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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칼국수는 은근히 고소하게 다가와 달착지근하게 혀끝에 달라붙는 쫀득한 맛이 그만이다
▲ 팥칼국수 팥칼국수는 은근히 고소하게 다가와 달착지근하게 혀끝에 달라붙는 쫀득한 맛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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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기... 비님이 오셔."
"그래서?"
"배고파."
"그으래. 그럼 오늘은 칼국수나 먹으러 갈까? 수제비는 며칠 앞 비님 오실 때 먹었잖아."
"오랜만에 팥칼국수는 어때?"
"팥칼국수? 귀신 쫓을 일 있어?"

그해, 스무 살 허리춤께 맞이한 초가을 저녁. 쌍꺼풀 예쁘게 진 까아만 눈동자가 동그란 우물처럼 깊었던 그 여자. '공순이'란 말이 죽어도 듣기 싫다며 툭 하면 흐느끼던 그 여자가 흘리던 눈물 같은 가랑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면 은근히 댕기는 음식이 있다. 비오는 날마다 그 여자와 함께 마주치는 눈빛으로 후후 불며 먹던 수제비와 칼국수다.

길손(나)은 어릴 때부터 수제비와 칼국수를 무척 좋아했다. 스무 살 허리춤께 만났던 그 여자도 어릴 때부터 수제비와 칼국수를 좋아했다 그랬다. 그해 초가을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도 그 여자와 함께 칼국수를 먹었다. 그냥 칼국수가 아니라 붉으죽죽한 국물이 아주 진한 팥칼국수를 먹었다. 마산 부림시장 한 귀퉁이에 있는 그 허름한 집에서. 

그 여자는 그때 팥칼국수를 먹으며 속삭였다. 가랑비 오는 날, 까닭 없이 슬프고 외롭고 쓸쓸해지거나 몸이 으슬으슬할 때에는 팥칼국수를 먹어야 한다고. 길손이 왜? 라고 묻자 "아무런 까닭 없이 세상이 초라해 보이고 기운이 없는 것은 귀신이 씌어서 그런 거"라고. "몸에 붙은 그 귀신을 쫓는 데는 뜨끈한 팥칼국수가 으뜸"이라고.    

뜨거운 물에 1시간쯤 불린 팥
▲ 팥칼국수 뜨거운 물에 1시간쯤 불린 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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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반죽이 끝나면 그릇에 담아 크린백을 씌운 뒤 30분쯤 숙성을 시키자
▲ 팥칼국수 밀가루 반죽이 끝나면 그릇에 담아 크린백을 씌운 뒤 30분쯤 숙성을 시키자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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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는 '짭조름한 맛', 전라도는 '달착지근한 맛'

우리집 대표음식은 송송 썬 묵은지에 콩나물과 멸치 맛국물, 갖은 양념을 넣고 만드는 콩나물 해장국과 같은 재료에 비지를 넣어 만드는 비지찌개 그리고 수제비와 칼국수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마다 길손과 그 여자, 두 딸이 좋아하는 수제비와 칼국수는 이미 <오마이뉴스>를 통해 독자들에게 자세하게 소개했다.

까닭에 이 자리에서는 요즈음 들어 우리집 대표음식으로 새롭게 떠오른 팥칼국수를 꺼낸다. 팥칼국수는 그냥 칼국수보다 만드는 방법이 훨씬 쉬우면서도 은근하고 칼칼하게 당기는 고소한 감칠맛이 그만이다. 팥칼국수는 건강에도 아주 좋다. 갈증해소, 숙취, 비만, 공해로 빚어지는 여러가지 성인병 예방에도 일등 공신이다.

조선시대 명의 허준(1539~1615)이 쓴 <동의보감>에 따르면 팥은 "평(平)해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맛이 달면서 시고 독이 없는 작물"이며 엉긴 피를 빼내고 소갈과 설사를 그치게 한다. 그뿐이 아니다. 팥은 소변을 잘 나오게 할 뿐만 아니라 수종(몸이 붓는 병)과 창만(배가 나오는 병)을 다스린다.

