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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 없는 무(無)

누구나 컴퓨터 프로그램 '엑셀'을 별 생각 없이 다양한 업무에 사용한다. 그러나 7년 전 아들이 군에 갈 때만 해도 실탄의 재고량 파악을 계산기에 의존했다. 3명의 행정병들이 2~3일씩 진을 빼는 모양이었다. 행정병이 된 아들은 엑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혼자서 5~10분 동안에 그 일을 처리하였다.

시간, 하루, 온도, 거리, 자, 우주 등 실존하는 모든 것은 공간 상의 위치와 시간의 출발점을 갖는다. 무(無)는 모든 실체의 원점과 목표점, 회전축과 기준틀을 제공한다. 우리에게서 '진공', '허공', '공간', '0'으로 표현되는 무(無)를 빼앗아간다면 수학체계며 현대과학체계, 심지어 상업체계까지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는 사람들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무(無)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며 잠재적인 힘이다. 무(無)가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면 '물질', 물리학적 표현은 시공간의 '마당(Field)', 수학에서는 '0'이며, 천문학 용어로는 '우주', 불교용어로는 '공(空)'이다.  한가지 개념인 무(無)가 여러 가지로 표현되는 것은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無)는 우주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이러한 상태를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고요 또는 적막의 상태로 느낀다. 어떤 이유로든 국지적으로 우주의 대칭이 깨어지면 다시 대칭을 이루기 위한 에너지의 흐름이 발생하고 '에너지와 질량은 등가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일치한 질량을 갖는 물질이 생성되는 되는 것이다.

현대 과학에 의해 알려진 우주의 구성 물질과 힘은 전체의 4% 정도이다. 나머지 대부분인 96%는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 뿐 구체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과학 칼럼니스트인 K.C. 콜(Cole)은 미지의 96% 물질이 무한대의 중력을 갖는 우주의 구멍(Black Hole)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론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를 그녀의 저서 제목인 <우주의 구멍(The Hole in the Universe)>에서 설명하기 위해 무(無)에서 출발하여 우주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일반인도 이해하도록 쉽게 설명하였다.

숫자 0

로스앤젤레스 타임지의 과학칼럼니스트인 K.C. Cole이 무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하여 쓴 책
▲ 우주의 구멍 로스앤젤레스 타임지의 과학칼럼니스트인 K.C. Cole이 무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하여 쓴 책
ⓒ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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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숫자에 숫자 0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몇 십만 명에 이르는 '카이사르' 원정군의 야전행정병을 해본 경험이 없으니, 병참물자의 입고 및 반출, 전출 또는 전입자 현황, 부상자 및 전사자 파악의 업무가 얼마나 힘들고 복잡한 일이었는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없다', '공'이다, '꽝'이다, 등 재수없고 기분 나쁜 이미지인 무(無)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무한대인가 싶다가 어느덧 다시 0이 된다. 붙잡을 수 없이 날 뛰면서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들을 괴롭히던 골치 아픈 문제아였다. 이러한 0의 성질 때문에 0은 언급 자체가 금지된 신성모독의 대상이었다.

수천, 수백만 같은 큰 숫자를 자주 사용해야 하는 1세기경 마야와 인도의 천문학자들은 숫자 0을 발명하였다. 9세기경 아랍세계로 건너갔지만 일반적인 숫자로 취급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성 때문에 냉대를 받고 이탈리아 사람 피사노의 1202년에 발간된 <주판의 책>에 의해 우리에게 익숙한 수 체계로 소개될 때까지 무관심 속에 묻혀 잊혀졌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이교도'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 0은 숫자가 되지 못하고 플러스(+)나 마이너스(-)같은 부호로 사용되었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산술과 기하에 0이 사용된 것은 그로부터 수 백 년이 지난 후이다. 양, 부피, 길이, 폭, 변, 각의 의미를 갖지 못한 0은 대수학에 뿌리를 내릴 때까지 모든 실체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무(無)가 뉴턴과 라이프니치에 의해 발명된 미분에 붙잡혀 실체가 드러나면서 모범생이 되고 아인슈타인이 펴 놓은 중력장 위에 자리하면서 존재하는 실체가 되어 현세를 떠받치는 대들보가 되었다.

