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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장으로 온 뒤 해마다 새해는 KBS 별관 스튜디오에서 맞았다. 연말에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KBS 연기대상' 시상식이 12월 31일 자정을 넘기고 새벽까지 진행되는데, 이 시상식의 가장 큰 상인 연기대상 수상자를 맨 마지막에 발표하고 상패를 전달하는 몫이 사장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연말이면 연기대상 외에도 연예 오락프로그램 부문에서 뛰어난 작품과 출연진, 제작진에게 상을 주는 'KBS 연예대상', 그리고 가요계의 1년을 정리하는 'KBS 가요대축제'가 있다(원래는 'KBS 가요대상'이라 하여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가수에게 가요대상을 수상했는데, 수상자 선정과 순위 발표에 늘 문제가 제기되어 2006년부터 축제형식으로 바꿨다).

연말 시상식에 사장이 꼭 나가서 시상해야 하느냐고 사내 임원과 관련 팀에 물어 본 적이 있다. 어느 한 시상식에는 사장이 참석하는데 다른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않으면 불평등 시비가 나올 수 있으니, 참석하려면 모두 참석하고, 아니면 아예 하나도 참석하지 않아야 된다는 답이 되돌아왔다. 한 해를 결산하는 자리인데, 프로그램 만드느라 날밤을 새면서 고생한 제작진과 출연진들에게 어떤 형태로건 격려와 위로를 해야 할 터여서, 그렇다면 가겠노라고 하여 연말 시상식에 모두 참석하게 되었다.

스튜디오에서 맞는 새해

2008년 새해가 밝았다.

그날도 나는 KBS 별관 스튜디오에서 새해를 맞았다. 새벽 1시 가까이 되어 'KBS 연기대상'의 가장 큰 상인 연기대상을 발표하게 된다. 연기대상 발표와 시상이 있기 5분 전쯤, 나는 무대 옆으로 인도되어 간다. 거기서 나와 함께 수상자 발표와 시상을 공동으로 진행하게 되는 전년도 연기대상 수상자와 만난다.

시상하러 나가기 전, 짤막한 원고가 내게 전달된다. 무대에서 수상자 발표하기 전 전년도 연기대상 수상자와 잠시 나눌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는 원고다. 작가가 써서 넘겨주는 원고인데,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 전년도 연기대상 수상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 나누는 게 어떠냐며 그 자리에서 화제를 바꾼다. 최고 수준의 연기자들이기에 내가 이런 질문할게요, 그렇게만 이야기해도 무대 위에서 화려한 대답이 술술 나온다.

2006년 연기대상은 '황진이' 주연이었던 하지원씨가 받았다. 무대 옆 대기하는 곳에서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무대에서 나눌 이야깃거리에 대해 잠시 의견을 나눴다. 무대로 나가기 전, 연기대상 수상자 이름이 담긴 쪽지가 내게 전해졌다. 살짝 열어보니, '대조영'의 최수종씨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드라마 '대조영'의 추억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마지막 대상 발표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정연주 사장과 하지원 씨
▲ 2007 kbs 연기대상 시상식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마지막 대상 발표를 함께 진행하고 있는 정연주 사장과 하지원 씨
ⓒ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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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에 시작해서 2007년 12월 말까지 1년 3개월 동안 방영된 '대조영'은 소홀하게 다루기 쉬운 발해 역사를 대하드라마 주제로 삼았다. 드라마로서 흥미 뿐 아니라 삼국시대 이후 남쪽의 신라, 북쪽의 발해라는 남북시대를 조명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와 영토가 그 당시 얼마나 웅대했는지를 보여준, 의미 있는 대하드라마였다. 어느 기록을 보니, 당시 발해의 영토 크기가 신라의 8배, 고구려의 2배나 되었다는 것이다.

드라마 '대조영'의 세트장은 속초에 세워졌다. 대하드라마가 보통 1년 정도의 오랜 기간 동안 방영되는데다, 1회당 제작비가 2억 원이 넘고, 또 KBS1 텔레비전의 주말 핵심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그래서 사장이나, 본부장, 드라마팀장이 제작 현장에 내려가서 격려하는 일이 다른 드라마보다는 많은 편이다.

가령 '불멸의 이순신' 경우에는 전북 부안에 있는 세트장을 가끔 찾아가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수고한다며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하고, 저녁에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조영'은 이전의 대하드라마만큼 자주 찾지 못했다. '대조영'이 시작된 2006년 가을에는 연임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KBS 노동조합 집행부와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고, 그 이후에도 회사 안팎의 분위기가 강퍅하였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제작 현장을 찾는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다 2007년 가을이 성큼 왔는데, 그때까지 속초에 있는 '대조영' 세트장현장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드라마 제작진과 출연진들 속에서 "드라마광인 정 사장이 왜 한 번도 제작 현장에 안 오나. '대조영'에 관심과 애정이 없는 게 아닌가"하는 볼멘소리가 들린다는 얘기가 전해왔다. 그러고 보니, '대조영' 방영이 시작된 지 벌써 1년 가까이 되었고, 이러다 한 번도 속초 세트장의 현장 격려를 하지 않고 끝나 버릴 수도 있겠다 싶어, 시간을 맞춰서 속초로 갔다. 속초 세트장에서 고생하는 제작진과 출연진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눈 뒤 저녁 식사를 속초 인근의 해변에서 회를 곁들여 함께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는 대조영 최수종씨, 설인귀 이덕화씨, 이해고 정보석씨, 이진충 김동현씨 등 출연진들도 다수 자리를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보니 최수종씨가 선후배에게 대하는 태도가 참 겸허하고, 스스럼이 없었다.

