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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학기, 대학생인 제 시간표에는 아침 일찍 시작하는 수업이 없습니다. 워낙에 아침잠이 많다보니 점점 기상시간이 늦춰지더군요. 하루가 20시간도 안 되는 것처럼 짧게 느껴지는 나날들이 지속되자 11월에는 새벽을 깨우기로 작정하고 영어학원에 등록했습니다. 개강일인 오늘, 떠지지 않은 눈을 비비고 다 뜨지 않은 햇볕 받으며 칼바람 뚫고 버스를 타러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학생의 날'을 만났습니다.

 

<살인적인 고액등록금 인하하고, 등록금상한제 도입하라 '80번째 학생의 날' -민주노동당>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오연호 기자의 책을 읽다가 시민기자로 가입한 게 어제입니다. 평소 오마이뉴스를 좋아하고 관계된 적도 몇 번 있지만 시민기자 시스템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이를 알게 되자 바로 등록한 겁니다. 그러고나니 세상 모든 게 기삿거리로 보이더군요. 평소 같았으면 급한 일 없이도 냉큼 뛰어 지나갔을 횡당보도 한가운데서, 초록불이 깜빡이는 것도 무시하고 일단 사진부터 찍었습니다.

 

  학생의 날을 처음 알게 된 건 중학교 때였습니다. 그 시절 저는 연초가 되면 새해 달력을 한 장 한 장 들춰보며 빨간 날이 총 몇 개나 되는지 세는 의식(?)을 치르곤 했습니다. 일요일 외에는 공휴일이 하나도 없는 11월 달력은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11월 달력에는 생소하게도 '학생의 날'이라는 놀지도 않는 기념일이 표기돼 있었습니다. 더이상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하는 중학생은 대신 학생의 날에 선물을 받아야 한다며 엄마아빠에게 주장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주지하다시피 학생의 날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여 항일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날입니다. 올해로 80년이 되는군요. 197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할 때는 유신에 의해 폐지되기도 했고 80년대 들어서 공식적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런 질곡이 있다보니 지금 학생의 날에는 학생독립운동 뿐아니라 민주화운동을 하던 세대의 의미도 덧붙여졌습니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학생운동은 꾸준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작년 촛불 이후로 각 대학교에서 촛불 총학생회가 당선되는 등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학생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흐름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학생의 날은 단순한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여전히 유의미한 기념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궁금한 마음에 들춰본 신문에는 단신조차 없더군요. <경향신문>이 이 정도니 다른 언론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 대신에 1면을 장식한 머릿기사는 수능을 9일 앞두고 신종플루 걱정에 긴장감을 더하는 <떨리는 고3 교실> 이었습니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돌아온 학교에서도 오늘이 학생의 날임을 느끼게 해주는 매개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학생회에서는 혹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지 물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더군요.

 

  대학문화가 죽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대학생의 한 사람으로서 대학문화가 꼭 없어진 것만은 아니고, 방식이 변용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과거와 같이 대학생 세대만의, 또 각 학교만의 특색 있고 진취적인 문화가 실종된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생들은 더 이상 중앙동아리의 댄스 공연이나 연극을 보러 가지 않습니다. 대신에 최신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서 팝콘 콜라를 먹으며 대자본이 만들어낸 영화를 쳐다봅니다. 고액과외를 하는 친구들은 어른들 흉내를 내며 양주도 마시더군요.

  

새로운 의제를 만들어내고, 기존의 틀을 깬 새로움을 창조해내기보다는 기성이 만들어놓은 의제를 흡수하고, 자본이 만들어놓은 틀에 '참여'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문화행사 자원봉사니, 기업참여 프로그램을 스스로도 겪어보면서 느낀 거지만, 결코 학생이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인력'이 되고 '도우미'가 되어 소극적으로 참여할 뿐이지,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고 운영하는 주인이 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해도 그건 진짜 적극성이 아닙니다.

 

  9일 후 수능을 볼 저의 동생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대학에만 가면 술도 마시고, 선배들한테 밥도 얻어먹고, 동아리 활동도 할 거라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개인화되어가는 대학사회에서 많이 좌절도 할 겁니다. 실망도 할 겁니다. 제 친구들이 그랬듯이, 더 좋은 학교를 가면 뭐가 달라질까 싶어 반수도 하려 할 겁니다. 자퇴를 하기도 할 겁니다.

 

그것이 잘 되든 되지 않든 점점 더 개인화되어가고 판박이 같은 대학사회는 어디나 마찬가지여서, 일 년 이 년 방황하고 휴학도 한 두 학기 하다보면 정신 차리고 취업을 준비하기 바쁠 겁니다. 그래서 새벽에 토익학원을 다니고 기업참여프로그램으로 '스펙'을 쌓으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왜 계속 등록금이 올라가는지도, 왜 취업하기가 이렇게 힘든지도 고민해 볼 만한 여력이 없을 겁니다.

 

 

스스로도 대학생인 주제에 너무 자기비판을 했나요. 일단 대학만 붙으면 하고 싶은 일 목록이 잔뜩일 수험생들이 읽으면 기운 빠질 소리만을 늘어놓았나요. 물론 희망이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 고려대에서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고픈 대학생들이 주체가 되는 희망콘서트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 꽃피는 대학문화의 부활을 기대해 봤습니다.

 

  오늘도 과제에 목매고, 내일도 새벽부터 영어학원에 가게 될 저는 대학생입니다. 내년에도 또 등록금이 오르지는 않을까 걱정에 가슴 졸이고, 스무살만 넘으면 독립할 줄 알았던 부모님으로부터는 여전히 용돈까지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학생의 날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대학생 독자 동지가 있다면 오늘, 당신의 학생의 날은 어땠는지 묻고 싶습니다.


태그:#학생의날, #11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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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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