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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는 무엇이었을까요?

1. 첨성대를 둘러싼 여러가지 주장들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하기 전부터 한국 과학사관련해서 가장 논쟁이 치열한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 '첨성대'일 것입니다. 어쩌면 드라마보다 더 치열할 정도로 고대 과학사에 관심이 있었던 과학자, 역사학자, 수학자가 서로의 사유체계에서 각각, 천문관측기구다, 제례기구다, 상징기구다 라고 주장하면서 상대의 주장을 격렬하게 비판해왔습니다.

이렇게 첨성대에 대해 서로 열변을 토해온 까닭은 첨성대가 이름에서 보이는 무시무시한 가치 그러니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기구유적임에도 불구하고 '첨성'(별을 관측하는 일)의 기능을 했음 직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알려진 것 중 맨눈으로 가장 많은 관측을 해냈고 최후의 천문대이기도 한 것은 티코 브라헤가 덴마크의 벤이라는 섬에 만든 우라니보르그입니다.

(이때는 대항해시대,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게 위도는 해가 가르쳐 줬지만 경도는 쉽게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바닷길 운전은 너무 위험했고, 하늘의 지도를 기준으로 경도지도를 만들었는데요, 해리슨의 경도시계가 보편화되기까지는 성도가 가장 인기 있는 항해표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제작하는 일은 꽤 큰 돈벌이가 되는 벤처사업이었습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견했을 때 애초의 목적도 해군에 팔아 목돈을 벌어 연구에 전념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항성의 위치를 기준으로 한 하늘지도보다 행성의 위치와 모양변화가 더욱 정확한 경도지도였기 때문이지요.)

우라니보르그를 생각해보건대, 혹은 이슬람권이나 인도에 있는 천문관련 고대 유적만 생각해봐도 첨성대는 '하늘을 관측하는 방법'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인 첨성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4가지 설입니다.

1.관측기능, 그러니까 충분히 별을 관측할 수 있었다는 주장으로 경주 신라과학관에 가면 그 재연까지 해놓았습니다.
2.제사기능, 즉 기우제를 지내거나 왕실 행사를 할 때 상징물이었다는 것이지요.
3.상징기능. 이것도 각각 나눠져서, 불교적 상징성, 주비산경의 상징성, 우물의 상징성 등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물이 나온 이유는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탄생한 신성한 장소가 '나정'이라는 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우물은 우주와 연결되어있다고 믿었는데요, 바다가 가까운 동해안에서는 동해에 사는 용왕님의 궁전과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4.해시계 기능. 여기서 해시계는 규표나 그노몬의 개념이 강해서 첨성대 아래에 절기를 표시한 선을 그려놓거나 시간 선을 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이 있는 만큼,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 유적이며, 그만큼 매력적이고 상상력이 가능한 공간이라고 여겨집니다.

자, 도대체 첨성대는 왜 만들었고, 무엇을 하였을까요?

신라역사과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복원된 첨성대 모형.실제 어떻게 관측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첨성대 복원모형 신라역사과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복원된 첨성대 모형.실제 어떻게 관측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신라역사과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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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왕의 학문으로서의 천문학

우리나라 최초로 '소행성'에 자신의 이름을 달게 된 사람은 누구인지 아시나요? 바로 백제의 천문학자인 관륵이라는 승려입니다. 관륵은 일본에 천문학을 전해줌으로써 일본이 고대국가로서 도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이것을 기리기 위해 1993년 후루카와 기이치로라는 일본인(전 도쿄 천문대 교수)은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에 관륵(觀勒.KANROKU)라는 이름을 붙여서 국제천문연맹에 등록했습니다.

관륵은 백제 성왕-위덕왕시대에 활약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가 형제의 나라를 버금갈 만큼 좋았는데요, 성왕은 한강수복이라는 야심을 실현시키고, 귀족들에 의해 수많은 임금이 살해당하는 정치상황을 뒤엎을 카드로 가야-일본과의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였던 때입니다. 한번 쯤 들어봤음직한 아좌태자가 위덕왕의 아들입니다.

일본은 백제에서 불교와 유교를 전래받았기 때문에 남해안을 거쳐 군산-백마강으로 이어지는 뱃길은 유학생들로 늘 붐볐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때에도 다른 곳의 문화재들은 수난을 당했으나 유독 사비시대의 문화재는 '성지'로서 보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백제의 천문학 수준을 가늠케 하는 관륵의 활약의 핵심은 일본에 제왕의 학문으로서 천문학을 정립시켜낸 것입니다.

