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먹음직스러운 ‘오색찐빵’. 두 개를 맛있게 먹었는데요. 고희를 앞둔 노인의 정성이 깃들어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먹음직스러운 ‘오색찐빵’. 두 개를 맛있게 먹었는데요. 고희를 앞둔 노인의 정성이 깃들어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이 생각나는 계절에 칠순 할아버지 부부가 '찐빵'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화제다. 자의든 타의든 직장을 그만두고 사랑하는 손자·손녀 재롱을 보며 행복해할 나이에 부부가 아침마다 찐빵을 만든다는 소식은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와 가게 위치를 알았으나 막상 가려니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렸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인분 냄새가 풀풀 나던 밭이고 논이었던 곳에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도로가 어지럽게 나있으니 방향 감각이 무뎌질 수밖에.

'송호찐빵' 간판을 어렵게 찾아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찐빵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고향동네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고향집 신작로 공설운동장 쪽으로 작지만 유명했던 빵집 네 개가 나란히 있어서, 시내 사람들이 '빵집 동네'로 불렀기 때문이다.

밖으로 튀어나온 진열장에 피라미드처럼 쌓아놓은 찐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한꺼번에 열 개만 먹어봤으믄 원이 없겄다!"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찐빵은 돌 지난 아이 주먹처럼 조그마했고, 1원에 하나였다. 아저씨 기분이 좋을 때 2원어치 사면 세 개 받을 때도 있었고.   

내실에서 아내와 빵을 만들던 박정남(69) 할아버지가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오면서 "어서 오세요!"라며 반갑게 맞이하는데 빵을 사러 온 손님이 아니어서 미안했다. 하지만, 조금 전 전화했던 사람이라며 찾아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TV 시청이 '오색찐빵' 연구로 이어져

보기에도 푸짐한 쑥 빵. 맛도 좋지만, 쓴 맛을 상징하는 쑥과 단 맛의 팥소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보기에도 푸짐한 쑥 빵. 맛도 좋지만, 쓴 맛을 상징하는 쑥과 단 맛의 팥소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박 할아버지는 의자에 앉기 무섭게 색깔이 다른 찐빵 몇 개를 내놓으며 쑥 빵을 반으로 가르더니 맛이나 보라며 권했다. 그는 연분홍 색깔의 복분자 빵, 무늬가 죽은 깨처럼 박힌 흑미 빵, 노란 단호박 빵, 연한 녹색의 쑥 빵을 합해 '오색찐빵'으로 이름 지었다며 맛은 물론 빵 이름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간판도 '송호찐빵'이고, 상자에도 '할머니'를 송호찐빵 앞에 붙였는데, 특별한 사연이 있는지요?
"특별하긴, 내가 사는 마을 이름이야. 주소가 '개정면 송호마을'이거든. '소나무 송(松)'에 '호수 호(湖)'인데 마음에 썩 들더라고. '할머니'를 앞에 붙인 것도, '찐빵'을 얘기하면 어렸을 때 할머니 생각이 먼저 나잖아. 아흔이 넘은 어머니도 계시고, 아내도 오래전에 할머니가 됐고, 그래서 붙였지."

"그럼 찐빵은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나요?" 
"2년 조금 넘었나? 우연히 TV에서 '찐빵'관련 프로그램을 봤지. 내가 한번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주인공을 찾아가 빵을 사먹었더니 정말 맛있어서 사정 얘기를 하니까 자기네 빵을 가져다 팔라는 거야, 그래서 기술을 좀 배우러 왔다고 했지. 그런데 전수비를 엄청나게 요구하더라고. 깜짝 놀라 빵만 사먹고 그냥 돌아왔어··."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오색찐빵'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밀가루 열다섯 포대 없애면서 1년 넘게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지, 그런데 밀가루 빵하고 만두만으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더라고, 그래서 고민하다 '오색찐빵'을 개발한 거지, 다행히 친구들에게 시식해보라고 했더니 맛있다고 하더라고, 이 가게도 친구가 월세도 받지 않고 내준 건데, 날이 갈수록 주문이 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시골에 사는 어떤 아주머니는 '오색찐빵'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속이 노랗고 짙은 보라색이 나는 고구마를 한 상자 가져와 빵을 만들어보라며 놓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바쁘다 보니까 보관만 하고 있다면서 아주머니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고구마 빵'에도 도전해볼 계획이라며 젊은이 못지않은 의욕을 보였다.  

