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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공공연하게 유포된 '신민회'의 모습이 '신빙성 없는 자료'에 터하여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이는 숭실대에서 통합과정을 밟고 있는 일본인 학자 키노시타 타카오씨다.

'경찰조서·검찰조서'와 '법원 공판기록'

키노시타씨는 지난 17일 대우재단빌딩에서 열린 한국민족운동사학회(회장 박환) 월례발표회에 참석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일제에 의한 사건조작과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보다는 피고인들의 법원 공판기록에 의거해서 신민회의 모습을 구성하는 것이 더 객관적일 텐데 한국 사학계는 정반대로 일제 관헌측이 만든 사료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민회와 관련된 사료는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당시 사건을 조사한 경찰조서, 검찰조서, 검사논고 등의 일본 관헌 측의 기록과 경성복심법원 등 공개된 장소의 공판기록이다. 현재 한국 근대사를 다루는 이들은 모두 전자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문제로 제기한 것이다.

키노시타 타카오(숭실대 기독교역사학, 통합과정)씨가 '신민회상(像)의 형성에 관한 비판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 키노시타 타카오(숭실대 기독교역사학, 통합과정) 키노시타 타카오(숭실대 기독교역사학, 통합과정)씨가 '신민회상(像)의 형성에 관한 비판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 이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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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빈약한 1907년 신민회 창건설 "공판자료 참고 안 해"

특히 신민회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신용하의 연구는 "실질적인 근거가 없이 벌써 1907년에 신민회가 있었다고 전제를 하고 있다"며 "그가 신민회 창건 1907년 4월설을 고집하는 유일한 근거는 일제관헌측의 기록인 검찰조서를 인용한 부분"이라고 꼬집었다. 105인사건 자체가 일제에 의한 조작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조작된 사료를 근거로 삼고 있는 것.

실제로 경찰신문조서·검찰신문조서와 복심법원 공판시말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처음 유죄판결을 받은 105명 중 윤치호를 제외한 104명이 고문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강제된 허위 자백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경성복심법원의 이 방대한 자료를 처음으로 이용해 논문을 발표한 것은 전 한성대 총장 윤경로였다.

이에 대해 키노시타씨는 "윤경로는 2심과 3심 공판기록을 '부차적인' 사료로 평가했다"면서 "변호인단이 경찰, 검찰조서 내용이 일방적으로 고문에 의한 자백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고, 실제로 2심 경성복심법원에서는 1심판결이 파기되는 바가 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했다. 2심과 3심보다 비교적 부당한 1심판결 기록을 신뢰했다는 평가다.

'명치 41~42년'을 '40~41'로 짝지어 바꾼 의도

세부적으로 윤경로의 <신민회의 창립과정>을 살핀 그는 "이승훈에 대한 진술을 인용하면서 이승훈이 1907년 안창호에 의해서 직접 권유를 받아 입회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인용문의 출처를 찾아본 결과 1908~1909년(명치 41~42년)으로 되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숫자가 낱개로 바뀐 것이 아니라 41-42라는 짝진 숫자가 또 다른 한짝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단순한 오기가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 것.

뿐만 아니라 이때 사용한 사료(韓民族獨立運動 資料集 1)의 바로 밑줄에 이승훈이 평안북도 신민회 총관임을 부정한 부분도 커트하는 등 '이승훈이 1907년 안창호에 의해서 직접 권유를 받아 입회하고 있다'는 주장에 곤란한 사료는 인용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광옥의 권유에 입회한 안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회원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1908년 입회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윤경로와 신용하가 신민회의 핵심적인 존재로 보고 있는 임치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대구복심법원 진술에 의하면 '명치 41년(1908년) 봄인가 여름경'에 안창호가 그를 찾아와 신민회 일에 진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임치정은 양기탁에게 논의하자 회계사무일 이외의 일에 관계하지 말라고 말하여 거절했다는 것이다. 또한 1908년 봄 내지 여름경에는 아직 신민회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근거도 될 수 있다.

구석에 주석으로 슬쩍, "억울한 피고인들 위해서라도 정성껏 다뤄야"

키노시타씨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공판정에서 신민회 회원임을 부인했을 수도 있다는 반론에 대해서도 "지금 한국에 유포되어 있는 신민회의 모습은 총독부 경무총감부가 꾸며낸 신민회상과 꼭 같은데, 그 외에 지켜야 할 무슨 비밀이 있을 수 있느냐"며 일축했다.

흥미로운 점은 윤경로의 <신민회의 창립과정>에서 정원범의 입회시기에 '1909년 3월 입회했으나 경무총감보에서 1907년이 아니면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해 입회한 것으로 됨'이라는 주석이다. 주석의 출처가 없기 때문이다. 허위자백의 가능성을 연구하기보다는 자설(및 신용하설)에 대한 불리한 이유로 공판정 피고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지나가 버린 것.

이를 두고 키노시타씨는 "연구자들은 1986년 공판정 사료가 공간(公刊)된 이상 검찰조서와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진술하는 내용이 아주 판이하게 다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의무가 있다"며 "구석에 주석을 달 뿐으로 그냥 지나갈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간 피고인들을 위해서도 이 문제를 정성껏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평을 맡은 김권정 교수는 발표를 듣고 "충격적이면서도 치밀한 사료비판이 돋보였다"고 말했다.
▲ 경희대 김권정 교수(왼쪽)와 키노시타 타카오 씨(오른쪽) 논평을 맡은 김권정 교수는 발표를 듣고 "충격적이면서도 치밀한 사료비판이 돋보였다"고 말했다.
ⓒ 이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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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진술 근거해 '객관적' 신민회상(像) 만들어야

그는 발표중 경찰조서와 검찰조서의 신빙성에 대해서, "검찰조서는 검사의 생각에 따라 그가 취사 선택한 뒤 문답체의 글로 만들어 지는 것"이라며 당시 일본의 '대역사건'을 빗대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나아가 그는 이기당, 차리석, 장응진 등 대부분의 2심 공판 진술들은 신민회가 이야기만 있었지 실제로 성립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일제 관헌 측만이 아니라 피고인들의 공판기록을 아울러 두 가지 사료에 의거해 객관적인 신민회 모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발표를 들은 경희대 김권정 교수는 "충격적이면서도 치밀한 사료비판이었다"며 "기존 연구의 쏠림현상을 지적하고 공정성을 따졌다는 면에서 연구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발표였다"고 평했다.

키노시타 타카오씨는 일본에서 오랜 기간 윤치호에 대해 개인적으로 연구하다가, 고등학교 교사직을 은퇴하고 한국의 윤치호연구 권위자인 숭실대 박정신 교수(기독교 사학)를 찾아와 통합과정을 밟고 있다. 그의 연구 중 서론격인 이날 발표는, <윤치호 일기> 등을 통해서 더 세부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파워(www.newspower.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신민회, #한국사, #역사왜곡, #키노시타, #윤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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