왜 동양에서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한나라 때 학자 '동중서'에 기인한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일이 곧 인간의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늘의 일을 모르면 인간을 다스릴 수 없고,반대로 하늘의 일을 이용해서 인간의 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거죠. 마치 하늘에 별똥별이 떨어지면,누가 죽나보군,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닷없이 출현한 유성이나 혜성은 불길한 일이라 '추적'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그 기록은 자세하고도 꼼꼼하게 남았습니다.
(반면 서양은 하늘은 완전한 신의 영역이라 혜성같은 불순물을 인정하지 않아 기록이 현저히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일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혜성이 나타나면 백성에게 알려 불안하지 않도록 하거나 일식과 월식을 미리 알아내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한나라는 동중서의 이런 하늘관을 수용했고, 동양최초로 '유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동중서가 인간생활원리중심의(교훈이나 격언이었던) 유학을 천문학과 인간의 심성을 아우르는 철학,그것도 정치철학으로 변신시켜냄으로써 고대 철학이 중세철학으로 발전할 기초를 놓았던 것이지요.
이후 모든 국가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백성과 다른 귀족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천문학을 이용했습니다. 동중서에 의해 정치는 참 쉬워졌습니다만, 과학은 더욱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늘의 일을 알아내는 게 그렇게 쉬울 리 없거든요.

하지만 천체운동의 규칙을 알아내고, 예측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특별히 그런 원리를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문대대로 존중받았던 궁정과학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아주 일찍 하늘의 규칙을 알아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다만 가문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그 비밀을 오래도록 공개하지 않았고, 그것이 동양천문학을 더디게 발전시키다가 서양에 뒤처지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궁정 과학자들은 이미 시간의 원리를 비롯해 천문학의 기초단위인 시각,날짜,해,달 등의 규칙을 알아냈고, 이를 바탕으로 달력을 만들어서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달력은 각국의 사신단을 통해 제후국에 배포됩니다. 제후국이 아닌 독립국의 경우에도 달력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나라란 천자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하늘의 뜻도 모르는 족속들이 무슨 나라를 다스려.' 이렇게 말이지요.

백제는 지리적 이점으로 일찍부터 중국 달력을 차용했고, 이것을 다시 백제의 시점에 맞게 번역하는 일에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백제에 이미 천문관측기구가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점성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점성대는 말 그대로 별을 보고 점을 치는 곳, 혹은 별을 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모든 과학은 신학이었고, 그래서 과학자도 신관이었고, 그들의 행위는 '점'이었습니다)

삼국중에서 유일하게 중앙행정부서에 과학기술부라고 할 수 있는 '일관부'를 둘 정도로 각별하게 천문학에 관심을 쏟았던 것은 그만큼 백제가 발달한 농업국가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발달한 백제천문학은 일본으로 전해져, 그곳에서 물시계, 점성대를 비롯해 마침내 일본달력을 만들어냄으로써 일본천황이 시간의 지배자, 하늘의 지배자로서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르도록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니, 그들로서는 관륵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3. 신라의 달력

신라도 마찬가지로 하늘의 지배자로서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라가 언제 달력을 만들어냄으로써 고대국가로서 우뚝 서게 되었을까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보자면 "법흥왕 23년 처음으로 연호를 일컬어 '건원 원년'이라고 하였다."는 536년의 일로 여겨집니다.
자신의 연호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기준으로 달력을 만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법흥왕은 신라를 고대국가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법률을 반포한 '율령국가'로 도약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라의 천문학의 발전수준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신라는 끊임없이 중국의 북조와 남조 양쪽에 모두 사신을 거듭보내면서 역서(달력)와 역법수집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런 성과로 일관이라는 전문 천문학자에게는 중국 궁정천문학자에 버금가는 지식과 비법이 생겼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어째서 왕이 때때로 공표하는 달력(연호가 발표될 때마다 새달력이 나왔을 것으로 보입니다)에 만족하지 않고, 첨성대를 세웠을까요? 거기에다 관측소라고 하기엔 애매모호한 이 건물은 왜 만들었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 했던 것일까요?

