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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한 당신은 아름답지만 정당의 공천 모습은 아름답지 않아 보인다. 10·28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내세운 후보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투표한 당신은 아름답지만 정당의 공천 모습은 아름답지 않아 보인다. 10·28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내세운 후보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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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다.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박노해의 시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 사는 세상, 그 인간사에 사람만큼 치명적인 게 또 있을까. 사람의 마음을 얻어 사람 사는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정당'이라면, 공직 후보로 내세우는 인물만큼 강력한 자기표현이 또 있을까. 이념으로 평하고 정책으로 따져야 하는 게 정당이다. 그럼에도 역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고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정당이다. 또 정치다.

샤츠슈나이더가 말했다. "정당이 정당으로 올곧게 대우받으려면 반드시 공천을 해야 한다." 정당이 내세우는 인물이 후보다. 그 후보를 내세우는 절차가 '공천'이다. 결국, 공천은 이념과 정책, 노선과 가치를 인물이라는 수단을 통해 대중에게 드러내는 과정인 것이다.

10·28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내세운 후보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제 정치인이 지역구를 바꾸는 것은 다반사다. 당적을 바꾸는 것은 여반장이다. 전력을 무시하는 것 역시 예삿일이 됐다. 도대체 후보들만 보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를 분별할 도리가 없다.

후보를 통해 당의 정체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공천의 유일한 기준은 당선 가능성이다. 그러다 보니 당에 대한 기여도, 소신이나 철학, 자질과 정체성 따위는 뒷전이다. 그 결과 도대체 당의 색깔과 맞지 않거나, 보기에 따라선 해당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던 인물조차 아무런 해명 없이 공천되고 있다. 이쯤 되면 빌 공(空) 자 공천이다. 혹은 땜질 공천이라 할 만하다.

당선 가능성을 앞세우다 보니 여론조사가 각광 받고 있다. 여론조사가 당선 가능성을 가늠하는 유력한 잣대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력 정당들이 앞다퉈 여론조사를 통해 경쟁력 있는 후보를 가려내고 있다. 물론 여론조사는 활용할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그나마 여론조사를 통해 객관적인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여론조사가 당내 특정인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는 견제수단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여론조사 공천이 정당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는 조사된 여론일 뿐, 여론 그 자체가 아니다. 누가 몇 %의 지지를 얻고 있느냐 하는 따위의 여론조사 독법(讀法)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것은 단순 호감도인 경우가 많고, 또 인지도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숫자의 마력이 갖는 몰가치적 독성도 큰 문제다.

게다가 여론은 계속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 순간의 단층면을 통해 얻은 정보를 절대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비유하자면, 여론조사는 한 장의 사진이지 동영상이 아니다. "여론조사가 정치 아젠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오도할 수도 있다." 벤자민 진스버그의 지적이다. 결국, 여론조사는 제한적 용도의 참고자료일 뿐이다.

많은 학자들에 의하면, 정당 없이 현대 민주주의를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정당이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샤츠슈나이더의 단언이다. 이것은 정당이 정치를 통해 사회를 바꿔 나간다는 것이다. 또 정당이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 여론조사를 공천의 잣대로 삼는 것은 정당의 여론형성 기능이나 대중설득 기능을 무시하는 것으로, 일종의 자기부정이라 할 수 있다.

공천을 여론조사에 기대서 하게 되면 또 하나, 언론의 역할을 과도하게 허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누가 대중에게 알려지고, 어떻게 평가되는가 하는 문제는 거의 대부분 언론의 몫이다. 방송이나 신문에 소개되지 않는 대중스타가 있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따라서 자질이나 능력, 이념이나 정체성 따위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인기도를 따지는 여론조사에 의지하게 되면 정당은 언론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정당의 자기부정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당이라면 민주적 공천기준을 정해 놓고 단기적인 유·불리를 떠나 일관되게 견지해야 한다. '오픈 프라이머리'든, 당원 경선이든 민주적 절차를 부동의 규칙으로 정해 놓아야 한다. 지금 지도부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정당을 죽이는 자해 행위라 할 수 있다. 공천은 당내의 특정 시기 특정 리더십이 아니라 당에 기여하는 것이 돼야 한다. 그래야 당이 산다.

정치가 제 몫을 하려면 공천 규칙의 안정화돼야

불평등이나 차별을 시정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그 정치가 바로 서려면 정당이 안정화돼야 한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규칙이 흔들리고 바뀌어서는 정당이 안정화될 수 없다. 무대가 흔들리는데 어찌 그 위에서 역동적인 퍼포먼스가 펼쳐질 수 있으랴. 그런 점에서 정당의 민주적 공천규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설적이게도, 규칙이 정해져 있어야 진정한 변화의 동력이 밑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 뭔가 고정돼 있으면 변화에 부정적일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정반대다. 미국의 루스벨트, 케네디, 오바마 등은 정해진 경선 규칙이 있었기에 변화의 사자(使者)로 등장할 수 있었다. 정해진 규칙이 있기에, 그 규칙에 맞춰 어떻게 대중을 설득하고 동원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새로운 전략을 찾아내게 된다.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다.

그러나 규칙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전략을 고민하지 않는다. 규칙을 바꾸면 되는데 굳이 뭐 하러 전략을 고민하랴.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누구나 수용하는 본래의 규칙에 의해 선출돼야 정당성을 보장 받게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스포츠 경기에서 규칙을 바꿔 승리한 것이라면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또 있다. 어떤 경우에도 바뀌지 않는 규칙은 정치 입문 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 당원이나 시민에 의해 선출되는 절차가 불변이라면 누구도 특정 보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것이다. 줄서기는 효용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세 대결이나 편 가르기 아니라 민심 얻기로 각축하는 리더십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 또한 중요한 포인트다.

우리 정당의 당헌·당규에도 제법 민주적인 규칙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사실상 지키지 않고 있다. 유명무실이라는 표현이 딱 맞다. 심지어 그 규칙에서까지 전략공천이라는 이름하에 자의성의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 결과 선진국에 비해 공천 후보자 교체율은 훨씬 높지만, 한국정치의 후진성은 여전하다. 사람은 달라져도 구태는 요지부동이다.

'희망을 주는 사람'의 배출은 민주적 제도를 통해서

정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계층의 어떤 이해를 대변할 것인지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동의하는 정치인들이 공직 후보로 선출되는 절차, 즉 민주적 공천과정을 고정화시켜 놓아야 한다. 그래야 정당정치가 활성화된다. 정당정치가 활성화될수록 행정권력이 더 민주화된다. 10.28 재·보궐의 공천 과정은 이런 진실을 정확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나 희망을 주는 사람이 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누구의 의지가 아니라 민주적 제도다. 이 제도, 즉 민주적 공천 절차가 지금도 무력화되고 있다. 정치가 자학적으로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 난세다.


태그:#재보궐선거, #공천, #정당,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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