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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건히 땀에 젖어 병희네에 닿았다. 호주에 살고 있어 몇 해에나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는 친구지만 오랜 인연인 탓에 어쩌다 보아도 멀지 않다. 내 후배이자 병희의 후배이기도 한 동환도 제수씨와 아이를 데리고 와 우릴 반겼다. 

네발로의 바비큐 파티에 가기 전 들렀던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의 한인 식당에서 접한 음식은 한국의 맛 그대로였다. 미각의 기억은 이렇게 오래 가는데, 외국에서도 이토록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못하고 사는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없는지 동행한 네발로 회원들에게 물었다.

80년대의 상황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듯 호주로 나왔다는 쨈비님, 몇 해 전만 해도 20년 이국 생활을 접고 귀국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었다 했다. 그러나 상식과 원칙이 통하지 않고 오로지 자본과 경쟁의 논리로 왜곡되어가는 고국의 모습을 보며 그냥 이국에서 뼈를 묻기로 마음을 굳혔다 했다. 계절이 다른 먼 땅에서 뼈다귀해장국을 사이에 두고 모국어로 나누던 대화는 다소 어둡고 끈적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호주에서 타일공으로 일하고 있다. 몸 쓰는 일에 대한 편견이 없고 무한 경쟁에 내몰리지 않는 사회에서 타자로 사는 삶을 택했다.
▲ 동환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호주에서 타일공으로 일하고 있다. 몸 쓰는 일에 대한 편견이 없고 무한 경쟁에 내몰리지 않는 사회에서 타자로 사는 삶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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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로 이민 온 지 5년이 넘어가는 동환, '킹스크로스(Kings Cross)'를 '왕십리'로, '블랙타운(Black town)'을 '흑석리'라 부르는 그의 말도 대략 이런 어조였다. 끝내 소통할 수 없는 언어의 장벽과 떨어져 있는 부모형제와의 메울 수 없는 정회가 단(短)이라면 무한경쟁으로 내몰리지 않는 여유로운 삶과 복지제도, 맑은 자연을 누릴 수 있는 삶은 장(長)이라 했다. 하여 자신은 다른 세계에서 타자로 살아가는 삶을 그냥 수용하고자 한다 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지금 호주에서 타일공을 하고 있다. 몸을 쓰는 일에 두려움이 없고 몸 쓰는 직업이 천대 받지 않는, 오히려 경제적인 면에서는 더 대접받는 이곳의 삶만큼은 만족스럽다 했다. 환경은 달라졌으되 여전히 삶은 이어지고 있다. 시드니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시드니, 원시림 속 리조트

다음날, 브리즈번(Brisbane)에서 경숙 부부와 합류하기로 한 날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부식을 포함해 필요한 준비물을 시드니에서 미리 준비하기로 했다. 비행기로 옮길 수 있는 수하물의 한계 때문에 무게가 많이 나가는 부식류는 한인 가게에서 사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기본준비를 호주에서 하기로 했었다. 10Kg짜리 쌀 한 포대와 라면 두 상자, 그리고 김, 고추장이나 통조림류의 소소한 부식들을 챙겼다. 사 먹을 수 있는 곳에서는 매식을 하기로 했지만 오지로 들어갈수록 캠핑과 취사에 의존할 날이 많아질 것이고 한인 가게를 찾아 움직이는 일도 번거로울 것 같아 미리 준비했다.