신라역사과학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선덕여왕상
▲ 선덕여왕상 신라역사과학관 1층에 전시되어 있는 선덕여왕상
ⓒ 신라역사과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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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첨성대 탄생의 정치적배경

첨성대의 비밀을 풀어줄 단서를 삼국사기에서 찾아보면 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으로 이어진 신라시대 중엽의 정치적 혼란을 들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김알지의 후손인 경주김씨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시기였지만, 여전히 전통왕가인 박씨는 왕비가문으로써 위세를 유지했고, 다른 전통귀족들도 세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것을 반영하는 것처럼, 법흥왕은 딸이 있었지만 사위인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고, 진지왕은 아들이 있으나 동생인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고, 선덕여왕은 딸이었지만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결혼을 했다고 해도(일설에는 창녕가야의 유력가문인 김인후가 남편이라고 합니다.) 남편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다시 사촌 여동생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천명공주는 남편이 있었고, 아들까지 있었는데도 그들이 왕위계승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렇게 엇박자 행보를 해야 했던 까닭이 무엇일까요?
우선, 진지왕과 진평왕은 형제입니다만 둘은 어머니가 다릅니다. 진지왕의 모계는 박씨고 부인도 박씨입니다. 반면에 진평왕은 모계도 김씨고 부인도 김씨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왕위 계승은 이전의 모든 형식과 다르게 진행됩니다. 진지왕은 형이 개에 물려죽자 왕위에 올랐고,(도대체 왕자가 개에 물려 죽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그도 왕위에 오르자마자 끌어내려졌고, 성골 출신의 임금들 중 유일하게 '악명'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언제나 승자가 패자에 대한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악명'을 뒤집어씌운다는 것을 가르쳐왔고요.

이런 상황에서 진평왕은 자신의 정당성을 전통 귀족들에게 보여줘야 했는데요, 이때는 백제도 고구려도 신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분쟁기였습니다. 오죽하면 수양제에게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를 제발 쳐달라고 부탁했을까요? 물론 수양제는 얼씨구나 하고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협공을 할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고, 백제의 공격에 성을 뺏기고 있는 실정이었지요. 당연히 전통 귀족 세력들은 진평왕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습니다.  칠숙의 난이 그것입니다.

천명공주가 용수(혹은 용춘)과 결혼하는 바람에 왕위계승서열에서 밀린 것으로 보아 전통 귀족들은 여전히 진지왕계를 지지하고 있었고, 천명공주가 그들에 의한 볼모였거나 아니면 진평왕이 민심을 달래기 위해 진지왕계와 혼인을 성사시켰던 것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천명공주는 덕만공주의 언니라고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진평왕은 궁지에 몰렸고, 뒤를 이은 선덕여왕은 이것을 타개해야할 역사적 소명이 있었습니다.

5. 신라천문학과 첨성대

첨성대는 신라 천문학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기단부에서 상단부까지 29층으로 돌을 쌓아 음력 한 달의 날수와 일치시키고,
상단부의 숫자를 빼면 층수는 28개. (동양은 28수라고 하여 서양의 황도 12궁에 대비해서 달이 머무는 숙소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 하늘은 28개의 숙소로 나뉘어졌는데 이것을 상징하며,
돌의 총 개수가 일년의 날수 365와 거의 같도록 축조되었고,
창이 있는 중간 층을 제외하고는 상층,하층은 각각 12층, 12달을 상징하고 총 24개는 절기를 상징하며, 기단부에서부터 벽돌의 숫자가 16,15,16,15가 반복되는 것은 절기와 절기사이의 날짜 수입니다. 그리고 몸은 둥글고 단은 네모난 것은 '천원지방'의 동양천문사상을 담은 것으로 한나라 때 동전인 오수전이 둥근 모양에 네모난 구멍을 가진 것을 통해 이 시대에 미치는 영향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첨성대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가, 일본에서는 점성대(占星臺)가 축조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징성을 잔뜩 담은 이 돌탑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가입니다. 달력을 반포하고 하늘의 지배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진평-선덕여왕 대의 정치적 저항을 극복한 것은 이 돌탑을 쌓음으로써 가능해졌던 것일까요?

일단, 별의 관측지로서 첨성대의 입지는 훌륭하지 않습니다. 별을 잘 관측하려면, 동쪽 토함산 위라거나, 남쪽 산위, 북쪽 산위 등등 하다못해 바로 뒤 반월성 위에라도 관측소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별의 관측이라는 것이 하늘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한 그렇습니다. 우라니보르그가 그랬듯이.