그리고 촬영 일정이 밤낮을 가리지 않은데다,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는 대조영 역을 하기 위해 다이어트까지 심하게 하여,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불멸의 이순신' 김명민씨가 최근 루게릭병을 앓는 역을 맡아 몸무게를 20kg이나 감량하여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치열하게 맡은 일을 감당하니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를 듣는 게 아닌가 싶다.

'대조영'이 2007년 말에 종영되고 '쫑파티'가 KBS 별관 주변에 있는 고기집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 잠시 들러, 별다른 사고 없이 드라마가 끝나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국민들 사랑을 많이 받아 기쁘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정말이지, 사고 없이 끝나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대조영' 뿐 아니다. '불멸의 이순신', '서울 1945년' 등 전투장면과 폭발 장면이 많은 대하드라마의 경우 늘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게 된다. 대형 사고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리고 세트장이 '불멸의 이순신'(전북 부안)이나 '해신'(전남 완도)처럼 바닷가에 있고, 바다에 띄워 놓는 배도 여러 척이 되는 경우에는 태풍이 불거나 폭풍이 휘몰아쳐도 걱정이 된다.

'대조영' 쫑파티장에 가서 보니, 특이하게도 거란군 장수들은 거란군끼리, 당나라군 장수들은 당나라군끼리 따로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1년 이상 고락을 함께하면서 그런 동지적 유대가 생긴 모양이었다.

"1년 뒤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있을까"

2007 연기대상을 받은 '대조영'의 최수종씨에게 상패를 전달하는 정연주 사장. 맨 왼쪽은 하지원씨, 오른쪽 끝은 이날 시상식 사회를 본 탁재훈 씨.
▲ 2007 kbs 연기대상 시상식 2007 연기대상을 받은 '대조영'의 최수종씨에게 상패를 전달하는 정연주 사장. 맨 왼쪽은 하지원씨, 오른쪽 끝은 이날 시상식 사회를 본 탁재훈 씨.
ⓒ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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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로 오르기 전, 내게 건네진 2007 연기대상 수상자인 최수종씨 이름을 보자, 이런 지나간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환한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 위에 서서 객석을 보았다. 앞자리에는 2007년 한 해 동안 KBS의 드라마를 빛내준 연기자들이 앉아 있었고, 관객석은 드라마를 사랑하는 시청자들로 가득했다. 그 순간에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1년 뒤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있을까."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털었다. 어떻게 이룩한 민주주의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고난을 치르면서 이룩한 민주주의인데, 그 민주주의가, 특히나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그렇게 쉽게 망가지겠는가.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그 뒤 온갖 권력이 동원되는 광풍은 짐작조차도 못했다. 그만큼 나는 순진했던 것 같다. 나 뿐만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설마 했을 것이다. 수구 기득권 세력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강고한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주술이 실제로는 '잃어버린 권력의 10년'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되찾아오기 위해 얼마나 절치부심하며 집요했는지에 대해 순진했던 것 같다.

'바위처럼' 강조한 확대간부회의

대통령 선거를 엿새 앞둔 2007년 12월 11일.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확대간부회의가 열렸다. KBS의 임원과 팀장, 지역 총국장, 지역 국장 등 KBS의 간부들이 확대간부회의에 참석한다. (2004년 8월, 팀제 도입을 하기 전, KBS에는 1200개의 보직이 있었다. 팀제를 도입하면서 1200개의 보직 가운데 1천개를 없애고 200개 정도만 남겨뒀다. 보직을 잃은 상위직급 간부들만 저항을 했을 뿐 아니라 올라갈 자리를 잃어버린 일반 사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확대간부회의는 주요한 정책과 현안들을 회사 간부들에게 설명하고, 질의 응답도 아울러 진행한다. 그리고 확대간부회의는 사장 발언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날 나는 이런 말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정치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는 시기다. KBS의 정치적 독립성을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나는 바위처럼 나의 자리를 지킬 것이며, 내가 맡은 소임을 다하겠다. 여러분들도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나는 확대간부회의가 열리기 전, 그날 발언할 내용을 노트에 간단히 메모해 갔다. 그 메모 맨 끝에 이런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rock solid.
無我(무아)
下心(하심)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이었다.

"바위처럼 나의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뒤 넓은 회의실을 가득 메운 간부들의 표정과 분위기를 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 가운데서 특히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차아무개 센터장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KBS 안에서 공개적으로 나에 대해 온갖 험담을 해온 인물이었다.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태그:#정연주,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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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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