쫀득하게 씹히는 맛도 좋고, 성인병까지 쫓아내는 팥칼국수. 팥칼국수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맛볼 수 있는, 서민들 땀내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음식이다. 하지만 경상도와 전라도 팥칼국수는 만드는 방법은 같지만 맛이 좀 다르다. 왜? 경상도에서는 간을 맞출 때 설탕보다 소금을 더 많이 쓰고, 전라도에서는 소금보다 설탕을 더 많이 넣기 때문이다.

경상도는 '짭조름한 맛'을 더, 전라도는 '달착지근한 맛'을 더 좋아해서 그럴까. 그건 잘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경상도 사람들 투박하고 억센 말이 어쩌면 이 '짭쪼름한 맛'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전라도 사람들 말이 구수하며 노랫가락처럼 부드럽게 높낮이로 이어지는 것도 어쩌면 이 '달착지근한 맛'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얇게 편 밀가루 반죽에 밀가루를 조금 뿌린 뒤 종이를 접듯 한 쪽으로 몇 번 접어 부엌칼로 얇게 썰자
▲ 팥칼국수 얇게 편 밀가루 반죽에 밀가루를 조금 뿌린 뒤 종이를 접듯 한 쪽으로 몇 번 접어 부엌칼로 얇게 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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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가 완성되면 밀가루를 약간 더 뿌려 면발을 은근슬쩍 털어주자
▲ 팥칼국수 칼국수가 완성되면 밀가루를 약간 더 뿌려 면발을 은근슬쩍 털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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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원하는 음식 먹어야 건강 지킨다

"아주머니! 팥 이거 얼마씩 해요?"
"1kg에 5천 원씩 받아요."
"500g만 주시면 안 돼요?"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누구 생일인가 봐요?"
"아뇨. 갑자기 팥칼국수 생각이 나서…."
"아저씨, 음식 잘하시나 봐?"
"그저 그래요."

14일(월) 저녁 7시. 날씨가 마치 비오는 날처럼 선선해져서 그런지 갑자기 팥칼국수가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갑자기 무언가 먹고 싶을 때는 그 음식에 들어 있는 무언가가 부족하니 몸이 그 음식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 때는 무조건 그 음식을 먹는 게 건강을 지키는 길이다"라던, 길손이 가까이 모시는 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 비도 오지 않는데 갑자기 팥칼국수가 먹고 싶다는 것은 내 몸이 팥에 들어 있는 그 어떤 영양소를 보충해 달라는 게 아니겠는가. 서둘러 가까운 동원시장에 나가 늘 가던 곡물가게 앞에 가서 팥 500g을 샀다. 인상 좋은 그 아주머니는 팥 500g을 저울에 단 뒤 팥 한 줌을 덤으로 더 넣어 주며, '맛있게 드세요' 했다. 

고마웠다. 그 곡물가게는 길손이 잡곡밥을 해 먹기 위해 보리쌀, 흑미, 찹쌀, 좁쌀 등을 살 때마다 들르는 단골가게였다. 그 아주머니는 그때마다 꼭 잡곡을 한줌씩 더 넣어주곤 했다. 그 아주머니뿐만이 아니었다. 동원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동네 장사니 동네사람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며 무얼 사면 꼭 덤으로 더 주는 게 미덕이었다.      

팥이 다 익으면 숟가락으로 팥을 잘게 으깬다
▲ 팥칼국수 팥이 다 익으면 숟가락으로 팥을 잘게 으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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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물에 썰어놓은 칼국수를 넣고 한소끔 더 끓인 뒤 설탕과 소금으로 간만 맞추면 끝
▲ 팥칼국수 팥물에 썰어놓은 칼국수를 넣고 한소끔 더 끓인 뒤 설탕과 소금으로 간만 맞추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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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반죽할 때 키포인트는 소금물

