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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 속 미실.
 드라마 <선덕여왕> 속 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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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의 내전 직전까지 갔던 덕만공주와 미실궁주의 최종 대결은 미실의 '아름다운 자결'로 종결되었다. 10일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 제50부에서, 난공불락의 대야성을 거점으로 일대 반격을 준비하던 미실(고현정 분)은, 신라의 내분을 틈타 백제가 움직이자 신라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내전을 포기하고 항복과 자결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미실의 자결을 '아름다운 자결'이라 한 것은 자신의 권력보다는 신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실은 자신을 지원하러 나온 최전방의 속함성 부대에게 회군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어떤 경우에도 최전방 부대까지 빼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미실이나 덕만(이요원 분)이나 매한가지였다.

'쿠데타 할 때는 하더라도 나라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미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최전방 부대까지 서슴없이 동원한 신군부 주역들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위와 같이 미실은 '아름다운 자결'로 생을 마무리하며 드라마에서 퇴장했다. 그런 모습에 감동한 덕만은 "미실, 당신이 없었으면 난 아무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며 미실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다. 자기랑 무슨 긴밀한 관련이라도 있는 듯이 미실의 최후를 지켜본 시청자들의 느낌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럼,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바탕이 된 필사본 <화랑세기> 속 미실은 당대 신라인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물론 <화랑세기> 속 미실은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없으므로 드라마 속 미실처럼 멋진 최후를 맞이할 기회는 없었다. 그렇더라도 <화랑세기> 속 미실이 당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인 일일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을 지켜본 시청자들이 미실을 '대단한 여인'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첫째, 그가 여성으로서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쳤다는 점과 둘째, 그가 현대적 윤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결혼생활 즉 일처다부(一妻多夫)를 향유했다는 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대의 신라인들은 그 두 가지와 관련하여 미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미실의 정치행위에 대한 당대의 평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이따금씩 미실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인식이 묘사되었다. 미실에 대한 드라마 속 신라인들의 평가는 한마디로 '공포의 대상'으로 압축된다. 그런 분위기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은, 미실이 책력을 바탕으로 일식을 예언하고 그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고 그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미실이 공포정치를 시행했을 때였다. 그렇다면, <화랑세기> 속 신라인들도 미실에 대해 그처럼 공포심을 느꼈을까?

<화랑세기> 제8세 풍월주 문노 편을 읽다 보면, 문노 부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대화의 주제는 미실이었다. 이 대화에 나오는 문노의 말을 음미해보면, 당시 신라인들이 미실의 정치행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대화가 오고간 시점은, 진지왕이 즉위(576년)한 이후로 미실이 동륜태자를 암살(573년)한 시점으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당시 문노는 미실 남편 세종의 측근인 동시에 미실의 사촌자매인 윤궁의 남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실을 반대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미실에게 우호적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문노는 미실에 대해 입 바른 소리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걱정되어 윤궁이 충고 한마디를 했다. 윤궁은 "당신이 세종을 모시면서 미실 궁주를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며 "만약 당신의 낭도가 당신을 옳다 하면서 나를 나쁘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문노의 대답은 이랬다. "당신은 (미실) 궁주와 같은 잘못이 없는데 낭도들이 어찌 비난하겠습니까?" 당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낭도들의 비난을 받을 이유가 있겠느냐는 답변이었다.

'공포의 미실', <화랑세기> 속에는 없었다

이는 화랑의 정신적 지주인 문노의 영향을 받은 낭도들 사이에서 미실에 대한 비판 여론이 존재했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훗날 문노가 미실에 대한 태도를 바꾸자 그런 문노를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된 점을 볼 때 미실에 대한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히 지속적이고 견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비록 제한적이나마 미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태도를 추출해낼 수 있다. 나라의 중추인 화랑도 조직의 낭도들 사이에서 미실에 대한 비판 여론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미실의 권력이 공포정치라 불릴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으며 신라인들 역시 미실에 대해 공포심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식 지위를 갖지 못한 미실이 동륜태자 암살을 통해 후계구도에 영향력을 미치고 막후에서 왕을 조종하며 통치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은 존재했지만, 미실에 대한 비판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할 만큼의 공포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미실이 좀 심하지 않느냐?"는 수준의 비판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에서처럼 미실이 공포정치를 펼치고 그 때문에 백성들이 미실을 두려워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실의 결혼생활에 대한 당대의 평가

