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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서라벌 10화랑 중 하나인 알천(이승효 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서라벌 10화랑 중 하나인 알천(이승효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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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관계 의리 지키는 '알천', 기록에는 어떻게?

낭도 복장을 벗어버리고 왕관을 향해 도전을 선언한 덕만(이요원 분)을 따르는 네 남자가 있다. 유신, 알천, 비담, 월야가 그들이다.

저마다 제각각의 개성이 있는 이들 네 남자 중에서, 굵직한 중저음 목소리와 훈훈한 마음 씀씀이를 바탕으로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 등장인물이 있다. 바로 화랑 알천(이승효 분)이다.

일종의 기득권세력이라 할 수 있는 서라벌 10화랑 중 하나인 비천지도의 리더인 알천은 처음에는 '시골뜨기' 김유신과 용화향도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취했지만, 속함성 전투 때의 동고동락을 계기로 주류 화랑들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비주류인 유신과 과감히 손을 잡았다. 또 유신의 낭도인 덕만과도 끈끈한 상호 신뢰를 쌓아 나가다가 덕만이 공주라는 사실이 판명된 뒤에는 과감하게 덕만에 대한 충성의 길을 선택했다. 

덕만에 대한 충성심의 밑바닥에 사적인 애정이 깔려 있는 유신과 비교할 때에, 알천의 경우에는 그런 사적 감정 없이 '무엇이 타당한가'에 대한 자기 나름의 판단에 기초하여 덕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덕만의 네 남자 중에서 가장 순수하게 군신관계의 의리를 지키는 사람은 알천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드라마 <선덕여왕>에 묘사된 알천의 행적과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픽션의 결과물이다. 요즘에는 작가의 상상에 더해 시청자 혹은 누리꾼들의 상상까지도 드라마 대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시청자들이나 누리꾼들의 호응과 요구에 따라 앞으로 알천과 관련된 픽션이 얼마나 더 '농도'를 더하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역사 기록 속에 나타난 실제 알천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행적을 간략히 정리한 다음에 그의 이미지를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진골 신분의 소유자로 추정되는 알천은 생몰연대를 알 수 없는 인물로서, 선덕여왕 시대(632~647년)에 군공을 바탕으로 대장군의 위치에 오르고 진덕여왕 시대(647~654년)에는 상대등의 위치에 올랐다가 진덕여왕 사후에 섭정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김춘추(재위 654~661년)를 왕으로 추천한 인물이다.

이상의 프로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근거한 것이다. 위작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는 알천의 이름이 단 1회 언급된 것을 제외하고는 그에 관한 정보가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일차적으로 알천이 풍월주(대표 화랑)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이차적으로는 그가 화랑으로서는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거나 아니면 <화랑세기> 저자가 보기에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인물로 비쳤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미지를 추출하려면 기존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존 사서에 반영된 알천의 이미지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서는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기민한 정세판단 능력 보유

첫째, 알천은 기민한 정세판단능력을 보유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특성은, 선덕여왕 말년(647년)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독자노선 즉 반란을 선택한 비담과 달리 김유신 편에 서서 진덕여왕을 옹립한 사실과, 진덕여왕 사후(654년)에 관료들이 자신을 섭정으로 추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실세인 김춘추를 왕으로 적극 추천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647년과 654년의 정세변화에서 공통적인 점은 신진세력이라 할 수 있는 김춘추 가문과 김유신 가문의 정치적 승리였다. 폐위된 진지왕(재위 576~579년)의 피가 흐르는 김춘추 가문과 가야의 피가 흐르는 김유신 가문은 둘 다 정치적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지만, 여성 국왕이라는 이유로 역시 콤플렉스를 안고 있던 선덕여왕과 연합하여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다가 선덕·진덕 두 여왕의 죽음을 거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다.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정치적 승리와 직결되는 두 건의 정세변화 때에 알천은 변함없이 승자 쪽을 선택했다. 647년에는 반역자 비담과 정반대의 선택을 내림으로써 진덕여왕 시대를 여는 데에  기여했고, 654년에는 '왕위계승권자가 없을 때에는 상대등이 왕의 역할을 한다'는 기존 관행에 따라 자신이 섭정으로 추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들뜨지 않고 실세인 김춘추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구(舊)세력인 자신과 달리, 김춘추-김유신 같은 신(新)세력이 뜨고 있던 당시의 정치 흐름을 잘 읽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관료들이 실세인 김춘추를 놔두고 알천을 섭정으로 추대한 진짜 동기는 알천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순위 계승권자인 알천을 강압적으로 배제하고 김춘추를 추대하는 것보다는 알천이 스스로 물러나고 김춘추가 자연스레 등극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게 김춘추의 집권에 이로웠기 때문이다. 알천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제 내게도 기회가 왔구나'라며 들뜨지 않고 스스로 '현명한' 선택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주요 고비 때마다 기민한 정세판단능력을 발휘하여 신진세력인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손을 들어준 실제 알천의 모습은, 서라벌 기존 화랑들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가야 출신인 김유신을 선택하고 또 당장에는 별로 가망이 없어 보이는 '버려진 공주' 덕만을 선택한 드라마 속 알천의 모습과 상당히 일치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호랑이가 뛰어들어도 태연