우리 나라와 같은 가스스토브가 흔하다. 10L, 15L 용량의 생수통들이 있어 장거리 캠핑용으로 매우 유용하다.
▲ 준비 우리 나라와 같은 가스스토브가 흔하다. 10L, 15L 용량의 생수통들이 있어 장거리 캠핑용으로 매우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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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에서 발견한 10L, 15L 용량의 생수는 무척 반가웠다. 비닐주머니가 있는 종이팩 형태도 있고 플라스틱 물통 형태도 있는데 생수 사용 후 빈 통 활용이 가능하다. 네발로의 특공님이 따로 물통을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 했던 말을 그제야 이해했다.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를 떠나 세계는 빠른 속도로 하나로 묶여가고 있음을 인정했던 바이고, 먹고, 입고, 거주하는 양식에 이제 놀랄 것이 있겠나 생각했는데 이런 작은 것에도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이곳은 이런 생수통이 필요한 넓은 세계인 것이다. 자동차에 주연료통 외에 보조연료통까지 장착되어 있다거나 차량 출고할 때부터 윈치장착 여부가 옵션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흔한, 일명 '부르스타'라는 휴대용 가스스토브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했던 10kg짜리 가스통과 대형스토브를 이것으로 대체했다. 길을 떠나려거든 눈썹도 빼어 놓고 가라 한 말이 꼭 이런 심정에서 나왔으리라. 아무리 루프렉을 이용한다 하지만 네 사람의 개인짐과 야영장비, 취사장비, 냉장고, 구난장비, 공구류와 예비 연료, 물, 부식, 촬영장비까지 다 적재해야 하니 줄일 수 있는 짐은 줄여야 했다. 그런 까닭에 출발 전부터 1인의 짐을 작은 여행용 가방과 가벼운 등짐 한 개로 한정했었고 텐트도 소형의 것으로만 준비했던 것인데 그래도 짐은 차고 넘쳤다.

지금 출발해도 좋을 상태로 차를 준비해 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시드니 시내를 향해 나섰다. 아내는 냄새로 그 도시의 인상을 기억하곤 하는데 시드니를 캐나다 밴쿠버의 냄새에 비견한다. 유럽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신대륙이 주는 그 미묘한 분위기. 그러나 미국적 분위기는 아니면서 영국의 냄새는 더더욱 아닌, 독특하고 오묘한 느낌이 있다.

원시림 속 리조트라는 느낌이 드는 시드니. 어른 몇이 모여야 둘러쌀 수 있는 거대한 가로수들과 곳곳에 있는 공원
▲ 숲 속의 도시, 도시 속의 숲 원시림 속 리조트라는 느낌이 드는 시드니. 어른 몇이 모여야 둘러쌀 수 있는 거대한 가로수들과 곳곳에 있는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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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뿐 아니라 호주의 도시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원시림 속 리조트 분위기가 난다. 현재도 육군의 병영으로 쓰이는 시드니의 배럭(Barrack)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가로수들은 몇 사람이 팔을 벌려도 감쌀 수 없을 만치 컸다. 가로수로 조림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 거목들 사이로 길도 나고 건물도 지어진 것이리라. 장정 허벅지보다도 큰 나무껍질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어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하다.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의 식물과 나무들도 사람이 애써 가꿨다기 보다는 18세기 이민자들이 도래했을 당시의 무성한 원시림을 다소 솎아만 놓은 느낌이다. 이거야말로 날로 먹는 장사가 아닌가. 앙상한 나무에 희한하게 큰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무엇인가 싶어 응시하는데 파다닥 열매가 날아오른다. 까마귀보다도 더 큰 박쥐. 흡사 날개 달린 고양이 같다. 날개로 몸을 감싸고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이 영락없는 열매였던 것이다. 도대체 내가 어디에 와 있는 거야? 인구 420만이 넘는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는 정글, 그리고 대낮에 날아다니는 박쥐라니… 숲 속에 도시가 있고 도시 속에 숲이 있다.

보타닉 가든의 나무에 매달린 박쥐들. 까마귀 보다도 큰 박쥐들이 대낮에 날아오른다. 흡사 날개달린 고양이 같다.
▲ 앙상한 가지의 열매들? 보타닉 가든의 나무에 매달린 박쥐들. 까마귀 보다도 큰 박쥐들이 대낮에 날아오른다. 흡사 날개달린 고양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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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와라 와이 "꺼져"

