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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추석과 개천절이 같은 날에 오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광복절이나 제헌절보다, 그리고 석가탄신일이나 성탄절보다 더욱 오래되고 중요한 날이 개천절인데 갈수록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음력 팔월대보름인 추석은 추수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올리는 명절이니, 개천절의 의미와도 일정 부분은 맞닿아 있다.

한의학의 역사는 하늘이 열린 날,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 시작하였다. 단군 고사에 등장하는 쑥과 달래(한자로 '산(蒜)'은 작은 마늘, 곧 달래이고 '大蒜'이 큰 마늘, 지금의 마늘인데 당시 마늘은 동아시아에서 재배되지 않았다고 한다), 생활에서 금기조항, 양생사상, 동굴이라는 거주환경 등이 모두 한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제국주의 역사관이나 식민사관은 문화적 현상을 원류와 아류 또는 본류와 지류로 나누어 설명한다. 문화에 높낮이와 선후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견해로서 문화현상을 상호작용이 매우 복잡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관계로 인식한다. 일방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영향을 주는 주체가 바뀌면 영향을 받는 곳은 앞 시기의 역사와 연속성을 잃어버리고 단절의 역사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개천절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앞 시기의 역사정신을 뭔가 모르게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총'은 식민사관에 의한 한의학 왜곡 사례

태백산 정상에 자연석을 쌓아 만든 3기의 제단이다. 태백산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신산(神山)으로 섬겨져 제천의식의 장소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천제단 역시 이런 제를 올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 태백산 천제단 태백산 정상에 자연석을 쌓아 만든 3기의 제단이다. 태백산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신산(神山)으로 섬겨져 제천의식의 장소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천제단 역시 이런 제를 올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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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최초로 한국 의학사를 정립한 김두종은 이능화가 쓴 <조선의약발달사>의 영향을 받아 의학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저술 <한국의학사> 서문에는 최남선과 이병도의 자문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사학자들이 바로 이능화, 최남선, 이병도이다. 김두종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현재의 학자들도 접근하기 쉽지 않은 일본측 사료를 동원하여 고대사 부분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아래 표는 고대사의 왜곡이 무척 심하다고 알려진 <일본서기>의 내용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한국의학사의 일반적인 정보가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① 서기 562년 일본천황이 대장군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케 하였다. 고구려 왕궁에까지 입성하여 귀한 보물을 들고 돌아왔으며, 고구려 왕은 담장을 넘어 도망갔다. <일본서기>
② 서기 562년 일본천황이 보낸 대장군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여 부녀자와 각종 보화를 갖고 돌아왔다. 이때 '오나라 사람 지총'이 각종 서적과 불상, 악기 등을 갖고 함께 왔다. <1820, 국사략>
③ 서기 562년 오나라 사람 지총(知聰)이 '의약 관련 서적'을 갖고 일본에 왔다. <1904, 일본의학사, 후지가와 유우>
④ 고구려 초기에는 의술을 알지 못하여 중국을 통해 의술을 습득하게 된다. <1931, 조선의약발달사, 이능화>
⑤ 서기 562년 중국 강남의 오나라 사람 지총이 각종 의서 164권을 가지고 고구려를 거쳐 일본에 귀화하였다. <1954, 한국의학사, 김두종>

전북 부안 월천리 한 민가 안에 서 있는 한쌍의 돌장승이다. 이 장승은 각각 환웅과 단군 두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단군과 환웅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특이한 장승이다.
▲ 월천리 석장승 전북 부안 월천리 한 민가 안에 서 있는 한쌍의 돌장승이다. 이 장승은 각각 환웅과 단군 두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단군과 환웅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특이한 장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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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가장 오래된 <일본서기>에는 562년에 일본 군대가 당시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하여 진귀한 보물을 갖고 돌아왔다고만 기술하고 있다(①). 물론 이 내용 자체의 진위도 우리로서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데, 19세기 <국사략>이라는 일본의 역사책에는 이때 오나라 사람 지총이 각종 서적과 불상, 악기 같은 것을 들고 일본에 들어왔다고 하였다(②). 김두종처럼 일본 의학사를 정립한 후지가와 유우는 지총이 갖고 온 책들 속에 의약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중국의학이 전래되기 시작한 계기라고 기술하였다(③).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의 역사기술이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살았던 이들에게 위와 같은 역사서술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능화의 기술로써 고구려 초기에는 의술을 알지 못하여 중국을 통해 의술을 습득하였다고 한 점이다(④). 건국으로부터 쇠망에 이르렀던, 적어도 7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전쟁을 치렀고 강력한 국가를 만든 것이 고구려 사람들이다. 전쟁으로 많은 백성들이 다쳤을 터인데도 의술을 알지 못해 늘상 힘겨루기를 하던 옆 나라로부터 배우고서야 알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어서 이웃 나라로부터 모든 것을 이식받았다는 식민주의 역사관이며, 고구려에는 남아있는 사료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의학적 지식이 없었다고 간주하는 실증주의 역사관이다.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사의 모든 문화현상은 중국에서 들여왔다는 인식이 의사학자인 김두종에게도 옮겨가게 되었다. 그 결과 김두종은 ①<일본서기>와 ③<일본의학사>를 인용하여 오나라 사람 지총이 고구려를 경유하여 일본에 의서를 전해주었다고 기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②<국사략>과 같은 역사기술을 보지 않고서는 '고구려를 거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주석대로 <일본서기>와 <일본의학사>만을 참고하였다면 김두종 역시 이능화와 견해 이상을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원류한 의학을 고구려가 배우고, 다시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적 가설을 약간의 문장 왜곡을 통해 일반화시킨 셈이 된다.

