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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은 지난 100년 우리나라 역사에서 두 번이나 역사를 뒤흔든 총성이 울린 날이다. 첫 총성은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고, 30년 전 1979년에는 17년 대한민국을 독재로 휘두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사살된 날이다.

 

1909년 10월26일 이른 9시30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는 '탕' 하는 7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순간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주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쓰려졌다. 원흉 히로부미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서른살 조선 청년은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의 러시아어) 외쳤다. 그 조선 청년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대한국인 안중근이었다.

 

일본은 왜 이토를 죽였는지 물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토를 저격했다"고 말했다. 단순히 대한제국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를 처단했다고. 안중근은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주의자로 전쟁을 통하여 오로지 자기 나라 이익만 생각하는 이토를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평화'의 이름으로 처단한 것이다.

 

일제는 평화주의자 안중근을 용납할 수 없었다. 히로부미를 죽인 것만 아니라 '평화'를 말하는 안중근을 살려준다는 것은 조선과 만주 더 나아가 동양을 전쟁으로 집어 삼키려는 그들의 목표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을 살려주면 이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었기에 일제는 안중근에게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내렸고  히로부미 처단 석 달 만인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시켰다.

 

이후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합병조약(合倂條約)을 강제로 맺었다. 조약을 맺은 당사자는 을사늑약 오적이었던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을사늑약도 고종황제가 없었듯이 합병조약도 순종황제는 없었다. 조약은 8월 29일 공표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안중근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다섯 달만이다. 우리는 이를 '경술국치'라 부른다.

 

30년 전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사살한 김재규는 동향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동기였다. 그는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에 가담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지만 결국 1979년 10월 26일,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사살하였다.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을 당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는 사살했는지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를 사살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부마항쟁을 그는 1980년 1월28일 항소이유보충서를 통해 이렇게 정리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봉기로서, (중략)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한겨레21> "김재규가 쏘지 않았다면"- 2009.10.23 제782호)

 

부마항쟁 시민들을 "탱크로 갈아뭉게 버리면 된다"고 했던 차지철과 다른 평가를 내린 것이다. 박정희 2인자로 군림했던 김재규마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유신 심장을 쏘았지만 아직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는 박정희를 넘지 못하고 있다.

 

조갑제씨는 <조갑제 닷컴>에 올린 '10.26 사건 30주년을 맞아' 제목 글에서 박정희는 "사농공상의 구질서를 부수고, 상공농사의 새로운 질서와 사회구조를 만든 근대화 혁명가였"고 "이승만 대통령이 깔아놓은 자유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조-자립-자유의 전략을 추진하여 내실 있는 자유를 만들었다"고 추어올였다.

 

이어 그는 박정희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면서 "청탁(淸濁)을 들여마시되 자신의 영혼을 맑게 유지하였던 부끄럼 타는 초인이었다"고 평했다. 조갑제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어올리는 일은 어제 오늘이 아니지만 우리 사회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수 많은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독재자를 '초인'으로까지 추어올리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2009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박정희 독재 정권에 생명을 던지면서 민주주의를 지켜려고 싸웠던 민주·진보 세력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박정희 유산을 완전히 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유산을 그리워하는 권력집단은 2009년 현재 또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잡아 넣었지만 2009년 권력은 직위를 파면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방송인을 퇴출시키는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옥죄고 있다. 박정희보다 더 교묘한 방법이다.

 

100년 전 하얼빈에 울린 총성은 평화를, 1979년 궁정동 총성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울렸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민족 원흉이자 반평화주의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과 김재규가 독재자 박정희를 사살한 이날 과연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할 일이 많음을 명심해야 한다.


태그:#안중근, #김재규, #이토히로부미,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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