둘째, 알천은 용맹성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일차적으로 635년에 독산성에 잠입한 백제군을 기습적으로 격파한 사실, 638년에 칠중성(지금의 파주시 적성면)에서 고구려 군대를 격파한 사실 등에서 잘 드러난다. 백제·고구려를 상대로 모두 다 전승(戰勝)을 거둔 것이다.

알천이 용맹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전쟁터뿐만 아니라 평상시의 사례에서도 나타났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진덕왕 편에 따르면, 진덕여왕 때에 권력 핵심부인 알천·임종·술종·호림·염장·유신 6인방이 남산 오지암에서 국사를 논의하고 있을 때에 갑작스레 큰 호랑이가 나타나 좌중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때 김유신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다 혼비백산하여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유독 알천만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하게 이야기를 하며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어쳐 죽어버렸다고 한다. 

참고로, 위의 <삼국유사> 권1 '기이'에서는 진덕여왕 시대의 권력핵심부가 위와 같이 6인방이라고 한 데에 비해, 위작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제14세 풍월주 호림 편에서는 위의 6명에 보종을 더한 칠성우(七星友)라는 그룹이 존재했다고 알려주면서 그중 호림(제14세 풍월주)은 국사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주고 있다.

위와 같이 전쟁터에서 백제·고구려 모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사실이나, 호랑이를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도리어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죽여 버린 일화는 알천이 상당히 용맹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용맹성은 드라마 속에서는 그다지 분명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용맹하긴한데 지도력은 글쎄...

셋째, 알천은 리더십이 취약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위에 소개한 사실관계들 가운데에서 2개의 팩트를 거꾸로 뒤집어봄으로써 명확히 드러난다.

신라 권부의 핵심인사들이 모인 자리에 느닷없이 뛰어든 호랑이를 손으로 죽인 사실은 신라인들의 감탄을 사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화가 <삼국유사>에까지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알천의 이 같은 용맹성은 결코 리더십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호랑이를 죽인 뒤에 알천의 완력에 감탄한 여러 참석자들이 알천을 상석에 앉히기는 했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은 다음에는 다들 "김유신의 위엄에 심복"할 따름이었다고 <삼국유사>는 말한다.

<삼국유사>의 필자가 알천의 용맹성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다가 "모두 다 김유신의 위엄에 심복했다"는 '엉뚱한' 결론으로 끝맺은 것은, 알천이 용맹한 데에 비해서는 그릇이 작은 인물이었음을 암시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알천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알천은 용맹하기는 하지만, 지도자로서는 부족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사례 가운데에서 알천의 리더십 부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바로 진덕여왕 사후(654년)의 킹메이킹 과정이다. 자신을 섭정으로 추대하는 조정의 분위기에 휘말리지 않고 실세인 김춘추를 추대한 것은 그의 기민한 정세판단능력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그의 리더십 부재를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려하다 할 수 있는 군 경력을 가진 데에다가 권력계승 1순위인 상대등의 지위에까지 오르고도 스스로 김춘추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알천이 겸손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알천이 자신의 위상에 걸맞은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리더십을 구축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신분·경력·관직·용맹성 등)을 갖고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알천이 리더십의 부재라는 체질적 약점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속의 알천이 처음에는 유신·덕만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가 나중에는 유신과 대등해지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유신의 부하였던 덕만의 신하가 되어버린 것도 알천의 리더십 부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드라마 속에서처럼 목소리가 듣기 좋고 마음씨가 훈훈하며 충성심이 순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 속의 알천은 정세판단능력이 기민하고 용맹성이 탁월했지만 리더십은 상당히 부족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맹성 여부만 제외하면 드라마 속의 이미지와 역사 속의 이미지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태그:#선덕여왕, #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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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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