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2월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2월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참 뜬금없기도 하다. 한글날 즈음해서 학교 행사 때마다 국민의례를 시행하라는 교과부의 지침이 일선 학교로 하달되었다. 정식 국민의례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고, 약식 절차는 무엇이 생략되는지 등을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다.

주요 기념일과 학교장 이·취임식, 시·종무식은 물론, 주민이 다수 참여하는 행사의 경우 원칙적으로 정식 국민의례를 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나서 '이하 의식은 생략'해 온 지금까지의 관행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운동 경기 개식 때도 정식 절차를 실시해야 하며, 대규모 경기의 개막전과 결승전 때에는 전 관중이 함께 애국가를 부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하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심지어 전람회나 평생교육축제, 자발적인 시민축제 등의 경우에도 가급적 국민의례 정식 절차를 실시하도록 했다.

전람회나 시민축제 때도 국민의례 꼭 해라?

청소년 때부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하기 위해서란다. 일상적인 국민의례를 통해 국경일 등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기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며, 국기 게양에 청소년들이 앞장서도록 계도할 필요가 있어서 지침을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하긴 국민의례가 각종 행사 때마다 빠짐없이 행해지고는 있으나, 정부의 우려대로 형식화된 채 아이들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거칠게 말해서 유명무실한 관행이 돼 버렸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있으되 눈은 국기에서 비껴나 있고, 애국가를 4절까지 아는 아이는 거의 없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대체 누구냐고 묻는 아이마저 있을 지경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두고 아이들의 애국심 부족을 탓하는 것 같다. 학교에서 국민의례에 대해 교육을 소홀히 한 나머지 아이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예전 같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국민의례 열심히 하면 애국심이 저절로 생긴다고 믿는 걸까. 그렇다면 애국가 4절까지 다 외는 아이가 1절밖에 모르는 아이보다 나라를 더 사랑한다고 여기는 셈이다.

백 보 양보해서 아이들에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치자. 그러나 적어도 정부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운운하며 그걸 꾸짖을 자격은 없다. 눈만 뜨면 애국심을 들먹이는 사람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사랑해야 할 '나라'가 '정부', '권력층', 나아가 '자기들'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영민한 아이들은 이미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알아버렸다.

거리에 나앉게 된 가족... 국가는 무엇을 해주었나

지난 9월 4일 충남 천안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연찬회에서 박희태 대표와 안상수 원내대표, 정몽준 허태열 최고위원 등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지난 9월 4일 충남 천안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연찬회에서 박희태 대표와 안상수 원내대표, 정몽준 허태열 최고위원 등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지난 1월 1일 뉴라이트전국연합, 조갑제닷컴, 국민행동본부, 북한민주화포럼, 선진화시민행동, 반국가교육철결국민연합 등 뉴라이트 보수단체가 주최한 '2009 시민사회단체 신년인사회'에서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김진홍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 등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지난 1월 1일 뉴라이트전국연합, 조갑제닷컴, 국민행동본부, 북한민주화포럼, 선진화시민행동, 반국가교육철결국민연합 등 뉴라이트 보수단체가 주최한 '2009 시민사회단체 신년인사회'에서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김진홍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 등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이태 전쯤 아예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몇몇 조숙한 아이도 있었다. 중3 아이가 '19금'이었던 영화 <실미도>를 보고, 그 한 장면을 떠올리며 애국심의 '정체'를 설명한 것이다.

"(국가를 위해 훈련병들을 모두 죽이라는 중앙정보부장의 명령에) 그들이,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국가'의 명령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총을 꺼내 캐비닛을 향해 쏘며) 권력자가 의지를 갖고 지시를 내리면, 그것이 국가의 명령이야!"

의식으로써 드러내 보이는 데에 집착하는 애국심은 진정한 애국심일 수 없다. 지침이 내려왔으니 학교의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국민의례가 실시될 테지만, 그럴수록 본질은 온데 간데 없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게 될 뿐이다. 단언컨대, 주변 곳곳에 태극기가 내걸리고, 하루에도 열세 번 국민의례가 행해진다 해도 아이들의 마음을 열게 하지 못한다.

아빠가 "애국심? 개뿔!"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뇐다는 아이도 있었다. 듣자니까 10여 년 전 IMF 사태가 터져 아빠가 하루아침에 회사가 부도나 순식간에 가족 모두 거리에 나앉게 됐다고 한다. 살아보려고 별의별 일을 다 했지만, 국가는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주지 않았다는 하소연이었다.

어디 그 아이의 아빠만의 문제였을까마는 그로 인해 처음으로 애국심의 정체를 의심하게 되었다는 거다. 애국, 희생, 봉사, 살신성인, 이런 말에 현혹(?)되기보다는 어느 누구도 위로해주거나 구해주지 않으니 자기 몫은 스스로 확실히 챙기고, 자신과 가족의 삶에 '올인'하는 것이 우리 국민 다수의 당연하고도 현실적인 자세가 된 것이다.

아직도 교과서에는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명언'이 곳곳에 실려 있다. 국가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네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 시험에 출제되면 정답을 골라낼 수 있을지언정 이 말에 수긍하며 가슴에 아로새기는 아이는 없다. 명언과 위인전에 감화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아이는 더 이상 없다는 거다.

국민교육헌장 외우기 부활할까? 나는 두렵다

국민의례 강화 지침을 내리기 전에 국가가 국민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느끼도록 해 달라. 아이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우선 정부가, 권력층이 몸으로 모범을 보여 달라. 고위 공직자들에게 훨씬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요구하고, 부유층에게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그런 대한민국이라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애국심을 말할 수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단 한 번의 실천이 천만 번의 국민의례보다 훨씬 감화가 클 것이다. 서구 여러 나라의 귀족 가문들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건 과거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이 보여준 멸사봉공의 헌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아들을 지원군의 선봉에 서도록 했고, 끝내 전사한 사실은 유명하다.

아무튼 관련 법령까지 들먹이며 이런 지침까지 내려 보낸 걸 보면, 학교에서 국민의례가 수시로 행해지고, 애국심 교육이 강화될 것이 뻔하다. 불현듯 군사정권 시절 모든 국민이 국민교육헌장을 외던 그 시절이 머리를 스친다. 얼마 안 있어 도덕 시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게 하고, 음악 시간에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도록 가르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그럴수록 국민의례는 형해화하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고 믿는 애국심은 아이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부디 모두가 공감하는 실효성 있는 대안을 내달라. 그러고 보니, 내일은 한글날이다.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하고 함께 되새길 수 있도록 법정 공휴일로 지정하려는 노력이 애국심 고취라는 취지에 훨씬 더 부합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국민의례지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