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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생의 출생 이후 서라벌에서 자취를 감춘 뒤에 '보건의료 취약지구'에서 '공중보건의' 생활을 하던 국선 문노(정호빈 분)가 하필이면 '신종플루'가 한창 유행하는 이 시점에 느닷없이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지고 서라벌의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컴백했다.

 

지난 8일의 <선덕여왕> 제32부에 방영된 문노의 컴백은 그냥 화려한 컴백이 아니라 '너무' 화려한 컴백이었다. 뭐에 그리 화가 났었는지, 문노는 화랑도 연병장을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며 '왕의 귀환' 아니 '국선의 귀환'을 요란스럽게 신고했다.

 

돌아온 문노가 국선으로서 처음 주관한 과제는 제15세 풍월주(대표 화랑)를 선임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상호 경쟁관계에 있는 김유신(엄태웅 분)과 보종(백도빈 분)이 후보 등록을 마치고 경합에 들어갔다. 

 

전체 3단계 중 제1단계에서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낭도 복장을 하지 않은 자가 몇 명이나 되더냐?"라는 '참으로 말 같지도 않은' 퀴즈에서 보종이 승리했고, 제2단계에서는 "신라의 국호에 담긴 세 가지 의미가 무엇이냐?"라는 문제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제2단계 문제의 해답을 출제자인 문노 자신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평소 그게 무척 궁금했던 문노가 이번 기회에 미실로부터 그 해답을 듣고 싶어서 그런 문제를 출제했다는 것이다.

 

물론 위의 내용은 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픽션에 불과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2단계에 이어 다음 단계인 제3단계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다 픽션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역사에서는 드라마 내용과는 정반대로 유신과 보종이 이러저러한 복잡한 단계를 거치지 않고 각각 제15세 및 제16세 풍월주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 정반대의 양상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를 통해, 제15세 및 제16세 풍월주의 선발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제15세 풍월주 선발이 있기 3년 전인 609년으로 소급한다. 이 시기에 신라 정계에서는 과도기적인 변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김서현을 필두로 한 가야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두드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589년 수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나타난 과도기 혹은 혼란기 양상을 틈타 역내 곳곳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정치적 약진을 거듭하는 분위기 속에서, 신라의 비주류인 가야세력도 그간의 정치적 성장을 바탕으로 중앙의 문을 노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가야세력의 약진을 반영하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609년에 발생했다. 서라벌 무대에 갓 입성한 김유신이 화랑도 부제(제2인자)이자 미실의 아들인 보종의 양보를 받아 부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별다른 하자 없는 보종을 제치고 유신이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인 스스로의 양보라는 형식을 통해 보종을 부제 자리에서 밀어내고 유신을 그 자리에 앉힌 힘은 대원신통파(왕비족)의 수장인 미실과 진골정통파(또 다른 왕비족)의 수장인 만호태후의 정치적 합작이었다. <화랑세기> 제15세 풍월주 김유신 편에서는 이를 두고 "이는 대개 (미실) 궁주가 태후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미실이 자신의 경쟁자이자 협력자인 만호태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태후의 손자인 유신에게 출세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당시 화랑도의 관행에 따르면, 부제가 된 화랑은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풍월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관행 덕분에, 유신은 제14세 풍월주인 호림(재임 603~612년)에 뒤이어 3년 뒤인 612년에 제15세 풍월주의 자리에 무난히 오를 수 있었다.

 

제15세 풍월주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유신은 아무런 경합을 거치지 않았다. 보종의 양보를 받아 부제에 오른 유신은 이번에는 호림의 양보를 얻어 무난히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무혈입성의 양상으로 풍월주 자리를 손쉽게 얻은 것이다.

 

이처럼 유신은 사실상 '거저먹기' 식으로 풍월주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는 당시 유신을 뒷받침하던 든든한 정치적 배경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드라마에 나오는 3단계 시험 같은 것은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풍월주가 되던 612년에 유신은 미실의 손녀인 영모와 정략결혼을 했다. 이 결혼 역시 미실과 만호태후 간의 정치적 합작품이었다. 이처럼 이 시기의 김유신은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럼, 보종의 경우에는 어떠했을까? 그는 어떻게 풍월주에 취임했을까? 보종이 제16세 풍월주의 자리에 오른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보종이란 인물의 가족관계등록부(옛 호적부)를 먼저 훑어보면 신라사회의 특이한 양상 중 하나에 접하게 될 것이다. 