'오색찐빵' 연구를 하기 전 '우리 밀 빵', '우리 보리빵' 아이디어를 가지고 '농업기술센터'를 찾아가 상의했더니 '우리 밀'과 '보리'를 내주면서 연구해보라고 해서 성공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지원을 해준다지만, 국산 밀가루 값이 너무 오르는 바람에 타산이 맞지 않아 상품으로 내놓을 수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찐빵도 사먹고 불우이웃도 돕고

불우이웃돕기 모금함. 1백 원짜리 동전 하나로도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불우이웃돕기 모금함. 1백 원짜리 동전 하나로도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대화가 한참 무르익어 가는데 '1박스당 200원 적립, 고개도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소규모 빵집을 운영하면서도 불우이웃을 도우려는 박 할아버지를 보며 부자(富者)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실 텐데 불우이웃돕기도 시작하셨네요. 200원 적립이라고 적혀 있는데 성금은 어떤 방법으로 누가 내나요?"
"빵을 팔 때마다 동전을 넣으니까, 당연히 사먹는 손님이 내는 거지. 나는 심부름만 하는 거고, 손님이 알게 되면 빵을 사먹으면서도 작은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겠어? 그래서 생각해낸 거야." 

"언제 시작했는지, 동전통이 50개가 넘는 것 같은데요?"
"7월인가? 여하간 여름에 시작했지, 처음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많이 늘어났어. 택배로 보낼 때 한 상자에 200원씩 손님 이름이 적힌 파란 통에 넣거든. 지나가다 엄마 손잡고 온 꼬마들은 자기가 직접 동전을 집어넣으면서 무척 기뻐하더라고. 그런 걸 보면 물욕에 눈이 어두워 형제도 친구도 몰라보고, 고소하고 재판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니까."

영업방침은 '짝게 먹고, 짝게 싸자는 거'  

희망의 미래와 과거 회안의 미소를 머금으며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시는 박정남(69세) 할아버지. 일을 한다는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희망의 미래와 과거 회안의 미소를 머금으며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시는 박정남(69세) 할아버지. 일을 한다는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박 할아버지는 지나가다 들어와 사먹으려는 손님도 상당한데 1인분(2000원)이라도 팔기만 한다고 했다. 좁은 가게에 손님이 앉을 의자와 테이블을 들여 놓으려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차도 끓여내야 하고, 설탕, 간장 등을 챙겨주는 종업원을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처에 고등학교가 두 개나 있고 중학교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분식집처럼 빵을 먹으면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면 자연적으로 홍보도 되고, 빵도 더 팔리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이 나이에 무슨 물욕을, 짝게 먹고 짝게 싸자는 게 내 영업방침이야!"라며 껄껄 웃었다. 

"택배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누가 부담하나요?"
"한 상자나 세 상자나 택배비(4000원)는 같은데, 다섯 상자까지는 손님이 부담하고 여섯 상자 이상은 우리 가게에서 부담하지. 지나가다 들어와 빵 만드는 과정을 구경도 하고 한 상자나 두 상자 사가는 사람도 더러 있어." 

박 할아버지는 손님들 반응이 예상했던 것보다 좋다면서 '오색찐빵'이 골고루 스물한 개 들어간 상자는 8000원, 서른 개 들어간 상자는 1만1000원씩 받는다고 했다.

"그럼 가게를 유지하려면 하루에 몇 상자 팔아야 하나요?"
"사람들은 물장수가 많이 남는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밀가루 장수도 많이 남아.(웃음) 그러니까 하루에 10상자만 나가면 우리 세 식구는 먹고살지. 문구점 할 때 넣은 국민연금하고 노령연금 합해서 20만원 조금 넘게 나오거든."

예뻐서 좋고 건강에도 좋은 '오색찐빵' 성공에 2년이 걸렸는데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먼 지역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고 자랑하는 박 할아버지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는데, 전남 완도에서도 두 박스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할 때는 자신감이 넘치기도 했다.

찐빵장수가 마지막 직업이 되었으면

박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군산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 서울로 이사해서 초등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군산으로 피난 내려와 두 살 아래 또래들과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큰아버지와 할머니가 군산에 계셔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어렵게 성장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아들딸 3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결혼해서 나가 살고, 육십 대 중반의 아내와 올해 아흔다섯 노모를 모시고 산다는 박 할아버지는 자식들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빵을 만든다고 했다.

박 할아버지 부부가 ‘복분자 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빵 무게를 다는 분홍색 저울이 이채롭군요.
 박 할아버지 부부가 ‘복분자 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빵 무게를 다는 분홍색 저울이 이채롭군요.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밀가루 반죽을 40g~50g씩 떼어 저울에 달아 확인하고, 팥소를 20g~30g씩 넣으면 빵 하나 무게가 60g~70g 정도 되는데 일일이 확인하면서 만든다고 한다. 찐빵 하나하나에 모든 정성을 쏟는다는 박 할아버지에게서 빈틈없는 프로정신도 느낄 수 있었다.

박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는 레스토랑, 꽃집, 서점, 문구점, 건강식품 등 직업을 자주 바꾸면서도 돈을 꽤 모았는데 이것저것에 손대면서 모두 털어먹었다고, 하지만, 후회는 없다면서 찐빵장수가 마지막 직업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회안의 미소를 지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와 한겨레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송호찐빵, #오색찐빵, #우리 밀, #박정남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