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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말 '잊혀진 계절'에 생긴 판결 하나는 역사에서 결코 잊히지 않을 것 같다. 29일 이루어진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판결은 가히 인류사에 파장을 일으킬 만한 반동성을 띠고 있다. 이것은 '수단과 과정이 정당해야 목적과 결과가 정당하다'는 인류의 고색창연한 윤리·도덕을 일거에 전복시켰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들어 봤지만, '불법도 법'이라는 말은 난생초문이다.

보편적 윤리 전복시킨 헌재의 미디어법 판결

이강국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언론관련법' 국회 표결의 정당성을 가리는 권한쟁의심판 청구 사건에 대한 선고를 하기 위해 대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강국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언론관련법' 국회 표결의 정당성을 가리는 권한쟁의심판 청구 사건에 대한 선고를 하기 위해 대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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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관들은 법안의 표결 처리 과정에 불법 행위가 있었음을 '다수 의견'으로 채택하고서도 법안의 효력정지가처분 판결에서는 기각판결을 내렸다. 이는 불법 행위를 다수 의견으로 인정하고서도 정작 법안의 유·무효를 가리는 판결에서는 똑같이 '다수 의견'으로 유효하다고 채택함으로써 심각한 '이상증세'를 노출한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논리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헌재의 논리는 표결 처리 과정에서 피청구인 측의 대리투표 행위가 있었고 그들이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헌법을 위배할 정도의 중대한 행위는 아니므로 통과된 법안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1997년 국회의장의 변칙적인 노동법 법률안 가결선포행위(이른바 날치기)에 대하여 무효가 아니라고 판결했던 헌재 판례를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미디어법 무효소송 기각판결은 1997년의 노동법 날치기 법안 유효 판결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가진다.

올여름 7월 22일 벌어진 국회의 미디어법 표결 처리에서는 날치기뿐 아니라 대리투표라는 범죄 행위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한나라당의 부인에도 이사철 의원은 버튼을 다섯 번이나 누른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이 법의 표결처리에는 '일사부재의 원칙 무시'라는 위법 사실이 작용하기도 했다. 헌재는 방송법 개정 표결에서 이윤성 국회부의장이 투표 종결을 선언한 뒤 의결 정족수에 미달하자 재투표를 실시해 가결선포한 것은 민주당 의원들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6대 3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 법에 대한 가결선포가 무효인지에 대해서는, "국회법 제92조의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의 점 또는 국회법 제93조의 법률안 심의절차를 반한 점은 인정되나, 입법절차에 관한 헌법규정을 위반했다는 등 취소 또는 무효로 할 정도의 하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7대 2로 기각했다.

진보신당의 조승수, 민주당의 정세균 의원 등은 바로 이러한 점들 즉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 그리고 법안의 심의 부재 등을 문제 삼아 헌재에 법안무효심판을 청구했었다.

결국 이번 헌재의 판결은 형사법과 국회법을 동시에 위반한 범죄행위의 결과에 유효성 또는 정당성을 인용(認容)해 준 꼴이 되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법은 윤리·도덕의 최소한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번 판결은 법치주의나 민주주의를 논하기 이전 인류의 보편적인 윤리·도덕 영역에 반동하려는 징후를 보인다는 점에서 심각한 수준의 맹목성을 띠고 있다.

그들의 맹목성은 이기주의와 보신주의

'언론관련법' 강행처리는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과 대리투표로 야당 의원들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헌법재판소는 결정했다. 그러나 헌재는 강행처리된 신문법과 방송법 등의 효력을 무효화해 달라는 야당 의원들의 청구는 기각했다.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헌법재판관 목영준, 민형기, 김희옥, 조대현, 송두환, 이동흡, 김종대, 이공현, 이강국(소장).
 '언론관련법' 강행처리는 일사부재의 원칙 위반과 대리투표로 야당 의원들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헌법재판소는 결정했다. 그러나 헌재는 강행처리된 신문법과 방송법 등의 효력을 무효화해 달라는 야당 의원들의 청구는 기각했다.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헌법재판관 목영준, 민형기, 김희옥, 조대현, 송두환, 이동흡, 김종대, 이공현, 이강국(소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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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재판관들, 즉 이강국· 김종대· 이동흡· 목영준· 민형기· 이공현· 김희옥 제씨는 방송법 법안 무효청구를 기각한 당사자들이다. 이 중에서 김희옥을 제외한 6인 제씨는 신문법 법안무효청구에도 기각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 7인의 재판관들을 맹목적으로 만들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헌법재판소의 최근 이력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첫째 2004년 4월 29일, 헌재는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 결정에 대한 위헌 소송을 기각한 바 있다. 당시 헌재는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사안으로 이에 대하여 사법적 기준만으로 심판하는 것은 자제하여야 하므로 각하한다"고 판결했다.

이처럼 헌재는 군대 외국 파견 문제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회피한 것이다. 이것은 표면상 '소극적 사법주의'의 발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먼저 여기서 언급한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란 말은 무슨 뜻인지? 법원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에도 사법적 판결을 내렸지 않은가.