그래서 첨성대가 관측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조선시대 관측소가 궁궐 내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것은 말도 안되는 주장입니다. 조선시대의 천문관리들은 특별히 혜성이 나타나거나 이상징후가 있으면 남해안,동해안,서해안 등 주요지점에 파견되어 관측하고 그 데이터를 서운관에 보내 기록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화도의 참성단에서는 전담 관측자가 상주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첨성대는 하늘을 관측하는 일을 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목적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별을 관측했다면 당시 이웃한 백제에서도 기록한 사실들을 누락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일식기록 등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다 조선시대 관측대는 현재 남아 있는데요, 그 구조가 관측에 적합합니다만 첨성대는 아직까지도 명쾌하게 관측법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흔쾌히 관측대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달력은 중국 중심의 달력이고, 이것을 경주중심으로 바꿔야 했는데요, 그러자면 중국의 남조와 북조가 위치한 곳과 경주가 가진 위도값과 경도값의 차이를 계산해서 보정을 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일을 조선시대에는 '역법교정'들이 맡았는데 제법 정교한 수학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와 달과 오행성의 남중시각을 아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나침반이 없었던 때에 고정된 구조물인 첨성대는 천문관리인 일관들이 간단한 천체관측용으로 쓸모가 있었을 것입니다. 별을 본다는 의미는 이 7가지 칠정의 관측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규표나 해시계설도 일리 있습니다. 바닥에 절기와 시간선을 그려 놓았는데, 세월이 지나 사라졌다고 가정하면요. 하지만 그노몬이라면 상단부위에 뾰족한 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설치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그렇다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서술하면서 빠뜨릴 이유가 없습니다.(게다가 이 설도 주변국에 규표설치에 대한 실례가 너무 없으며 ,남쪽으로 난 창의 미스터리는 여전히 숙제입니다)

기타 상징성은 말 그대로 상징성인데, 이미 돌탑 내에 숫자로 정확하게 천문상수들을 표현한 마당에 뭐 때문에 다른 상징성을 다시 찾아야 할지를 밝혀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처럼 제왕의 천문학을 민중의 달력으로 만들어낸 것일까요?

신라역사과학관에 복원된 내부모형으로 창까지 쌓은 흙의 위치와 위로 오라가는 좁은 통로의 용도를 복원 전시하고 있습니다.
▲ 첨성대 내부모형 신라역사과학관에 복원된 내부모형으로 창까지 쌓은 흙의 위치와 위로 오라가는 좁은 통로의 용도를 복원 전시하고 있습니다.
ⓒ 신라역사과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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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첨성대는 정치적 상징물

그런 일은 절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왕의 학문으로서의 천문학은 조선시대까지도 포기하기 어려운 절대영역이었으니까요.

그럼 왜 첨성대가 필요했을까요?
그 미스테리를 밝혀줄 단서를 저는 창문의 위치와 창문까지 가득 쌓아놓은 흙에 있다고 봅니다.

창문은 정남향이 아닙니다. 동쪽으로 19도 정도 어긋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것이 동짓날 해뜨는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매한 백성들에게 왕실의 권위를 가져다줄 가장 확실한 퍼포먼스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해첫날 경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하늘이 왕을 선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백제의 달력은 동짓날을 새해첫날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신라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동지의 의미는 잘 알고 있었지요. 해의 고도가 낮아지고 낮아져서 완전히 가라앉는날. 다시 떠오르는 해는 '새해'입니다.

이 새해는 동쪽 토함산너머로 떠올라서 곧장 첨성대 남쪽으로 난 창을 향해 쏟아집니다. 당신이 선덕여왕이라면 그걸 어찌 하겠습니까?

수많은 주문을 외고 자시고 한 뒤에 왕은 번쩍 일어서서 외칠 것입니다. 그 순간 해는 첨성대 창에 놓인 금으로 만든 거울을 비추고, 다시 왕의 가슴에 달린 거울을 비추며 모든 사람들을 압도해나갈 것 같지 않나요?
고대에 거울은 해의 상징물이기도 했고, 그래서 청동검,청동거울,옥을 황제의 징표인 3보라고 일컫기도 하며,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수장의 위세는 이세가지를 전부가진 무덤인가 아닌가로 판가름이 납니다. 아마 이때 어떤 경로로 전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일본왕실에서는 이것을 가보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상상입니다. 하지만, 첨성대는 그 어떤 답도 다 허용하고 있기에 이것이 오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궁궐의 남쪽(그러니까 궁성안의 모든 백성들이 다 보입니다)에 있는 첨성대가 반월성의 어느 공간에 있는 거울을 통해 두 번 반사된 빛을 보는 순간, 감히 거스르기 어려운 힘을 느낄 수 있었겠지요.

