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대학가에도 선거철이 돌아왔다. 대다수 대학 학생들은 총학생회 선거 준비를 하느라 공약집을 짜고 선거운동을 벌이며 분주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대학가 총학 선거 분위기도 세월만큼 많이 변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등록금 투쟁을 비롯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대학 총학들이 최근엔 개인화 된 학생들의 특성에 맞춰 복지 중심의 공약들을 내놓고 있다.
여학생들에게 자궁경부암 백신 접종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선거본부도 있고, 청강생에게도 0학점을 부여해 팀플레이 과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하겠다고 선언한 선거본부도 있다. 또 어떤 학교 선본은 취업 면접을 보러 가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정장을 대여해주겠다고 나섰고, 또다른 선본은 학교가 위치한 지역이 '교육문화특구'로 지정되게 하겠다는 공약까지 내걸었다.
서울 신촌에 자리 잡고 있는 연세대학교 선본들은 자취생을 타깃으로 잡았다. 눈에 띄는 것으론 자취생들을 위한 유기농 식료품 가게와 과일카페를 개설한다는 공약이 있다. 혼자 사는 학생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먹을거리인데, 이를 잘 파악한 생활 밀착형 공약이다. 또 다른 선본은 '자취생들을 위해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지역 후보에게 임대주택 건설에 대한 요구를 하겠다'라는 공약까지 내걸었다.
이에 대해 재학생인 조은별(심리학과 4)씨는 "임대주택공약이 아주 맘에 든다"며 "한 달 방세가 30만~40만원 나오는데, 20대 주머니사정과 살갗으로 느껴온 학생 간 빈부격차 문제를 고민한 흔적이 보여 호감 간다"고 말했다. 이어 "자취생들의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도 의미 있는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며 "총학생회 선거를 관심 갖고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여학생 자궁암 백신접종비 지원', 대학 총학생회 선거 공약 맞나왕십리에 위치한 한양대 총여학생회 공약 중에도 이색적인 것이 있다. 자궁경부암 백신 접종 비용 지원과 생리로 인해 수업에 못 들어갈 경우, 진단서를 제출 안해도 되도록 만들겠다는 공약이 그것이다.
영어영문학과 4학년에 재학중인 박진씨는 "자궁경부암백신 접종이 필요한 여학생이 얼마나 많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학생에게 그만큼 신경 쓴다는 걸 보이려는 의도 같다"며 "과감해진 공약들은 대학생들의 성생활관념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같다"고 말했다.
고려대학교 한 총학생회 선본도 이색 공약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청강생들도 수강신청을 할 수 있게 하고 출석부에도 등록해, 팀플레이 과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재학생 명미선(일어일문 4)씨는 "예전 선거 때 한 선본에서는 전교생에게 USB를 준다는 공약을 내건 적이 있다"며 "쓸데없이 선물을 주겠다는 실속 없는 공약보다, 청강생들에게 필요한 괜찮은 공약 같다"고 반겼다.
반면, 이 공약에 대해 '반대'를 표하는 재학생도 있었다. 최연진씨는 "청강생은 수업 참여 면에서 성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교수님들 중엔 그 때문에 청강을 금지하시는 분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청강생들이) 팀플에 들어와 실수강생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으므로 해당 선본의 숙고가 필요한 사안이라 본다"고 선거 공약 선정에 좀 더 신중할 것을 주문했다.
이 많은 환심성 공약, 다 지킬 수나 있을까
서울대학교 선본들이 공통적으로 내놓은 공약은 ▲ 이자 없이 카드로 등록금 납부하기 ▲ 등록금 분납 확대 ▲ ATM 기계 수수료 학교측 부담 ▲ 이공계 등록금 차등책정 폐지 등이다.
이와 관련 경제학과 4학년 심아무개씨는 "선본 공약들이 너무 백화점 식으로 많아 우선순위도 없고 실현가능성도 낮아 보인다"며 "선본이 대부분 정책에서 정치적 맥락을 배제하고 화려한 공약들만 나열해 놓는다는 느낌"이라고 비판했다.
재학생 윤수웅(정치학 3)씨는 "등록금 인상에 대한 문제제기보다 납부 방식에 대한 얘기만 많다"며 "새로운 접근은 의미 있지만 그 전에 등록금 책정과 인상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이색적이라 할 만한 생활밀착형 공약들도 좋지만 학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복지 공약을 대단한 듯 포장하는 것은, 한 대학의 학생회가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졸업을 앞두고 면접 보러 다니는 학생들을 위해 정장을 무료로 대여해주겠다는 공약을 내건 학교도 있다. 서울시립대 선본들은 '정장 무료 대여 공약'과 함께 교내 구둣방 설치, 학교 인지도 향상을 위한 수능성적 커트라인 배치표 바로 잡기 등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국제관계학 3학년에 재학중인 이승민씨는 "시립이라 제한된 학생 서비스들에 대해 총학생회가 고민해 반갑다"며 "그러나 취업과 관련 더 본질적인 지원책을 내놓지 못하고 정장 대여 등의 공약을 내놓은 것은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학교 인지도를 높이겠다는 공약은 많은데, 내놓은 방안들이 하나같이 근거가 어설퍼 그저 표심을 잡으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다들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구체적이지 않은 공약들만 쏟아지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각 대학 이색공약들, '보여주기'에 그치지 않길이화여자대학교 한 총학 선본은 ▲1인1사물함 실현 ▲일산, 분당, 인천, 수원을 잇는 대형광역 셔틀버스운영 ▲2010년 신촌지역 연합 월드컵응원제 개최 ▲신촌지역 교육문화특구지정을 추진해 신촌에 도서관과 체육문화시설 건립할 수 있도록 시에 건의한다는 등의 공약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김지은(경영학 4)씨는 "사실 총학선거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워낙 없다보니, 일단 관심을 끄는 흥미로운 공약들을 짜내느라 고생했을 것 같다"며 "이것들 중 몇 가지나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하는데, 선본들이 인기영합성 거품 공약들로 학생들을 꼬이고, 당선되면 시치미 떼는 '진짜 정치인'을 닮진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부모님과 일일데이트 비용을 지원한다고 나선 학교도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선본은 일일데이트 비용 지원과 더불어 ▲안심 귀갓길을 위한 학교 주변지역 가로등 밝기 상향 ▲여학생에게 호신용품 지급 등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대학생 이온유(가명)씨는 이런 선본들의 공약에 대해 "총학 선본들이 참신한 이색 공약들을 가지고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선거에 관심이 없어 공약의 존재도 잘 모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공약이 다 비슷비슷해서 결국 얼마나 자주 학생들에게 노출되고, 이미지가 얼마나 친근하고 호감 가느냐에 따라 투표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대학가 총학 선본들이 들고 나온 이색공약에 많은 학생들은 신선함을 느끼기도 했고, 반대로 너무 '보여주기식 아니냐'는 비판도 했다. 선본들이 내놓은 좋은 공약(公約)들이 공약(空約)으로 끝나지 않고, 학생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