곳이다. 한적한 언덕 위에서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나는 스타디움에서 발걸음을 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곳은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과거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 팔라티노 언덕은 시간여행자처럼 내가 과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내가 로마시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내 앞에는 소박한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영원한 도시 로마, 황제들은 팔라티노 언덕의 궁궐을 걷고 있었다. 내 눈 앞에 벽돌만 남은 위대한 건축물들 위로 당시의 건물이 겹쳐지고 있었다. 모자이크화와 분수로 화려했던 웅장한 대리석 건물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고대 로마로의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여행에서 돌아와 이 영원의 도시를 사실적으로 화려하게 복원해 보고 싶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탈리아, #로마, #팔라티노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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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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