팥칼국수를 만드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팥과 밀가루, 달걀, 소금, 설탕만 있으면 그만이다. 국거리나 찬거리를 만들 때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마늘, 파, 고추, 양파 등 갖은 양념재료가 필요치 않다는 그 말이다. 팥칼국수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밀가루 반죽이다. 반죽을 잘해야 면발이 쫀득쫀득 씹히는 맛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밀가루 반죽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소금물이다. 소금물을 쓰지 않고 그냥 물을 부어 반죽을 하면 면발을 씹을 때 닝닝한 게 밀가루 냄새가 느끼하게 배어나 입맛을 버릴 수도 있다. 길손은 밀가루 반죽을 할 때 밀가루에 소금물과 달걀, 식용유 서너 방울을 떨어뜨린다. 그래야 밀가루 반죽이 차지면서도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밀가루 반죽이 끝나면 그릇에 담아 크린백을 씌운 뒤 30분쯤 숙성을 시키자. 숙성을 시키지 않으면 밀가루 반죽이 약간 거칠어 보기에도 썰기에도 먹기에도 좀 껄끄럽다. 그 다음, 미리 뜨거운 물에 1시간쯤 불린 팥을 냄비에 담아 깨끗이 씻은 뒤 물을 적당량 붓고 센불에 끓인다. 팥이 팔팔 끓으면 약한 불로 낮춰 팥이 충분히 익을 때까지 끓이자.

팥이 다 익으면 숟가락으로 팥을 잘게 으깬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팥을 잘게 으깨 체에 걸러 팥물만 사용하지만 길손은 체에 거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잘게 부숴진 팥껍질을 칼국수와 함께 씹는 감칠맛이 은근하게 혀끝에 착착 감기기 때문이다. 팥을 다 으깨고 나면 다시 물을 붓고 한소끔 끓이자.

작은딸이 비가 올 때마다 끓여달라고 했던 기러기 아빠표 팥칼국수
▲ 팥칼국수 작은딸이 비가 올 때마다 끓여달라고 했던 기러기 아빠표 팥칼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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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은 팥수제비를 먹을 땐 싱건지를, 팥칼국수를 먹을 땐 묵은지를 꺼낸다
▲ 팥칼국수 길손은 팥수제비를 먹을 땐 싱건지를, 팥칼국수를 먹을 땐 묵은지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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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초가을 저녁 팥칼국수 한 그릇 하실래요

팥물이 끓을 동안 숙성시킨 밀가루 반죽을 도마 위에 올려 밀가루를 조금씩 뿌려가며 얇게 편다. 이어 얇게 편 밀가루 반죽에 밀가루를 조금 뿌린 뒤 종이를 접듯 한 쪽으로 몇 번 접어 부엌칼로 얇게 썰자. 이때 면발 크기는 입맛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길손은 약간 큰 면발을 좋아한다. 쫀득하게 씹히는 맛이 좋기 때문이다.

칼국수가 완성되면 밀가루를 약간 더 뿌려 면발을 은근슬쩍 털어주자. 그래야 면발이 서로 들러붙지 않는다. 이제 팥물에 썰어놓은 칼국수를 넣고 한소끔 더 끓인 뒤 설탕과 소금으로 간만 맞추면 끝. 이때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소금보다 설탕을 1:3 정도 많이 넣고, 단맛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소금을 설탕보다 3:1 정도 많이 넣으면 된다.

팥칼국수는 은근히 고소하게 다가와 달착지근하게 혀끝에 달라붙는 쫀득한 맛이 그만이다. 팥칼국수를 먹을 때 묵은지가 있다면 더욱 맛이 좋다. 묵은지가 없다면 싱건지도 괜찮다. 길손은 팥수제비를 먹을 땐 싱건지를, 팥칼국수를 먹을 땐 묵은지를 꺼낸다. 이것이 우리집 대표 음식 팥칼국수를 즐기는 길손의 맛법이다.
                              
서울에서 홀로 사는 기러기 남편, 기러기 아빠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 저녁에 만드는 팥칼국수. 지난 유월, 어머니 제사 때 창원 집에 갔다가 오랜만에 아내에게 끓여준 기러기 남편표 팥칼국수… 지난 여름방학 때 서울로 올라온 작은딸이 비가 올 때마다 끓여달라고 했던 기러기 아빠표 팥칼국수… 어때요? 오늘 저녁 팥칼국수 한 그릇 드심이.

덧붙이는 글 | '우리집 대표음식' 응모글



태그:#팥칼국수, #기러기 아빠표, #기러기 남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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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우리집 '대표음식'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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