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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역사에서 '뉴미디어'가 아닌 매체는 없었다. 20세기 초 라디오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사람들은 오늘날 인터넷에 대해 말하는 것과 똑같이 흥분하고 과장된 예언을 했다.
 인류 역사에서 '뉴미디어'가 아닌 매체는 없었다. 20세기 초 라디오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사람들은 오늘날 인터넷에 대해 말하는 것과 똑같이 흥분하고 과장된 예언을 했다.
ⓒ 오마이뉴스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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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는 아주 기괴한 언어다. 특별히 선택된 소수의 무언가를 지칭하는 듯하면서도 사실상 모든 미디어를 지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뉴미디어'가 아닌 매체는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라디오를 '뉴미디어'라고 부른다고 해 보자. 대다수 사람은 '라디오의 어떤 면이 새로울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저 친구 머리의 어떤 면이 모자랄까(혹은 낡았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라디오는 '뉴미디어'라고 부르기에 너무 낡아 보인다. 왜일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상호작용'이라는 말을 떠올릴 것이다. 라디오는 '소통'이나 '교환'이 아닌 '전달'용 매체가 아닌가. 실제로 나치독일의 대국민 홍보에서 보듯, 역사가들은 대개 라디오를 '선전매체'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라디오로 '국민과의 대화'를 하는 지도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매체는 '대화'보다는 '독백'에 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라디오는 분명히 '상호작용 매체'였다. 100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라디오가 세상을 바꾼다"

20세기 초의 신문과 잡지를 뒤져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디오가 세상을 바꾼다', '첨단 신기술 라디오가 가져올 미래', '라디오로 세계는 하나가 된다'는 식의 내용이다('라디오의 출현으로 인류는 화성인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도 있다).

'뉴미디어'가 출현할 때마다 세계는 변함없이 흥분하고, 또 변함없이 과장된 예언을 내놓았지만, 라디오는 분명히 놀랄 만큼 민주적 가능성을 내포한 '뉴미디어'였다. 그리고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이 가능성이 실현되었다.

라디오가 발명된 직후 가장 널리 쓰였던 용도는 개인을 위한 원거리통신이었다. 아마추어무선사(햄)를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영화에서나 가끔 볼 수 있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아마추어무선은 라디오의 주된 용도였다. 라디오가 방송매체가 된 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그러나 라디오의 위력을 눈치챈 미국정부는 1912년 '라디오법'을 만들어 라디오의 개인적 사용을 제한하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보안'을 이유로 국가가 라디오를 독점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수의 기업들에 라디오 전파를 독점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주었다.

이렇게 해서 라디오는 국가 선전매체인 동시에 상업적 대중매체가 되었다. 라디오는 '말하는' 능동적 매체에서 '듣는' 수동적 매체로 퇴보한 것이다. 국가의 개입과 상업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지 않은가? 라디오에 이어 텔레비전, 그리고 인터넷이 같은 길을 걸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말이다. '비극'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한국의 인터넷 상황이 희극적인 건 분명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포럼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익명성·탈중심성·탈규제' 등의 특성으로 인해 '이제 모두가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의 성공 비결을 '뉴미디어'와 '신기술'에서 찾을 수 있을까?
ⓒ 오마이뉴스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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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좀 수그러졌지만, 인터넷은 거의 예외 없이 '민주적 가능성'과 결부되곤 했다. 쉽게 말해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며, 그것도 '민주적'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터넷에 '내재된' 특성 때문이라는 것이 학계의 신나는 설명이었다. 이 특징은 '익명성·탈중심성·탈규제' 등이다.

과연 그런가? 한국의 인터넷이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가? 소수 포털이 독점한 인터넷 환경이 '탈중심'적인가? 규제가 어려운가?

흔히 인터넷을 단수의 고유명사('the Internet')로 표기한다. 그러나 인터넷은 하나가 아니고, 모두 같지도 않다. 무수히 많은 '인터넷들'이 있으며 이들은 같은 성질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인터넷의 민주적 가능성'에 비추어 사회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뉴미디어'보다는 그 매체를 받아들인 사회를 면밀히 고찰하는 것이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더 큰 도움이 된다. '기술이 어떻게 사회를 바꾸는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가 어떻게 기술을 바꾸는가'다.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제 모두가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흥분했다 (아직까지 흥분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다). <오마이뉴스>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추기 시작하자, 전 세계의 학자들은 '뉴미디어의 가능성이 실현된 사례'라고 분석했다. 그리고는 같은 일이 세계 전역에서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타자기가 모든 이들을 작가로 만들지 않았듯, 인터넷은 모든 이들을 기자로 바꿔놓지 않았다.

<오마이뉴스>의 '올드미디어'적 전통

나는 <오마이뉴스>로부터 신기술의 특성이나 가능성보다는 한국사회의 특징과 전통을 발견한다. 마치 <오마이뉴스>라는 첨단의 미디어가 '잉걸'이나 '생나무' 같은 한국 고유의 나무꾼 용어로 소통하듯 말이다.

<오마이뉴스>는 한국의 두 가지 매체적 특성을 계승하고 있다. 종이 대자보와 국민 주주 신문 <한겨레>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던 시절, 시민과 학생들은 커다란 종이와 매직펜으로 소통했다. 그 시절, 대자보는 '뉴미디어'는 아니었을망정, 더없이 훌륭한 '민주적 매체'였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종이와 펜이 발명되었을 때 그것은 엄연히 '뉴미디어'였다).

물론 정부·회사·학교의 당국자들은 틈만 있으면 게시물을 떼어내고 글쓴이를 색출하려 했다. 지금 인터넷에서 하듯 말이다. 역시 역사는 반복되는 모양이다.

한국사회 민주화를 '종이의 매체적 특성'이나 '주주의 조직적 특성'에서 찾을 수 없듯, <오마이뉴스>의 성공 비결을 '뉴미디어'와 '신기술'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다. 이것은 무엇보다 피로 싸우고, 땀으로 글을 써 온 시민들에게 더없이 무례한 일이다. <오마이뉴스>의 존재가 말해주는 바는 여전히 한국의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시민들은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틀림없이 성공적인 실험이었다. 이것이 '실험'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성공'이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여기 우리의 몫이 있다. 어떤 신기술도 시민들의 참여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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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와 <미디어기호학>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