 

진평왕(재위 579~632년) 집권 초기의 일이었다. 하루는 미실이 근무 중에 잠시 낮잠을 잤다. 그런데 그때 미실은 희한한 꿈을 꿨다. 하얀 양이 가슴 속에 들어오는 그런 꿈이었다.

 

이를 길몽 혹은 태몽이라고 생각한 미실은 곧바로 나이 어린 진평왕을 이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진평왕이 무드를 맞춰주지 못하자, 미실은 이번에는 급히 설원랑에게로 달려갔다. 그래서 생겨난 아이가 바로 보종이었다.

 

이런 경우와 관련하여 신라사회에서는 특이한 풍속이 있었다. 바로 마복자(摩腹子)란 제도였다. 마복자란 '배를 문질러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다. A(남자)와 함께 C(여자)를 공유하고 있는 B라는 남자가 A-C 사이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한 경우, 그 아들을 마복자라고 불렀다. 진평왕(B)과 설원랑(A)이 미실(C)을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어릴 때의 보종이 진평왕을 아버지라고 착각한 사실을 볼 때에, 보종 역시 진평왕의 마복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연 때문에 보종은 어려서부터 진평왕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장했다. 보종은 사실상 왕자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런 보종이 비록 미실의 명령 때문이기는 하지만 유신에게 화랑도 부제 자리를 순순히 양보했으니, 유신은 참으로 대단한 행운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유신에게 자기 자리를 쉽게 양보한 보종과 달리, 보종에 대한 유신의 태도는 이와는 좀 달랐다. 보종의 양보를 받아 부제에 오른 때로부터 3년 뒤인 612년에 풍월주에 취임한 유신은 처음에는 자신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보종을 거의 배려하지 않았다.

 

응당 보종을 부제 자리에 앉히려 했어야 하는데도, 유신은 그렇게 하지 않고 염장이란 인물을 부제 자리에 앉히려 했다. 하지만, 염장이 부제 자리를 고사하면서 보종을 적극 추천한 덕분에, 결국에는 보종이 풍월주 유신 밑에서 다시 부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후임인 유신에게 부제 자리를 내준 데에 이어 그 후임 밑에서 다시 부제가 되었으니, 보종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보종은 도리어 유신을 아버지처럼 대했다고 한다.

 

<화랑세기> 제16세 풍월주 보종 편에 따르면, 보종은 유신에게 "공(유신)은 천상의 일월(日月)이고 나는 인간의 작은 티끌"이라며 항상 자신을 낮추었다. 한편, 보종의 어머니인 미실 역시 유신에게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늘 당부하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서라벌 무대에 나타나 자신의 부제 자리를 빼앗고 나아가 풍월주의 자리에 오른 유신을 원망하기는커녕 항상 극도의 겸손함을 보이며 섬기는 자세를 견지한 끝에, 보종은 유신의 뒤를 이어 제16세 풍월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유신 때문에 몇 년 늦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리를 되찾은 것이다.

 

유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종 역시 풍월주가 되는 과정에서 별다른 경합을 거치지 않았다. 유신이 전임 풍월주로부터 무난하게 자리를 물려받았듯이, 보종 역시 전임 풍월주인 유신으로부터 무난하게 자리를 물려받았다. 드라마 속의 제1단계 시험에서처럼, 길옆에 서 있는 낭도들 중에서 가짜 낭도 복장을 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를 세어야 하는 공연한 번거로움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유신과 보종이 각각 풍월주의 자리에 오른 과정을 비교하면, 경합 없이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는 둘 다 똑같지만, 유신이 비교적 손쉽게 풍월주가 된 데에 비해 보종은 인내와 겸손의 과정을 거쳐 조심스럽게 풍월주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위와 같은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드라마 속의 상황과는 달리 실제의 풍월주 선발과정은 상당히 싱겁게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 후배 화랑들의 기를 바짝 눌러놓고 화려하게 컴백한 문노가 '말도 안 되는 문제'와 '출제자 자신도 해답을 모르는 문제'를 냄에 따라 '응시생'들이 골머리를 앓는 일은 실제로는 전혀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태그:#선덕여왕, #풍월주, #유신, #보종, #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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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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