오페라 하우스보다도 먼저 찾은 곳은 호주국립해양박물관(Australian National Maritime Museum)이었다. 달링하버(Darling Harbour)의 피어몬트 다리(Pyrmont Bridge) 옆에 위치한 이곳엔 호주를 둘러싼 바다와 선박, 해양의 역사와 문화가 있다. 나라 전체가 대륙이자 섬인 호주의 입장에서 바다는 자신을 가두는 벽이자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었을 것이다. 유형지로 시작한 호주의 역사가 바다에 둘러싸인 고립감과 바다로 연결되는 개방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1994년에 퇴역한 폭스트롯급 잠수함과 달링급 구축함과 함께 복원된 제임스 쿡 선장의 인데버호가 정박되어 있다.
▲ 호주국립해양박물관 1994년에 퇴역한 폭스트롯급 잠수함과 달링급 구축함과 함께 복원된 제임스 쿡 선장의 인데버호가 정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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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지금도 바다를 향한 호주의 열정은 남다르다.  동티모르 사건 때 가장 먼저 군을 파견한 곳이 호주였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곳곳의 크고 작은 재난에 열성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런 용도에서 대형상륙함의 꾸준한 수요를 제기하고 있다. 언제든 아시아가 밀고 내려올 것이라는 황색의 공포를 털고 아시아를 협력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증표일 것이다.

해양박물관엔 1969년에 인도되어 1999년까지 호주 해군의 연역으로 활동한 90m의 영국제 잠수함 '온슬로우(Onslow)'와 1986년에 퇴역한 달링급 구축함 뱀파이어(HMAS Vampire)가 정박해 있다. 폐쇄성과 은밀성을 기반으로 하는 잠수함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각별함과 군함에 마련된 전시실을 둘러보는 소소한 맛은 있으되 내 진짜 관심사는 그들 옆에 놓인 자그마한(구축함이나 잠수함에 비해서) 범선에 있었다.

제임스 쿡은 1770년 호주 남동부 보타니 만에 상륙했다. 그러나 1778년 유형자들을 실은 선단이 도착했을 때 항구로 부적절한 보타니 만 대신 포트 잭슨을 근거지로 택한다. 그곳이 지금의 시드니다.
▲ 시드니 제임스 쿡은 1770년 호주 남동부 보타니 만에 상륙했다. 그러나 1778년 유형자들을 실은 선단이 도착했을 때 항구로 부적절한 보타니 만 대신 포트 잭슨을 근거지로 택한다. 그곳이 지금의 시드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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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30m에 360톤이 조금 넘는 이 배가  제임스 쿡(James Cook 1728-1779)의 '인데버호(Endeavour)'다. 엄밀히 말하면 복원된 인데버호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쿡의 사후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영국 플리머스 항을 출발해 쿡의 항해 노선을 그대로 답사한 복제선과 동일한 배인지는 모르겠다). 1768년 8월, 94명의 수병을 태우고 알려지지 않은 세계 '논둠 코그니타'를 찾아 영국을 떠난 이 배가 1770년 4월 19일 호주 남동부 해안 보타니만에 도착했다. 호주대륙이 본격적으로 유럽 사회에 노출되는 계기였다.

