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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놀부 이야기 속에 담긴 18세기 조선사회

18세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유생들의 상소문도, 임금의 비망록이거나 조정대신들의 회의록도 아닌, 바로 <흥부놀부전>입니다. 문화예술이 가지는 진정성이라고나 할까요?

18세기, 전쟁도 없었고 외부와의 어떤 교류도 없이 달콤한 평화가 이어졌습니다만 그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변화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어제까지 형제였고, 한 지붕 아래 살았던 놀부가 흥부를 내쫓아낸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농업국가에서 물은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치수사업은 국시와 같았습니다. 고려왕조를 대신해야 할 이유를 고조선에서부터 찾아야 했을 때부터 예고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늘의 자손인 단군이 세운 땅, 한반도에서 임금이 된다는 것은 '하늘'의 신임을 받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세종시대,측우기, 수표는 치수사업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한다는 예고와 같았습니다. 강물이 범람하면 왕이 직접 그 해결법을 책문의 과제로 냈습니다.

왕조의 통치근거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의 경제권력 간 이권다툼 때문에 치수사업은 더욱더 속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자들은 물이 가까운 옥답을 탐했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지역의 토호세력들은 때론 뭉치고, 때론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물길을 지켜냈습니다. 16세기 4대 사화는 치수사업의 속도를 더욱 높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양반사회의 공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백성들의 무보수 노동과 세금으로 이루어진 이 사업의 결과는 마침내 조선후기에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모내기법과 골뿌림법 같은 새로운 농경법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땅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하늘에서 돈이 굴러 떨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농업경제 비효율성의 핵심이었던 노동력이 1/4로 줄어든 것이지요. 바로 그 신흥 부자가 놀부이고,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아 백수가 된 3/4의 농민이 흥부입니다.

정조때의 화가 김홍도가 1780년대 중반에 그린 풍속화로 당시 모내기풍경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모내기법에 의해 농사를 지으면 잡초가 자라지 않고 수확량도 늘어서 일손이 줄어들어 빈민이 대량으로 실직했고, 반대로 부농이 속출하는 빈부격차를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생산방법의 개발이 가져온 충격이 18세기를 뒤흔들었던 셈이지요.
▲ 모내기 정조때의 화가 김홍도가 1780년대 중반에 그린 풍속화로 당시 모내기풍경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모내기법에 의해 농사를 지으면 잡초가 자라지 않고 수확량도 늘어서 일손이 줄어들어 빈민이 대량으로 실직했고, 반대로 부농이 속출하는 빈부격차를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생산방법의 개발이 가져온 충격이 18세기를 뒤흔들었던 셈이지요.
ⓒ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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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농학파 실학

놀부와 흥부는 오랫동안 공생해야 했습니다. 놀부의 밭이 없으면 흥부는 굶고, 반대로 흥부의 노동력이 없으면 놀부는 부자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없었으니까요. 이때까지 조선사회는 흥부와 놀부가 한지붕 안에 살아도 되는 때, 그러니까 '부모님이 살아계신 때'였습니다. 그것이 유교적 가치인 농촌공동체에 대한 염원, 향약과 두레와 같은 것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습니다. 놀부는 흥부가 필요없어졌지요. 인구가 많아야 먹고 살 수 있었던 아시아적 농업경제에 균열이 생긴 것은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영세농의 협업이 없으면 안되었던 형제 '놀부'는 이제 더 이상 일손이 필요없게 된 '흥부'를 토지에서 격리시킵니다.

협동노동시대에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양반의 양보와 농민들의 헌신이 요구되었기에 유교적 가치들은 주효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유교적 가치들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성리학은 변하는 시대에 해줄 말이 없었지요.

쫓겨난 흥부가 할 일은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곤장을 맞아주는 일처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놀부의 집에 가서 소작이라도 좀 달라고 애원하지만, 소작농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경쟁률은 높아 소작이라도 하려는 사람은 많았고, 일거리는 점점 줄어들고 흥부가 농촌에서 일을 찾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습니다.