모든 주파수의 빛을 합치면 무색인 태양광선이 되듯이 어떤 수라도 0과 곱하면 0이 되고 0으로 나누면 폭발해 버린다. 0(없다)과 그의 대칭적인 1(있다)은 자기 자신과 나누면 자기 자신이 되는 아주 특이한 수이다. 0과 1의 조합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2진법으로 작동하는 컴퓨터의 능력을 감안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0으로 표시하는 무(無)는 잠재적이긴 하지만 유(有)이고 실체이며 모든 것이다.

과학은 뒷받침할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해질녘 고즈넉한 해변가를 따라 걷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 도도히 밀려오는 밀물과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기 위한 분위기와 배경음악으로 간주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갯벌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에 풍부한 영양을 실어 나르는 생태계의 조화로 볼 수도 있고, 또, 지구와 달의 질량에 의한 중력작용과 이로 인한 시공간의 휨으로 연결되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마당(Field)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크고 작은 사건은 보는 이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발생원인은 복합적이고 복잡할 수 있으나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대칭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無)가 된다. 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는 무(無)는 현상으로 나타나기까지는 우리의 육감으로 인식할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이다.

1929년 허블은 은하들이 서로 멀어져 가는 팽창하는 우주를 관찰했다. 이러한 사실은 '최초의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없는 점이었다'라는 상상하기 어렵고 믿기는 더 어려운 사실을 사실로 만들었다. 이 점은 형태도 없고 크기도 없으면서 무한대의 질량을 갖는 그 무엇으로 모든 것을 끌어당겨 형태와 크기를 없애버리는 우주의 구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65년 두 전파천문학자 월슨과 펜지어스는 우주의 대폭발 때 발생하여 지금까지 우주에 떠도는 빛의 파장을 기록했다. 이로부터 초신성이 된 우주 구멍의 무한대 질량이 또 무한대의 질량을 합치는 상태를 계속하다 보면 초무한대의 질량이 되고 이를 지탱하지 못하는 우주의 구멍은 순간적으로 폭발하여 우주를 지배하는 힘들이 형성된 사실의 증거가 되었다. 대폭발의 잔류물들이 다시 모여 태양계를 이뤘다.

최근까지 하나의 학설에 불과한 우주의 대폭발론은 2003년 이후 정밀과학분야가 되었다. 현대과학은 우주의 역사를 대폭발 후 10억 분의 1초의 정확도로 구별하게 되었다.

거시적 우주론인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과 미시적 규모의 양자역학 사이의 상반된 모순된 현상인 양자의 요동과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양자의 생멸을 주관하는 진공의 역할에 있다. 즉, 무(無)는 거시적이며 동시에 미시적인 세계가 되는 것이다.

무(無)를 보는 방법

"부처는 허공을 본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해 우주의 본질을 파헤치지는 못했지만 과학적으로 공(空)의 실체를 규명한 사람이다. 우주는 무(無)고 공(空)이지만 실체이기 때문에 곳곳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우주를 느끼고 못 느끼는 것은 개개인의 소양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각의 신경을 통해 의식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필요하지 않는 것은 지우고 필요하면 없는 것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자신의 코끝을 보지 못하는 것이나 망막의 맹점을 영상의 공백대로 느끼지 않은 이유이다. 우리가 시신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범위는 우주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테니스나 등산 같은 격한 운동 후, 찬 맥주 한잔의 맛을 즐기기 위해 따개로 맥주병 뚜껑을 젖히는 순간 맥주 속의 빈 공간에 포획된 탄산가스 분자들이 공간으로 사라진다. 보지 못하나 맥주 속에 탄산가스가 들어있던 빈 공간이나 이 빈 공간을 메우고 있던 탄산가스는 존재하는 실체이다.

보지 못하더라도 인식 할 수 있는 탄력적인 능력을 갖는 사람이면 좋겠다. 무(無)의 인식이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공(空)을 모르면 돌아갈 곳도 모른다. 


우주의 구멍

K.C.콜 지음, 김희봉 옮김, 해냄(2002)


태그:#무 , #공, #허공,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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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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