하지만 불필요해 보이는 '고구려를 거쳐'라는 표현을 넣은 것은 왜일까? 김두종이 식민사학자들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지식을 많이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식민사관을 깨고 싶었던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제에 의한 교육을 받았다는 시대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일본인들에 의한 실증주의 역사기술보다 연대를 위로 끌어올려 조금이라도 일찍 시도된 것으로 적든가, 중국에서 원류한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는 가교 역할이라도 했다는 것으로 기술하고자 하였다.

지총이라는 인물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기록이다. 이름만으로 보면 덕래, 모치, 설총처럼 오나라 사람이 아니라 백제나 고구려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지총의 실존 여부, 지총이 고구려를 침략한 일본 장군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는 사실 여부, 그리고 고구려를 거쳐 갔다는 것 모두 입증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하지만 지총과 관련된 일련의 기술이 식민사관과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고대 의학사, 중의학의 동북공정으로부터 버텨내야

전북 군산시 옥구향교. 대성전의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옥구향교의 특색은 단군에게 제사지내는 단군묘와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문창서원, 세종대왕 숭모비(崇慕碑)와 비각이 있다는 점이다.
▲ 옥구향교 대성전 전북 군산시 옥구향교. 대성전의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옥구향교의 특색은 단군에게 제사지내는 단군묘와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문창서원, 세종대왕 숭모비(崇慕碑)와 비각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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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학사를 하는 사람이든 한국과학기술사를 하는 사람이든 근대 이전 시기는 중국으로부터, 근대 이후 시기는 일본의 공세로부터 늘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근대 이전 시기의 모든 과학기술이나 의학의 원류가 중국이고 한국은 그 아류라는 것과 근대 이후의 모든 과학기술은 일본이 가르쳐서 조선을 개화시켰다는 논리 때문이다.

특히 고대사 부분을 자신들의 동북지역 소수민족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한의학의 역사를 중국 내 소수민족 의학의 하나로 간주하고 '모든 소수민족의학은 중의학에서 영향받은 아류'라고 기록하는 것이 중국 측의 생각이다.

1596년에 간행된 이시진의 <본초강목>은 조선의 <동의보감>처럼 중국의 대표적인 의학서적이다. 이 책의 인삼 항목에는 예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인삼이 유명하였다며 그에 대한 설명이 함께 들어있다. 일련의 설명 속에 "고구려는 곧 요동을 말한다(高麗則是遼東)"라는 오래된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이 문장은 빠르면 위진남북조 시대에 쓰인 것인데 당시 요동은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을 의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82년 중국의 의학관련 기관출판사인 인민위생출판사에서 간행된 <본초강목>에는 같은 문장을 "고구려의 영토는 요동과 가깝다(高麗地近遼東)"라고 바꾸어 놓았다. 의도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본격적인 동북공정이 벌어지기 10년 전에도 이와 같은 문장의 변형을 통한 역사 왜곡이 있었던 것이다.

<본초강목>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조선'이라고 언급

다행인지 우연인지 같은 인삼 조문의 뒤쪽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지금의 조선에 속한다(其高麗百濟新羅三國今皆屬于朝鮮矣)"는 문장도 나온다. 이때까지는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토를 애써 축소하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 지금과 같이 동북공정이 본격화된 때였다면 고구려 영토를 축소하려는 시도 대신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의 제후국이었고, 백제와 신라 두 나라만 조선이라고 수정하지 않았을까?

동아시아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서 패권을 쥐려 하는 중국이나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사적인 시각에 따라 많은 자금과 인력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오랜 기간 역사 왜곡으로 피해를 본 우리는 그와 같은 행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역사를 스스로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구미에 맞추려고 하는 움직임에는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 이것은 개천절을 맞아 하늘이 열린 의미를 되새기는 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역사의 면면한 흐름 속에서 앞선 시대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 내일의 정신을 만들어내는 첫걸음이다.


태그:#한국 의학사, #동북공정, #식민사관, #고구려, #개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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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주)민족의학신문사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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