성호 이익은 안산에 평생을 머물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기념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이익의 집안인 여주이씨 가문은 한양 소정동에 ‘이씨 집안 서재’라고 알려진 유명한 서재가 있었는데요, 이곳에는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많아 성호 이익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고, 형인 옥동 이서는 이 서재에서 본 중국 왕휘지의 책을 통해 서예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동국진체라는 서예법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이 서재는 후에 정조시대 최고의 천재였던 이가환을 낳았고, 그의 제자인 정약용도 이 서재를 통해 성리학이외의 학문을 접하기도 합니다
▲ 성호 이익 성호 이익은 안산에 평생을 머물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기념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이익의 집안인 여주이씨 가문은 한양 소정동에 ‘이씨 집안 서재’라고 알려진 유명한 서재가 있었는데요, 이곳에는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책들이 많아 성호 이익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고, 형인 옥동 이서는 이 서재에서 본 중국 왕휘지의 책을 통해 서예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동국진체라는 서예법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이 서재는 후에 정조시대 최고의 천재였던 이가환을 낳았고, 그의 제자인 정약용도 이 서재를 통해 성리학이외의 학문을 접하기도 합니다
ⓒ 성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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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놀부전>에서는 여기서 제비가 등장하였습니다. 비현실적인 세계를 도입해야만 했던 것은 답을 몰랐기 때문이었겠지요. 이 처참한 상황을 똑바로 보았던 사람들이 바로 실학자입니다.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중농학파' 실학자들은 모든 생산력의 기반인 농촌과 농업 파괴가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통적으로 농민에게서 유일한 생산수단인 '토지'를 빼앗을 수 없게 되는 '정전법'을 주장합니다.
유형원은 중국과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여 부가 집중되었던 나라는 멸망했으며 반대로 빈부격차가 작았던 나라들은 부강했다는 것을 실증하여 <반계수록>에 담았습니다. 이익은 <성호사설>속에서 자연재해는 인간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주어진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농민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그의 생각은 과학기술을 장려하는 '성호학파'를 낳았습니다.

성호학파의 영향 아래 청소년기를 보낸 정약용은 지방수령으로 부임해 간 뒤 농촌의 파괴적인 현실을 보고 극단적인 '집단공동체'인 여전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가 말한 '여전'은 공동노동과 평등한 분배, 정치의 민주주의를 주장하였기에 공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조선후기 농촌사회가 이미 완벽하게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한반도에 인류가 들어와 살았던 그 어떤 때보다 더 많은 부자들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 18세기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배경은 왕실에겐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는 그렇게 찾아옵니다.

현실 속 흥부의 뒷이야기는 어땠을까?

흥부의 뒷이야기는 이렇지 않았을까요?

도무지 일거리를 찾지 못한 흥부는 결국 가족들에게 '해산'을 명령합니다.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데리고 떠나고 머슴살이라도 할만한 아이들은 제갈길을 찾아 가도록 합니다. 아이들 중 일부는 머슴을 살러 가고, 일부는 도둑이 되었습니다.

흥부는 남겨진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한양은 이미 수십만 명의 거지와 유랑민들로 만원이었습니다. 청계천 다리 밑은 몇 개의 조직이 점령한 상태라 꿈도 꾸지 못한 채 동대문 밖 움막 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비위생적이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의 형성이 치명적인 전염병을 탄생시킨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의 역사는 그래서 도시의 빈민가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홍역에 대해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은 임진왜란 이후의 질병이라고 정의를 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전쟁 이후 빈민가는 급속하게 확대되었고, 18세기에 이르면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겹치면서 그 어떤 시대에도 겪어보지 못한 전염병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콜레라, 홍역, 천연두가 휩쓸고 지나가는 우울한 조선의 18세기에 그 이유가 빈부격차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달라졌을까요?

뉴라이트 계열의 한 연구자의 연구에 따르면 18세기는 정치적 안정기였고, 생산력도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인구증가가 거의 멈춰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흥부의 가족들 중 몇몇은 이 질병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인 날이면 흥부는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관청의 아전들은 시체를 치우고 묻는 일에 필요한 일용직 노동자를 임시로 뽑아갔거든요.

겨울에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때가 있는데, 유난히 추위가 기승을 부린 날이면 굶어죽고 얼어 죽은 시체를 치울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습니다. 언젠가 흥부도 그런 아르바이트들의 손에 묻힐 날이 오겠지요.

흥부의 자식 중에 운이 좋아 상인의 심부름을 하다가 보부상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짧고 아쉬운 삶을 마감합니다.