결국 이것은 자기들의 기각 결정을 합리화하려는 궁색한 '레토릭'이거나 아니면 강대국 미국의 파병 요구에 순응하는 정부의 결정에 반대의사조차 내지 못하는 사법적 패배주의의 면모를 보인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한국의 헌재에는 이토록 나약한 면모가 일찍부터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둘째 2004년 5월 14일, 헌재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기각한 바 있다. 당시 헌재는, "일부 행위에서 헌법과 법률 위반이 인정되나 탄핵을 인용(認容)할 정도의 중대한 사유는 아니므로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물론 비헌법적이고 비이성적이었던 국회의 탄핵 소추를 기각한 것은 정당한 판결이었다. 하지만 헌재는 그러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이 '법률과 헌법을 위반한 것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이것은 당시 탄핵안을 발의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편을 형식상 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말대로 법률과 헌법을 위반했으면 탄핵하는 것이 마땅한 일일 것이다. 헌재는 이번 미디어법 표결은 헌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므로 유효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로써 볼 때 이번에 나타난 헌재의 모순과 눈치보기식 양비론은 사실 진작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2004년 10월 21일, 헌재는 노무현 정부의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위헌 소송에,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에 위배되므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당시 한 재판관은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경국대전>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서구식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 한국은 당연히 성문헌법의 나라이다. 그런데 그들은 난데없이 '관습헌법'을 운운하면서 600년 전의 <경국대전>까지 들먹인 것이다. 아무튼 군대 파견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라며 소극적인 체하면서 찬성해 준 그들이 자기들의 본거지인 서울이 수도로서의 가치를 잃게 될 것 같으니까 돌연 적극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넷째 2008년 11월 13일, 헌재는 종합부동산세법 위헌소송에 매우 복합적인 판결을 내렸다. 헌재는 종합부동산세 제도 자체는 '합헌', 세대별 합산 규정은 '위헌', 주거목적 1주택 장기보유자 부과 및 주택 외에는 다른 재산이 없는 자에 대한 세금 규정부분은 '헌법불합치'라는 복잡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종합부동산세 자체가 합헌이라면 당연히 세대별 합산이나 1주택 보유자일 경우에도 이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헌재 재판관의 대부분은 이 세금의 부과 대상이었다. 그들은 종합부동산세가 형식상으로는 합헌이라면서 실제적으로는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렇듯 보신, 이기적인 판결만을 일삼는 헌법재판소의 존재 의의가 과연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이런 정도의 판결이라면 대법원이나 헌법위원회라도 능히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9명의 헌법재판관 중에는 야간옥외집회금지가 합헌이라는 의견을 낸 사람도 두 명 들어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3년 동안 사무실 이전 배치 경비만으로도 10억 5000만 원을 썼다고 한다. 다수의 국민은 더 이상 무용한 '영감님'들의 지위 보전을 위해 세금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소설쓰는 법관" 판결문 능가하는 댓글들

네가 살인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사람을 다시 살릴 수는 없으니 그냥 무죄로 하자.

헌법재판소의 미디어법 기각 판결은 '세계 판결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 같습니다. 과정은 불법이나 미디어법은 유효하다? 대한민국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대리시험을 보거나 커닝을 해도 그냥 유효하게 인정을 해줘야 하나요? 이게 헌법재판소에서 내린 판결인가요? 다가오는 수능에 아이들이 핸드폰을 지참해도 되겠네요. 어떻게 초딩 1년만도 못한 건지요?

정말 한심한 기관이 존재한다고 국민들은 생각할 겁니다. 헌법재판소 무용론도 나올 것입니다. 재판관들께서 이런 내용을 가지고 국제회의에 가서 한 번 발표해 보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미디어법은 처음부터 유효하다고 거짓말을 하지, 왜 뜬구름 잡는 판결을 내리셨습니까? 법관이 소설 쓰는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오늘 판결문은 아이러니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표면과는 반대의 판결을 창작하시느라 고생이 참 많았겠습니다.

이처럼 헌법재판소 게시판에 올라온 누리꾼들의 한결 같은 반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헌법재판소의 존재 의의를 묻고 있다. 일찍이 도올 김용옥은 수도 이전에 위헌 심판을 내린 7인의 재판관들을 '갑신7적(甲申七賊)'이라고 호명한 바 있다. 도올은 7인의 재판관은 국운 융성의 기회에 재를 뿌린 도적 같은 위인들이라고 지탄했다.

왕년의 그들이 '갑신7적'이라면 오늘의 그들은 '기축7적'(己丑七賊)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수단과 과정이 목적과 결과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인류가 오랫동안 합의해 소중한 가치이다. 그들은 이 소중한 가치를 하루아침에 전복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서양문화사 <새벽에서 황혼까지>의 저자 자크 바전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세 가지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것에는 '의사들의 장사꾼화'와 '기자들의 속물화'에 '법관들의 모리배화'가 하나 더 추가된다. 조금 섬뜩하긴 해도 자크 바전이 저서에 남긴 말을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법률가는 더 이상 훌륭한 법률가와 비열한 법률가로 양분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에 나오는 "법률가는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대사는 이제 관용어로 자리 잡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추리장편소설 'BK연쇄살인사건'을 연재 중입니다.



태그:#기축7적, #미디어법, #헌법재판소, #수단과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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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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