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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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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 8월 24일 예수 그리스도 제자 중 한 사람인 성 바르돌로메오(바돌로매) 축일과 위그노(신교도)인 나바르공국의 왕자와 가톨릭 신자인 공주의 결혼식이 함께 열려 프랑스 파리 시내는 흥겨웠다.

하지만 이 흥을 용납할 수 없는 한 무리가 있었으니 피렌체의 거상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 앙리 2세의 미망인이자 샤를 9세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치였다. 가톨릭 신자인 카트린은 당시 섭정을 하고 있는데 샤를 9세가 결혼식을 통해 위그노 세력과 가까워지자 위그노 지도세력들 학살령을 내린 것이다.

한 번 내려진 학살령으로 바돌로매 축제와 결혼식 축하 파티장은 위그노 3000여 명 생명을 빼앗아 아름다운 센강을 피의 강으로 변질시켰다. 피는 피를 부른다고 했는가, 이후 두 달 동안 7만여 명이 생명을 잃었다.

하지만 프랑스 인민들은 센강이 피의 강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보면서 배웠다. 그 배움을 통하여 만들어 낸 단어가 '똘레랑스'였다. 똘레랑스의 어원은 '견디다' '참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에서 나왔다.

똘레랑스는 <한겨레> 기획위원으로 있는 홍세화씨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기사>에서 우리에게 처음 소개했다. 빠리 택시를 타고 온 똘레랑스는 반공 이데올로기, 제국주의, 군사독재에 의해 닫힌 사고밖에 할 수 없던 우리에게 열린 사고와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관용'이라는 개념으로만 새겨졌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사회에 실현할지 아직도 잘 모른다.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서 살아있는 개념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면서 풀뿌리자치연구소 운영위원으로 있는 하승우씨가 쓴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새롭게 정립해주고 있다.

문제는 책이 나온지 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직 우리 사회는 6년 전과 비교해도 나아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퇴보한 느낌마저 든다. 하승우는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서 살아있는 개념으로 자리잡고, 역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찰하면서 극단과 편견을 넘어 차이와 다양성의 가치가 온전히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열린 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먼저 하승우는 똘레랑스 원리는 제각각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걸쳐져 있는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똘레랑스는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격렬한 대립 속에서 빛을 발한다. 자신의 생각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다면 논쟁 자체는 불가능하다. 논쟁이 가능한 것은 완전한 진리, 절대선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히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싫어하고 창조적인 주장을 권한다. 힘이나 우격다짐이 아니라 이성적인 토론과 설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토론을 통해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되고 평화가 유지된다. 결국 똘레랑스는 대립을 파멸이 아니라 자유의 실현으로, 상극이 아니라 상생으로 이끌려 한다(49쪽)

똘레랑스란 자기 사상과 이념을 무조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논쟁과 설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뿌리깊은 사상 논쟁이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똘레랑스는 절대적인 진리와 완전함을 부정하기에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편협함을 버리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필리프 사시에는 "똘레랑스는 자기중심주의의 포기"라고 했다. 자기를 버릴 때만이 또 다른 자아인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승우는 말한다 "똘레랑스란 '어쩔 수 없이'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견의 완전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국가보안법을 양심보다 우위에 두고, 억압하는 것이다. 똘레랑스가 바로 양심의 자유를 위해 국가보안법 같은 눈에 보이는 억압과 연줄망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 모두를 없애는 무기라고 하승우는 말한다.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는 똘레랑스는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차이를 인정하면 공동체와 단결이 무너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다양성은 지구상에 60억이 넘는 사람이 사는 것처럼 '다양성은 세계의 본질 자체'다.

하지만 '차이'는 반드시 평등을 동반해야 한다. 차이가 자칫 잘못하면 빈부격차와 피부색을 차이로 인정하면 엄청난 불평등과 폭력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등이 중요한 이유다. 그러기에 "평등 없이는 똘레랑스도 없다"는 것이 하승우 주장이다.

그리고 똘레랑스는 공화주의를 실현하는데 시민의 사생활보다 권력의 부조리, 억압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똘레랑스의 대상이다. 정당한 권력은 이성의 행사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이명박 정부들이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것을 옭아매려고 하는 시도가 똘레랑스와 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권력은 국가를 먼저 내세운다. 국가를 위해, 국익을 위해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는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다.

"똘레랑스에는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까지 지키려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공화주의가 깔려 있다."(72쪽)

그런데 똘레랑스가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듯이 똘레랑스 자체도 한계가 있다. 똘레랑스는 권력을 강화시키는데 이용당할 수 있다. 부드러운 권력은 여론의 흐름에 항상 신경을 쓰면서 여론이 요구하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여론을 다른 쪽으로 자신의 힘을 늘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똘레랑스의 가장 큰 한계는 체제가 만든 규칙을 깨지 못한다는 것이다. 체제가 허용하는 비판에는 일종의 규칙이 있다. '자유롭고 평등한 비판'이어야 한다는 규칙을 정해서 현실에서 평등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비판을 막고, 이들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반비판 공세'를 허용한다. 예를 들면 지하철 노조나 발전노조 같은 공공노조가 파업을 일으켰을 때 노동자들에게 업무에 복귀한 후 협상을 하자고 말하는 논리가 그렇다고 하승우는 말한다.

"체제의 규칙은 우리 속에 내면화 되어 있다. 그런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저항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숨겨진 규칙을 드러내고 극복할 때 사회를 바꿀 수 있다. 변화의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혁명에는 육법전서가 없다."(88쪽)

그럼 길은 무엇인가? 공정하지 않고, 평등하지 않은 조건에서 모두가 똘레랑스 해야 하는 것을 거부하고, 공정한 게임을 위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야 하며, 시민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시민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율성과 연대감을 기르는 자치다. 자치는 중앙집권화된 것에 대한 저항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권력에 맞서게 하여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차이와 다양성을 키우는 것으로 똘레랑스라는 토양을 살찌우게 한다고 하승우는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다. 

강자는 결탁이 추태이지만 약자에게는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승우는 말한다. 때로 힘들어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존엄은 그 길의 끝에 놓여 있는 선물이 아니라는 길 위에 뿌려지는 바로 그 땀이라는 말은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새겨야 할 좋은 가르침이다.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 생명을 얻는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개념은 그저 관념일 뿐이다.(142쪽) "

덧붙이는 글 |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 하승우 지음 ㅣ 책세상 펴냄 ㅣ 4,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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