그동안 놀부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자신의 행운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할 만큼의 지혜가 없는 그로서는 그저 '자신의 탁월한 이재능력'에 대해 만족해하겠지요.

1760년 (영조 36년)에 실시된 청계천 준천공역(준설)을 성공적으로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일종의 기록화첩입니다. 공사는 이해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두 달간에 걸쳐 시행되었고, 연인원 20만명이 동원되고 3만 5천냥과 쌀 2,300백석이라는 그 당시엔 어마어마한 자금을 들인 대역사였습니다. 1773년에도 다시 이런 공사를 했는데요, 빈민들에겐 이런 공사는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이라 고마웠을 것입니다
▲ 어전준천제명첩 1760년 (영조 36년)에 실시된 청계천 준천공역(준설)을 성공적으로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일종의 기록화첩입니다. 공사는 이해 2월 18일부터 4월 15일까지 두 달간에 걸쳐 시행되었고, 연인원 20만명이 동원되고 3만 5천냥과 쌀 2,300백석이라는 그 당시엔 어마어마한 자금을 들인 대역사였습니다. 1773년에도 다시 이런 공사를 했는데요, 빈민들에겐 이런 공사는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이라 고마웠을 것입니다
ⓒ 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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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원리시대

18세기 번영의 상징은 다시 청화백자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다시 나타난 청화백자는 이전시대 백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높았습니다. 하얗고 깨끗한 바탕 위에 그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림은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땅에 곤두박질친 왕실의 권위를 다시 찾아오게 된 배경에는 뭐니뭐니해도 '돈의 힘'이 가장 컸습니다.

17세기 말에 실천적 유학자이자 고집불통의 영의정이었던 김육에 의해 '대동법'과 '화폐유통'은 현실화되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왕실에겐 손쉽게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18세기에 이르자 숙종은 감각 하나만은 탁월한 정치인답게 이 변화된 세상에서 무엇을 취해야 할지 알아차렸습니다. 바로 '돈줄'을 손아귀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암암리에 이루어지던 금난전권을 공식화함으로써 급격하게 번성하던 상인들에게 독점권을 주고 그 대가로 세금을 걷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꿀맛 같은 돈줄은 영조시대에도 이어졌고,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울로 모여든 수많은 빈민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주거나 수공업자들을 경쟁체제화해서 물가를 낮추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소론계열 '중상학파'들의 주장은 당쟁의 목소리로 치부되어버렸습니다.

영조는 이렇게 해서 마련된 두둑한 주머니와 숙종시대 물고물리는 당쟁의 결과로 급격하게 쇠락해진 당파들의 힘의 균열을 이용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여나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자기산업'의 복구로도 나타납니다. 백자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는 '분원리시대'가 열린 것이 바로 이때인 1752년입니다.

강원도에서부터 경기도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물길의 중심지가 바로 분원리입니다
▲ 분원리지도 강원도에서부터 경기도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물길의 중심지가 바로 분원리입니다
ⓒ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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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조선 관요가 있었던 사옹원의 분원은 경기도 광주지방에 있었습니다.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아주 많은 곳에 있었습니다. 이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다가 다른 가마로 옮겨가면서 왕실과 관청에서 쓸 도자기를 구워왔습니다.

이토록 옮겨 다닌 까닭은 땔감 때문입니다. 근처의 나무를 다 베어 쓰고 나면 그곳에 묘목을 심고는 다른 무성한 숲 근처로 옮깁니다. 처음 그 자리에 심었던 나무가 자랄 때쯤엔 돌아왔습니다.

땔감을 베고 옮기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차라리 새 가마를 만드는 것이 훨씬 싸게 먹혔기 때문입니다. 보통 한 곳에 머물다 10년이 지나면 옮기기를 반복하며 경기도 광주 일대를 빙글빙글 돌아다녔습니다.

다행히 산이 많아 가마를 만들기 알맞은 곳이 널려있어 옮기기는 쉬웠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지요. 분원리로 아예 관요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은 이런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원이 있던 자리에는 분원백자를 한데 모아 볼 수 있는 박물관인 ‘분원백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분원초등학교를 개조해서 만들었는데 겉은 쇠철판을 둘러 독특한 분위기가 납니다. 벌겋게 녹 슬은 철판은 푸르른 숲과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멋을 냅니다. 강철은 분원백자의 전통을 되살려 지켜내려는 의지를 담았다고 합니다.

