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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을 밝힌 빛

 

90년대 중반, 경주 분교에 살 때다. 그곳 분교는 폐교된 지 오래되어서 전기가 끊겨 있었다. 독가촌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저수지 옆에 자리하고 있어, 낮에는 학교 앞으로 동민들이 다녔지만 밤이 되면 사람 발자국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적막강산이었다.

 

캄캄한 밤, 촛불 아래서 책을 읽다 마음에 한기가 찾아오면 나는 늘 분교 옆 저수지로 가곤 했다. 둑 위에 올라가면 저수지 너머로 불을 밝힌 마을이 보인다. 동네 길을 비추고 있는 붉은 보안등과 어느 집에서 컹컹컹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쓸쓸한 내 마음을 조금 어루만져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둑 위에 누워 파란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래였다.

 

사막에서의 달과 별도 그럴 것이다. 낮의 피곤을 텐트 안에서 달래며 나그네가 바라보는 밤하늘의 달과 별은 정신과 육신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오아시스였을 것이다. 거친 폭풍우 그 끝에 만나는 등대는 생명을 인도하는 빛이었을 것이다. 캄캄한 새벽, 아픈 배를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은 구원 그 자체였을 것이다.

 

빛은, 늘 어둠을 밝힌다.

빛은,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빛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18일, 이 땅의 민주주의의 상징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던졌던 그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날 오후 인터넷을 통해 서거소식을 접한 나는 아! 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죽음이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그는 '내 몸의 반이 떨어져 나갔다.' 라고 했다. 그랬을 것이다.

 

(나라 밖에서는 큰 인물인 그는 그러나 나라 안에서는 늘 찬밥 신세였다. 특히 권력과 언론은 시간만 나면 협공작전을 펴 그를 국민들 밖으로 내모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그 결과 우리는 눈 뜬 당달봉사와 무뇌로 죽는 그날까지 그를 미워했다.)

 

두 사람이 추구해온 정치철학과 사상은 하나였다. 민족을 하나로 묶는 큰 그림을 그린 두 사람. 지역타파가 그랬고,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신념이 그랬고, 힘과 무력이 아닌 상생과 화해, 그리고 평화 통일이 그랬다.

 

탄생 그 뒤에 오는 소멸은 생명의 진리다.

시작 그 뒤에 오는 끝은 만고의 진리다.

 

행동하는 양심

 

그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가는 그날까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활화산같이 태우고 그는 떠나갔다.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앎의 궁극은 실천이듯 그의 한평생은 실천하는 양심이었다. 그가 평생 붙잡은 주제는

 

민주주의 ▲ 동·서 화합 ▲ 남녀평등 ▲ 인권신장 ▲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

 

그런 그를 두고 죽어서도 따라다니고 있는 꼬리표가 있다. 이북의 체제를 도운 빨갱이. 좌파의 우두머리. 국론을 분열시킨 선동가. 도대체 몇 십 년인가? 바위를 통째로 삶아서도 벌써 몇 번은 허물어졌을 것이다. 시효가 없는 그 말에 세뇌당한 우리는 눈 뜬 장님이었고 무 뇌로 살아왔다.

 

물론 세뇌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속아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 생각해보면 선동가들은 힘을 가진 그들이었다. 하여 지난 세월 앞에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마음의 빚이 많은 것이다. 이제 진실로 그에게 진 빚을 갚을 시간이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이제는 변해야 한다. 시효가 지난 엉터리 약을 가지고 다시는 국민을 상대로 재탕 삼탕 앵무새처럼 지껄여서는 안 된다. 우리 역시 그런 엉터리 약에 두 번 다시 속아서는 안 된다. 

 

보라!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정보가 인터넷에서 춤을 추고 있다. 권력과 언론이 함부로 정보를 독점한 채 우리를 좌지우지하지 못한다. 저 정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우리인 것이다. 21세기는 그냥 21세기가 아니다.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21세기는 통합의 시대다. 이념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이념의 늪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리고 발상을 뒤엎어야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고의 틀에서 과감하게 빠져 나와야 한다. 21세기는 1인칭과 2인칭 삶이 아닌, 3인칭 삶을 붙잡고 고뇌를 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

 

행동하는 양심, 그는 이제 갔지만 그가 남긴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가 평생 붙잡았던 주제를 실천하는 일이다. 민주주의와 동서화합,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 그 주제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쳐놓은 장벽과 울타리를 이제 걷어내어야 한다.

 

▲이념의 벽 ▲경쟁시장주의 ▲물질지상주의 ▲지역갈등

 

이 벽과 울타리를 걷어내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잡을 수 있다.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 그가 떠나면서 남기고 간 숙제를 실천하는 길이 남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피 맺힌 심정으로 나는 말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십시오.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태그:#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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