드라마 <선덕여왕> 속에서 미실의 정부로 나오는 설원랑(전노민).
 드라마 <선덕여왕> 속에서 미실의 정부로 나오는 설원랑(전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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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 초기에 시청자들의 시선을 확 끌어 잡은 요인 중 하나는 미실이 여러 남자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흥왕·진지왕 및 세종·설원·사다함이 미실의 남자로 등장했다. 설원(전노민 분)이 미실의 발과 다리를 정성스레 씻겨주는 장면은 웬만한 베드신 못지않게 강렬했는지도 모른다. 군왕의 일부다처가 당연시되던 기존의 궁중 사극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의 정치행위 부분은 역사왜곡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과장되게 묘사하면서도, 미실의 결혼생활 만큼은 <화랑세기> 기록보다도 훨씬 더 축소시켜 묘사했다. 그러므로 미실의 실제 결혼생활은 시청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야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기는, 그 '야하다'는 느낌은 고려시대 이후에 태어나 유교윤리에 익숙한 사람들만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랑세기> 속에서 미실이 상대한 남자들은 진흥왕, 세종(진흥왕의 의부형제, 풍월주), 동륜태자(진흥왕의 장남), 진지왕(진흥왕의 차남), 진평왕(동륜태자의 아들), 설원(풍월주), 사다함(풍월주)이었다. 조정과 화랑의 최고지도자들이 모두 다 미실의 품안에 안긴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세종(독고영재 분)을 미실의 정식 남편이라고 소개했지만, 그 점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미실은 세종의 '정식' 부인인 동시에 진흥왕·진지왕·진평왕의 '정식'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여러 명의 남편을 정식으로 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드라마에서는 설원을 미실의 정부라고 소개했지만, 그 역시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제16세 풍월주 보종 편에는, 미실이 대낮에 진평왕과 동침하다가 갑작스레 방을 나가 설원과 동침을 하고 또 설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보종을 진평왕이 자기 자식처럼 대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처럼 미실과 설원의 관계가 공개적이었다면, 설원 역시 사실상의 남편으로 인정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들을 본다면, 정식 남편이니 정부니 할 것 없이 모두 다 사실상 미실의 남편으로 인식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미실의 남편들이 거의 다 '한 집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진흥왕과 세종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동륜태자·진지왕·진평왕은 모두 다 진흥왕의 자손들이다. 그러니까 미실은 집안 내에서 사실상 인척 남자들과 '거듭거듭' 중혼을 한 셈이다.

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미실의 남편들 역시 미실 외에 다른 여자들을 두었다는 점이다. 왕들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설원 같은 인물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설원은 미실 외에도 준화·개원이라는 부인들을 두었다. 드라마에서는 미실을 중심으로 한 일처다부만 보여주었지만, <화랑세기> 속의 남자들 입장에서는 미실 역시 일부다처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일처다부와 일부다처가 중복적으로 결합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미실의 화려한 결혼생활에 대한 비판이 없는 이유

그럼,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일부일처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을 일반 신라인들은 그 같은 미실의 결혼생활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화랑세기> 속에서 2가지의 단서를 추출할 수 있다.

하나는, <화랑세기> 어디에도 미실의 결혼생활에 대한 제3자들의 비판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것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 신라인들에게는 꽤 자연스럽게 수용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직접적으로 미실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7세기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신라의 결혼문화가 '신라 특유의 현상'으로 당연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화랑세기> 제22세 풍월주 양도(재임 637~640년) 편에 따르면, 진평왕의 딸인 양명공주는 보종(미실과 설원의 아들) 외에도 염장과 모종(하종의 아들)이라는 남자들을 두었다. 양명과 보종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보라와 보량이었다. 그리고 양명과 모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양도였다.

여기서 양명-보종 사이의 딸인 보량은 할아버지인 진평왕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진평왕의 계비인 승만왕후의 미움을 사서 궁에서 나온 뒤, 왕실의 허락을 받아 자신의 의붓동생인 양도와 결혼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양도가 말을 듣지 않았다. 누나랑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머니인 양명공주가 발끈하고 나섰다. 요즘 같으면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 딸(미실의 손녀)과 자기 아들(미실의 증손)을 결혼시키지 못해서 안달을 했으니 말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꾸짖자 양도는 "제가 오랑캐(신라)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어머니·누이가 모두 좋아하겠지만, 제가 중국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어머니·누이가 모두 원망할 것"이라면서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가 있으니 어찌 중국의 도로써 하겠습니까?"라며 결국에는 의붓누나와의 결혼에 동의했다(참고로, '오랑캐'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중국 주변의 민족'이나 '자기 나라의 적국'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지만, 이 대화에서 양도는 신라의 결혼문화를 비하하는 의미에서 '오랑캐의 풍속'이란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실이 처한 상황과 똑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미실의 증손인 양도의 말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결혼문화에 대한 신라인들의 정서를 제한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결혼문화가 국제적으로 독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결혼문화가 국제 표준인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의 도가 있다'며 결국에는 자신들의 결혼문화를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화랑세기> 속 신라인엔 '상식적'인 여인 미실

중국과의 교류가 급물살을 탄 7세기 초반부터 신라인들은 '중국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하고 중국인들의 시선에 대해 상당히 민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친인척 간의 혼인과 중복적인 혼인을 당연시하던 신라인들은 이처럼 한류(漢流)가 밀려들기 시작한 7세기 초반부터 자신들의 결혼문화를 중국과 비교해보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는 '그래도 우리 것이 나아'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본다면, 미실의 화려한 결혼생활이 오늘날의 우리들이 보기에는 파격적이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또 '부럽기까지' 할 수도 있겠지만, <화랑세기> 속 신라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물론 일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그 같은 상류층의 결혼문화가 이질적으로 느껴졌겠지만, 그런 문화가 상류층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굳이 미실에게만 특별히 비판을 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반 백성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드라마 속 미실과 달리, <화랑세기> 속 미실은 동륜태자 암살의 주범이자 막후정치의 실력자라는 점 때문에 낭도들의 비난을 받는 정도에 불과했다. 또 <화랑세기> 속 미실은 드라마 속 미실보다도 훨씬 더 화려한 결혼생활을 했지만, '신국에는 신국의 문화가 있다'며 자신들을 정당화하던 신라인들의 눈에는 미실의 결혼생활이 별로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보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미실이란 존재가 '상식을 뒤엎은 여인'이라 할 수 있겠지만, <화랑세기> 속의 신라인들에게는 '상식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여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선덕여왕, #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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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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