신라시대에 특별히 많이 만들어져 전해지는 '동종'의 용도는 시계의 기능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주에 사는 사람들은 종소리로 시간을 가늠했는데요,그러자면 사찰은 특별히 시간을 잘 알아야 했습니다.그래서 해시계나 물시계가 사찰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해시계는 왕실에서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여 전시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해시계도 마찬가지로 공공시설물로 수표다리 근처를 비롯해 여러곳에 설치되어 한양을 오가는 사람들이 시간을 보고 알 수 있게 하였듯이 신라 왕경에도 그런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신라시대 해시계 신라시대에 특별히 많이 만들어져 전해지는 '동종'의 용도는 시계의 기능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주에 사는 사람들은 종소리로 시간을 가늠했는데요,그러자면 사찰은 특별히 시간을 잘 알아야 했습니다.그래서 해시계나 물시계가 사찰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해시계는 왕실에서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여 전시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해시계도 마찬가지로 공공시설물로 수표다리 근처를 비롯해 여러곳에 설치되어 한양을 오가는 사람들이 시간을 보고 알 수 있게 하였듯이 신라 왕경에도 그런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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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혈통주의와 신라천문학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통귀족세력들은 선덕여왕을 인정하지 않고, 마침내 비담의 난이 일어났고, 위기에 봉착한 왕실은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 진평왕-선덕여왕 시절, 고구려 백제와의 끝없는 분쟁은 가야세력인 김유신계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권력에서 소외되긴 마찬가지였던 진지왕계의 수장 김춘추는 껍데기만 남은 진평왕계의 마지막 임금인 진덕여왕시절 권력을 꿰차고 자신들의 뜻대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할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언제나 외부의 적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삼국통일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 후 외교통이었던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을 때는 그 유명한 '정관의 치'시대. 당나라는 수나라의 유습을 그대로 이어받은 까닭에 오로지 현명한 신하들의 맹목적 복종만 얻어내면 치세를 이어갈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수나라가 시작한 과거제도는 당나라를 번성케 했고, 귀족을 압도해가는 이 힘을 본 김춘추는 당장 그것을 신라에 도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혈통주의의 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박,석,김 세 가문에 의해 이끌어져온 신라왕실은 그만큼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그것이 삼국중에서 가장 많은 왕실내 피바람을 불러온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권력을 김씨 왕계로 독점하면서도 잠재된 이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중대한 '혈족'정당화를 단행합니다.

율령은 그 유명한 '골품제'의 법적 표현입니다. 귀족들은 이제 더 이상 이합집산을 통해 왕실을 견제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의 사상적 표현을 불교에서 얻어옵니다.

불교는 첫 출발은 왕자였던 신분인 싯다르타가 천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평등'의 원리를 설파했을지 모르나 어찌되었든 통과하는 시점은 고대사회였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불교나 유교,혹은 기독교는 힘과 힘이 부딪히는 정복자들에게 진정한 권위와 권력은 칼이 아니라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회적 합의라는 표현양식을 띄고 있으므로 훨씬 지배하기 쉽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만, 무엇보다 완벽한 종교세계를 속세에서 펼칠 수 있는 근거를 주었습니다. 기독교가 신과 천사와 사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급사회를 정당화했듯이 그리고 유교가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관계로서 계급을 표현함으로써 혈연적 숙명급으로 격상시켰듯이 불교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륜성왕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법흥왕 이후, 불교를 정치이데올로기에서 끌어내린 태종무열왕전까지의 왕가의 이름은 전부 불교식 이름이고, 왕호도 '진'짜가 들어감으로써 불교가 통과해온 인도 카스트제도를 그대로 답습해내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합니다.

이에 따라 진흥왕계 이후부터는 골품제도가 제도로서가 아니라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인도카스트제도의 모방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아마 혈통을 이때보다 더 지독하게 고집했던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선덕여왕시절 불교이데올로기의 표현으로 첨성대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이 가정은 정치적 상징물로서 첨성대가 필요했다는 점에서는 매력적인 주장입니다만, 첨성대에 표현된 과학적 상징을 해명해야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춘추는 가야계 김유신 가문과 혼인함으로써 이 혈통주의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법흥왕 이후의 율령체계가 가진 힘도 다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진덕여왕까지 신라는 자신의 왕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미로 '연호'를 썼습니다만, 김춘추시대가 되면서 모든 제도를 한화(중국화)정책에 힘입어, 연호가 사라지게 됩니다. 불교에 기댄 혈통주의 이데올로기는 유교제도에 의한 통치로 바뀌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첨성대는 그 유물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시대로 들어오는 입구를 만들어 놓았고, 아직도 후대인들인 우리는 그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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