갑판에 오르니 날품팔이 농장 소년에서 석탄운반선의 선원으로, 그리고 영국 해군의 하급 수병을 거쳐 태평양 탐사대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쿡의 생애가 오롯이 느껴진다.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의 산호초에 좌초된 이 배를 구하려 대포와 장작을 버리며 무게를 줄이던 그의 모습과 호주의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보는 선원들에게 '유럽의 물질적 풍요나 편리함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할 것'이라며 타이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갑판 선실의 모습. 식탁과 대포, 선실이 어우러져 있다. 캡틴 쿡은 당시 선원들에게  유행하던 괴혈병의 예방에 신선한 채소가 유용하다는 사실을 안 선구자였다.
▲ 인데버 호의 내부 하갑판 선실의 모습. 식탁과 대포, 선실이 어우러져 있다. 캡틴 쿡은 당시 선원들에게 유행하던 괴혈병의 예방에 신선한 채소가 유용하다는 사실을 안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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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 밑은 포대 겸 식당, 선원의 침실을 겸하고 있다. 식탁 위의 목제 식기들도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당시 이 식탁엔 다른 배와 달리 소금에 절인 쇠고기보다도 홍당무 잼이나 양배추가 더 많이 올랐으리라. 18세기, 영양소나 감염의 개념조차 없었던 때에 이런 조치로 괴혈병을 막을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오랜 선상 생활로 생긴 비타민 C 결핍은 괴혈병을 유발했고, 이것은 당시 선원들 사이 치사율 1위의 무서운 병이었다. 아직 의학계에 괴혈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독립전쟁기 미해군조차도 '쿡의 배를 만나면 적으로 간주하지 말고 인류 보편적 우애로 대하라'는 지침을 갖고 있었다. 적국 장교에 대한 이런 예우가 32만Km(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항해하며 이룬 과학적 성과와 세계지도 완성의 업적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군인, 탐험가, 항해가로서의 능력과 책임감,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의지와 모험 정신을 보편적 정서로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의 행보와 업적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이란 비판도 받고 있다. 1774년 쿡이 타히티를 방문하고 추산한 20만4000명이던 원주민 수가 1865년 프랑스의 조사에서는 7169명으로 줄어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이나 호주, 뉴질랜드 가릴 것 없이 백인이 발을 딛은 땅에서 벌어지는 양상은 다 그러했다. 쿡이 호주 보타니 만에서 몇 가지 물품으로 접촉을 시도했을 때 보여준 원주민들의 반응은 이런 사태를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쿡이 그들에게 들은 대답은 '와라 와라 와이'였으니까… '꺼져!'라는 말이었다.

석양 무렵 사물들은 실루엣으로 변할 준비를 한다.
▲ 석양의 하버 브릿지 석양 무렵 사물들은 실루엣으로 변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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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이었을까. 3차 탐험 중이던 쿡은 하와이에서 분노에 찬 원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흰 돛을 달고 찾아온 그들을 신으로 대접하던 원주민들은 이후 보여주는 백인들의 추태에 실망하게 되었다. 도둑맞은 보트를 찾으러 10명의 해병과 상륙한 쿡은 제단까지 어지럽힌 것에 분개한 수천의 원주민에게 포위되어 뼈가 발려진 채 살점만 배로 돌아왔다. 1779년 2월 14일의 일이었다.

그냥 '캡틴 쿡'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헌신,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지도력, 자기 신분과 현실의 한계를 노력과 성실로 극복한 한 개인으로, 무엇보다 넓고 알려지지 않은 세상을 갈망한 모험가로서 가슴에 남을 수는 없는 것인가.

호주의 상징이 된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는 1958년 착공해서 1973년까지 무려 14년의 기간을 투자해 완공했다.   덴마크 건축가 요른 우츤이 설계한 이 건물은  하늘과 땅 어디에서 보아도 완만한 곡선이 유지되는 오렌지 조각, 혹은 조개나 범선의 돛 모양처럼 보인다.
▲ 오페라 하우스 호주의 상징이 된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는 1958년 착공해서 1973년까지 무려 14년의 기간을 투자해 완공했다. 덴마크 건축가 요른 우츤이 설계한 이 건물은 하늘과 땅 어디에서 보아도 완만한 곡선이 유지되는 오렌지 조각, 혹은 조개나 범선의 돛 모양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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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오페라 하우스가 내려다 보이는 락스(The Rocks)의 천문대에 섰다. 나란히 선 우리 그림자가 무척 길어졌다. 시야에 가득 찬 오페라 하우스의 희고 둥근 지붕이 인상적이다. 건축가 요른 우츤이 공모전에 참가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아내가 대접한 오렌지 조각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지. 그러나 내겐 바람을 한껏 머금은 돛의 형상처럼 보인다. 미지의 세상을 향한 부푼 그리움이다. 쿡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처럼.


태그:#호주, #아웃백, #자동차 여행, #대륙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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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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