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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
 드라마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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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선덕여왕> 속 김유신(엄태웅 분)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선덕여왕(이요원 분)의 즉위 이후 신라의 명장으로 떠올랐지만, 가야 출신이라는 게 족쇄가 되어 비담(김남길 분)에게 정치적 공격을 받더니 급기야 우산국 유배라는 수모를 당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다행히 여왕의 배려로 우산국 대신 백제에 잠입하여 첩자 노릇을 하게 되기는 했지만, 유신의 위신은 이미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신라의 전쟁 영웅이, 무슨 삼재(三災)의 재앙이라도 만난 듯이 관운을 잃을 대로 잃고 만 것이다. 그런 유신이 무슨 저주라도 내린 것처럼, 유신을 버린 신라는 백제에게 대야성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드라마 속 유신은 최근 유행어로 말하자면 '신라판 루저'나 마찬가지다. 여왕의 등극에 큰 기여를 하고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운 그가 결정적으로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온갖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키가 작지는 않았겠지만, '북위 36도도 안 되는' 가야 땅 출신이라는 게 그에게는 콤플렉스 중의 콤플렉스로 작용하고 있다. 참고로, 멸망 이전의 가야 땅은 대체로 북위 36도 아래에 있었다.

23일과 24일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 제53부 및 제54부는 선덕여왕 집권 후에 일련의 군공을 바탕으로 신라의 명장으로 떠오른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 비담의 공격을 받아 모든 관직을 잃고 말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구성은 김유신의 실제 처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선덕여왕 시대에 김유신의 관운은 초기에는 잠잠하다가 나중으로 가면서 점차 상승하는 기운을 보였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관운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신라판 루저'로 전락한 유신

논의를 본격 진행하기에 앞서, 우리는 가야 출신이라는 사실이 김유신의 정치적 성장에 큰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정통 신라 출신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가야 출신이라는 게 특별히 장애가 되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신라 입장에서는 최첨단 철기문명을 보유한 가야 출신들을 배척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들을 수용하는 게 더 유리했다. 한민족 중 최약체였던 신라가 가야를 흡수한 뒤부터 승승장구하여 나중에는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신라 입장에서는 가야 출신들을 배척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하나라도 더 얻어내는 게 이익이었다.

둘째, 7세기 초반은 대체로 '출신'보다는 '능력'이 더 중시되는 시기였다. 신생 통일제국인 수나라·당나라의 대외팽창이 진행되던 이 시기는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새로운 질서를 향해 요동 치던 때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라는 선덕여왕(재위 632~647년)이 즉위하기 30년 전인 602년부터 고구려·백제의 만성적인 침공에 시달렸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출신이니 가야 출신이니 가릴 것 없이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일단 믿고 맡겨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비주류에게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는 점은 우리의 경험법칙상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군에 갈 수 없었던 '불가촉천민'인 노비들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속오군에 편제되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는 양인의 힘이든 노비의 힘이든 일단 빌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급 무관인 이순신과 권율이 유성룡에 의해 발탁된 것 역시, 조직의 위기 앞에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보다는 능력이 많은 사람을 우선적으로 기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위기에 처한 7세기 초반의 신라인들 역시 가야 출신들을 차별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실제 유신은 군사무대에서 영웅이었다

드라마 <선덕여왕> 속 비담.
 드라마 <선덕여왕> 속 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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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래의 논의로 돌아가서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본기' 및 권41 '김유신 열전 1'을 종합해보면, 여왕 초기에 전쟁영웅으로 부각된 김유신이 '신라판 루저'라는 이유 때문에 여왕 후기에 온갖 고초를 당했다는 드라마의 내용과 달리, 실제로는 김유신의 관운이 여왕 초기에는 밋밋하다가 여왕 후기로 갈수록 급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전환이 이루어진 계기는 여왕 11년(642)이었다. 그 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선덕여왕 집권기 후기에 해당하는 여왕 11년 음력 8월에 백제는 윤충 장군을 파견하여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최근 방영분은 바로 이 대야성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승자인 백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엉뚱한 방향으로 역사를 인도했다. 김춘추-김유신 투톱을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키는 쪽으로 연쇄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대야성전투에서 딸과 사위를 한꺼번에 잃은 김춘추는 고구려를 끌어들여 백제를 무찌르기 위해 국경을 넘어 고구려 땅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측은 "죽령 서북의 땅을 내주면 군대를 보내줄 수 있다"고 제의했고, 이를 거부한 김춘추는 고구려 감옥에 투옥됐다. 그러자 김유신이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쪽으로 진군했고, 이에 당황한 고구려는 김춘추를 즉각 석방했다.

