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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서대문 독립공원에서는 인혁당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가 열렸다. 사건 후 처음으로 열린 공개적인 행사였다. 작년에 의문사조사위가 사건의 조작 사실을 공표했고, 최근 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장이 휘날렸고 처음 들어보는 시민단체의 휘장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천주교 사제들의 모습도 여럿 보였다.

조수경은 어머니와 함께 추모식장의 한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처럼 가족끼리만 한적한 납골당에 가 조촐히 추모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년부터는 우리끼리 지내자구나."

어머니는 조수경의 손을 쥐며 말했다.

아까부터 조수경은 맨 앞 줄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한 신사의 뒷모습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신사의 헤어스타일과 검은 조복은 다른 사람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의 뒷모습은 격조와 위엄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아브라함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엄마, 저기 저 사람 아브라함 맞지?"

어머니는 한 차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대답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추모시가 낭송되기 시작했다. 낭송자는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성에는 비장한 떨림과 울림이 있었다.

내가 죽어, 억울하게 죽어
이 땅을 섭섭하게 떠난 뒤에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내가 죽어, 억울하게 죽어
뼈가 바람에 섞여 날릴 때
사람들은 서로 얼굴 맞대고
죽어서도 못 하는 말들을
살아서 밤늦도록 할 수 있을까.

내가 죽어 억울하게 죽어
이 땅을 그리워하는 영혼으로
어딘가에 엎드려 흐느껴 울 때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서
살아 있는 사람끼리 모여 앉아
죽어 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깊고 뜨거운 말들을 나눌 수 있을까

추모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너 나 없이 손을 부여잡거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지방의 어느 공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조수경과 어머니는 버스에 오르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아브라함이 조수경 모녀를 숙연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조수경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가왔다. 그는 어머니 앞에서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조수경은 그의 눈자위가 붉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도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부인. 저의 송구스러움은 죽음보다도 더 깊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바로 어제의 일 같습니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어 붉어진 눈자위를 가렸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처연한 미소를 띠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깐 따님과 걷게 해 주실 수 있는지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경에게 말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친구 분이셨다."

아브라함과 조수경은 작은 연못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범행은 예정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봅니다. 미스 조가 어렵게 된 것을 신문에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소신을 굽힐 필요는 없습니다."

조수경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미스 조는 북풍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요?"
"최근에 공부했습니다."
"좋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다리시니까 오늘은 여기서 끝냅시다. 미스 조 개인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십시오."

조수경은 명함에 메일 주소를 써서 아브라함에게 건넸다.

"아직 사건의 실체는 10분의 1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밤 다시 한국을 떠납니다. 사건의 윤곽이 반쯤 드러날 무렵 다시 오겠습니다."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은 자기의 출국과 귀국을 사건과 연계시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수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어머니에게 돌아가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그 분의 죽음은 만회되지 않겠지요. 하지만 부인, 행복하시기를 염원합니다."

다음 날 조수경은 용 부장의 호출을 받았다. 용 부장 방에는 김인철이 미리 와 있었다.

"마음고생이 좀 되지?"

조수경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 팀장은 수사를 놓으면 안 돼. 표면적인 일은 김인철에게 시키면서 하고..."

김인철은 한쪽 어깨를 슬쩍 들어 보였다. 용 부장이 자신을 복귀시키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조수경은 잘 알고 있었다.

"부장님, 저 때문에 힘드시지요?"
"나를 힘들게 하는 여자는 조 팀장이 아니라 우리 마누라야. 기자 놈들, 아니 요즘 말로는 기자 넘덜 더 혼나야 해. 조 팀장이 잘한 거야."

용 부장과 김인철은 동시에 웃음 띤 얼굴로 조수경을 보았다. 방을 나오려 할 때 용 부장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조 팀장, 기자 넘덜한테 내가 잘했다는 말 했다고 안 말할 거지?"

용 부장은 정감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수경은 용 부장의 조크에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그녀는 부장에게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상대는 더위가 빨리 오고 장마도 일찍 시작될 거라고 예보했다. 기상 예보대로 6월에 접어들면서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게 되었다.

범행이 예고된 6·15가 다가오고 있었다. 경찰은 2주 전인 6월 1일을 기해 전국에 갑호 비상령을 발동했다. 모든 역과 공항과 항만과 터미널에서 24시간 검문·검색이 실시되었다. 숙박업소와 산사(山寺) 등에도 일제 점검이 이루어졌다. 경찰은 모든 고속도로의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차량을 촬영했고 전국의 방범 카메라에서 24시간 눈을 떼지 않으며 수상한 동향을 체크했다.

야당에서는 군 위수령 발동을 주장했지만 대통령은 응하지 않았다. 사실 위수령이라는 것은 지역에 내리는 계엄령이나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계엄령은 물론이고 위수령이나 비상령 등의 단어에도 상당수 국민이 거부감을 갖고 있음을 정부는 잘 알고 있었다. 북한의 군사 위협보다 오히려 그런 말들에 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태그:#인혁당, #아브라함,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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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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