호수도 보고 건물도 보고 박물관도 즐길 수 있는 이곳에서 가장 절정기에 올랐던 우리나라 백자를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요? )
▲ 분원백자전시관 외부전경 분원이 있던 자리에는 분원백자를 한데 모아 볼 수 있는 박물관인 ‘분원백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분원초등학교를 개조해서 만들었는데 겉은 쇠철판을 둘러 독특한 분위기가 납니다. 벌겋게 녹 슬은 철판은 푸르른 숲과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멋을 냅니다. 강철은 분원백자의 전통을 되살려 지켜내려는 의지를 담았다고 합니다. 호수도 보고 건물도 보고 박물관도 즐길 수 있는 이곳에서 가장 절정기에 올랐던 우리나라 백자를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닐까요? )
ⓒ 분원백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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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는 이름 그대로 분원이 100년 넘게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팔당호수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강원도에서 나무를 베어 강으로 흘려보내면 땔감걱정이 없습니다. 백토도 뱃길로 들여왔고 만들어진 도자기는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보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분원을 옮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가마에 같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 청화백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도자기의 빛과 모양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 청화백자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새겨진 이 문양은 마치 정조임금시대 도자기라는 이름표와 같습니다. 바로 분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죠. 이 도자기는 문예부흥기의 조선왕조의 안정감과 자신감을 잘 보여줍니다.
▲ 백자청화산수매죽문항아리 이 청화백자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새겨진 이 문양은 마치 정조임금시대 도자기라는 이름표와 같습니다. 바로 분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죠. 이 도자기는 문예부흥기의 조선왕조의 안정감과 자신감을 잘 보여줍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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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와 유약

과학적 탐구의 결과로 조선백자의 질은 더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사람들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면 소용이 없겠지요? 그래서 그 어떤 것보다 '유약'에 신경을 썼습니다. 유약은 화장품처럼 겉모습을 바꿔주기 때문입니다.

중국 백자는 조선백자보다 더 하얗습니다만 불투명하기 때문에 맑지 않습니다. 조선백자는 물처럼 투명하고 유리처럼 반짝이면서도 설핏 푸른빛이 돌아 은은하면서도 해맑아 보입니다. 이것이 조선 백자의 매력인데 유약의 힘으로 얻어낸 것입니다. 우리나라 유약기술은 이미 청자에서 보여준 바 있습니다.

투명한 유약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물토'입니다. 한자의 물수(水)에다 리을 받침인 乙자를 받쳐 '물'이라는 뜻이 되게 만들어 '수을토(水乙土)'라고도 부릅니다. 물토는 도자기 표면을 유리처럼 만들어주는 성분인 '알루미나와 실리카'라는 성분이 들어있는 고령토입니다. 물흙이라는 뜻 정도가 될 것입니다. 물렁물렁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여겨집니다.

이것을 석회석과 나무를 태운 재와 섞어 유약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장석을 갈아 넣은 중국이나 거의 재를 이용해 만든 일본에 비해 훨씬 투명한 유약이 만들어집니다. 유약 속에 넣은 재속에는 약간의 철분이 들어있습니다. 1% 안팎의 철분이 담긴 유약을 발라 구우면 여러 가지 색을 내게 됩니다. 

가마를 활짝 열어 놓은 상태로 이 유약 바른 백자를 굽게 되면 철분은 은은하고 따스한 누르스름한 빛을 띱니다. 반대로 가마의 불구멍을 막아 굽게 되면 철분은 산소를 잃고 푸르스름한 빛을 띠게 됩니다. 이 푸른빛을 조절하여 설백색 백자를 만들어냅니다.

푸른빛이 도는 백자만이 아니라 우윳빛이 도는 백자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활석이라는 매우 무른 돌을 갈아 유약에 섞으면 마그네슘 성분이 높아져서 그렇게 됩니다.

조선백자는 흙이 가진 결점들을 과학으로 훌륭하게 극복하고 만들어졌습니다. 조선 백자는 지금 세계적인 수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이해하였던 조선 도공의 노력에서만 만들어진 아름다움의 가치를 이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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