김춘추의 고구려 방문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김춘추를 외교무대의 전면에 세운 동시에 김유신을 군사무대의 영웅으로 만든 사건이었다. 이후 김유신은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할 정도의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계속되는 '러브콜'이 그를 한 시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7개월 동안 무례 3차례나 전쟁터 오가

그래서 선덕여왕 후기의 김유신은 대박을 막 터뜨린 신인가수에 비견될 만했다. 집에 갈 생각은 꿈도 못 꾸고 '행사장'에서 '행사장'으로 바삐 이동하며 말 위에서 식사와 수면을 해결해야 할 정도의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 상황이 <삼국사기> '선덕여왕 본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아래 내용은 해당 부분을 발췌·요약한 것이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원문을 그대로 소개하지 않고 해당 부분을 간추렸음을 밝혀둔다.

"선덕여왕 13년(644) 음력 9월, 대장군 김유신이 백제를 쳐서 7개 성을 빼앗았다. …… 선덕여왕 14년(645) 음력 1월, 백제를 물리친 김유신이 왕을 알현하기도 전에 백제군이 또 침범하니, 김유신은 집에도 들르지 않은 채 곧바로 백제군을 치러 가서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음력 3월에 돌아왔지만, 백제가 또 침범하므로 …… 이번에도 집에 들르지 못하고 …… 자기 집 앞을 ……지나서 출정했다."

이에 따르면 김유신은 여왕 13년 음력 9월부터 다음해 음력 3월까지 무려 3차례나 전쟁터에 불려 다녔으며, 어찌나 바빴던지 매번 집에도 들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맨 마지막에는 집 앞을 그냥 지나쳐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그는 매우 빡빡한 스케줄 속에 살았다.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선덕여왕 11년의 대야성전투 패배와 김춘추의 고구려 방문을 계기로 김유신은 그처럼 바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선덕여왕 본기'를 보면, 여왕 11년 이전의 전쟁에서는 김유신의 이름이 단 한 번도 거명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왕 11년에 김유신이 김춘추를 구출하기 위해 1만 군대를 지휘한 때로부터 김유신의 명장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선덕 호위 맡고 있는 알천, 실제 역사선 '명장'

드라마 <선덕여왕> 속 알천.
 드라마 <선덕여왕> 속 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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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 제53부에서는 대야성전투 이전인 선덕여왕 초기에 이미 김유신이 영웅으로 부상했다가 비담의 모함을 받아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대야성전투 패배 이후의 위기국면을 발판으로 김유신이 신라의 명장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집권 후반기에 김유신의 관운이 급상승했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선덕여왕 11년부터 김유신이 전쟁영웅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면, 선덕여왕 1~10년에는 누가 신라의 전쟁을 지휘했을까? 그 주인공은 바로 알천이었다.

드라마 속에서는 알천이 선덕여왕의 호위책임을 맡았다고 했지만, 선덕여왕 초기에 알천은 신라의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선덕여왕 본기'에 따르면, 알천 장군은 선덕여왕 5년(636) 음력 5월에 500명의 백제 특공대를 격파하고 6년(637) 음력 7월에 대장군으로 승진한 데에 이어 7년(638) 음력 11월에는 고구려 군대를 격파하는 일련의 상승 곡선을 탔다.

선덕여왕 11년부터는 김유신이 신라의 명장이었지만, 그 이전에는 위와 같이 알천이 신라의 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대야성전투 패배의 충격과 혼란을 계기로 김춘추-김유신 투톱이 떠오름에 따라, 알천은 자연히 '벤치'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선덕여왕 시대만 놓고 보면, 여왕 10년까지는 김유신의 관운이 상대적으로 밋밋했던 데에 비해 여왕 11년부터는 대야성전투 패배와 김춘추의 고구려 방문을 계기로 김유신의 관운이 급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김유신의 시대에는 북위 36도 이남 출신, 즉 가야 출신이라는 게 그리 큰 약점이 되지 않았다. 가야 출신이라는 요인은 결코 그를 신라판 루저로 만들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7세기의 신라는 김유신 같은 가야인들에게 '감옥으로 들어가라'가 아니라 '전쟁터로 나가라'라는 사명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배경이 되어 선덕여왕 후기에 김유신의 관운이 급상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그:#선덕여왕, #김유신, #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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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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