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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
 드라마 <선덕여왕>.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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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공주(이요원 분)의 한마디가 신라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장차 왕위를 이을 부마를 추천하는 어전회의에서, 덕만이 "혼인을 않겠다"며 "내 스스로 부군(왕자 아닌 후계자)이 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왕자가 아닌 공주가 왕이 되겠다고 선언하자, 왕실과 조정을 비롯한 신라사회 전체가 이 전대미문의 발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래와 같은 발언들 속에서 그들의 황당해하는 표정이 잘 묻어나고 있다.

"그게 되는 일이야?"(김춘추, 유승호 분)
"물론 동서고금에 여자가 왕이 된 적은 없었지."(비담, 김남길 분)
"이런 일은 고구려·백제에도 없었던 일이야!"(하종, 김정현 분)
"서역(중국 서쪽의 나라들)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그 나라는 곧 망했어!"(염종, 엄효섭 분)
"천하 만민이 어찌 이런 일을 이해할 것인가?"(미생, 정웅인 분)

위와 같은 반응들에서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덕만이 던진 '여왕'이란 화두는 신라사회에 충격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너무 기가 막힌 일인지라, 평소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던 칠숙마저도 그 소식을 듣고 씩 웃고 말았다. 사막에서 벌어진 '엉뚱 소녀' 덕만과의 인연이 그의 뇌리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엉뚱 소녀'만이 벌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상은 6일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 제40부의 상황이다. 드라마에서 나타난 신라인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여자가 무슨!"이었다. '서역에서라면 모를까, 이런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는 게 드라마 속 신라인들의 전반적인 반응이었다.

<선덕여왕> 제40부를 지켜본 시청자들 중에는 '하긴 저럴 만도 했을 거야'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선덕여왕(재위 632~647년)이 신라 최초의 여왕인데다가 고구려·백제에서도 여왕이 출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덕여왕> 제40부에 묘사된 반응은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남성 위주의 유교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이 그런 유교적 잣대로 과거의 역사를 임의로 재단한 데에서 나온, 지극히 현대적인 반응인 것이다.

물론 신라인들의 의식 속에서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왕이 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골남진(聖骨男盡, 성골 남자가 모두 사라짐)이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덕만이 왕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의 분위기와는 달리 실제의 신라인들에게는 여왕의 출현이 아주 그렇게 황당한 일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들이 있다. 우리는 최소 4가지 이상의 근거를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덕만이 후계자로 지정된 7세기 초반에 신라인들은 이미 여왕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드라마 속의 하종은 "이런 일은 고구려·백제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했지만, 신라인들의 세계 인식 속에 고구려·백제와 중국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는 신라 바로 옆에 있는 일본의 존재를 간과했다.

덕만이 후계자로 부각되기 훨씬 이전인 592년에 일본에서는 이미 최초의 여성 일왕(소위 '천황')이 출현했다. 추고여왕(스이코 여왕)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4년 전인 628년까지 무려 36년 동안 여왕의 자리를 지켰다.

신라와 일본이 밀접한 상호작용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추고여왕의 존재가 여왕에 관한 신라인들의 의식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동서고금에 처음 있는 일"이라느니 "천하 만민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느니 하는 등의 반응이 나올 여지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둘째, 덕만은 여자이기에 앞서 성골 신분의 소유자였다. 그는 사회적으로 골품제도의 최상위 계층에 속한 인물로서 그 어떤 남자 귀족보다도 더 유리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진평왕(재위 579~632년) 시기의 성골이 사회적으로 신성한 위상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평왕의 이름이 백정(석가모니의 아버지)이고 그 왕비의 이름이 마야(석가모니의 어머니)라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당시의 신라 왕실은 이미 이룩한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미지를 석가모니 집안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

미군정 치하인 1946년 1월 1일 '인간선언' 이전의 일왕이 일본에서 신으로 간주되었듯이, 진평왕 시기의 신라 왕실 역시 관념상으로는 신(神)들과 동등한 석가모니 집안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성골인 진평왕 집안은 '왕족' 수준을 뛰어넘어 '석가모니 집안'의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백정'과 '마야'의 자식인 덕만은 석가모니와 동급의 위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석가모니가 남녀의 구분을 초월한 존재이듯이, 석가모니와 동급인 덕만 역시 관념상으로는 인간 남녀의 구분을 초월한 존재였던 것이다.

성골남진이라는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석가모니 급'의 인물이 왕 노릇을 해주겠다는데, '덕만은 석가모니 급이 아니라 인간 여자'라며 이를 제지하려고 한들 그런 노력이 얼마나 사회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셋째, 신라에서는 이미 여성의 사회적 리더십이 상당히 확립되어 있었다. 이 점에 관한 한, 신라는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사회였다고 평가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정보 속에는, 신라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리더십이 상당히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두 가지의 자료가 있다. 하나는, 해마다 한가위 행사에 즈음하여 음력 7월 16일부터 8월 14일까지 열린 길쌈 시합이 두 왕녀의 주관 하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화랑도의 전신인 원화제도의 수령이 남모와 준정이라는 두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국가적인 행사와 국가적인 조직을 여성들이 주도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인들이 일찍부터 '여성 CEO'의 존재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성골남진이라는 비상사태 앞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럼 공주가 하면 되잖아"라는 반응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 신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여신과 여성 사제의 존재가 인정되고 있었다. 이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신성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에서는 제1대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부인, 제2대 남해차차웅의 왕비인 운제부인, 박제상의 부인인 치술공주가 국신(國神)으로 추앙되었다. 또 <삼국사기> 권32 '제사'에 따르면, 남해차차웅(재위 4~24년) 때에 박혁거세의 사당을 세운 뒤에 춘하추동의 제사를 왕의 친누이에게 맡겼다.

여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여자가 제사를 주관하는 분위기. 이런 분위기는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낯선 일이지만 신라에서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여신과 여성 사제의 존재가 인정되는 사회였기에, 성골남진이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여성이 자연스럽게 '구원투수'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을 신으로까지 떠받드는 사회에서 여성을 왕으로 떠받들지 말란 법은 없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7세기 초반의 신라인들이 여성 일왕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 덕만이 성골 신분으로서 석가모니와 동급의 위상을 향유했다는 점, 신라에서는 한가위 행사나 원화제도 등을 통해 이미 여성의 사회적 리더십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점, 신라에서는 여신과 여성 사제의 존재가 인정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볼 때에, 우리는 당시의 신라인들이 여왕의 출현을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황당한 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사회에는 여왕의 출현을 가능케 할 만한 토양이 이미 충분히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성보다는 남성이 왕이 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관념이 신라인들의 의식 속에 존재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라인들의 의식 속에 '여자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어'라는 관념이 존재했다고는 볼 수 없다.

신라인들에게 여왕의 존재는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은 되었던 것이다. 비상시에는 여왕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토양이 이미 충분히 성숙해 있었기에, 신라인들은 여왕의 존재를 '최악'이 아닌 '차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에, 실제의 신라인들은 여왕의 출현을 그렇게까지 황당한 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묘사된 분위기는 지극히 유교적이고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태그:#선덕여왕, #덕만, #덕만공주,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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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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