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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재일오사카인'으로 규정하는 재일한국인 3세 조박씨.
 자신을 '재일오사카인'으로 규정하는 재일한국인 3세 조박씨.
ⓒ 조박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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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할 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다. 그런데 "나는 한국 사람도, 일본사람도 아닌 재일오사카인"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재일한국인 3세가 있다. 음악가, 1인극 배우, 작가,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는 조박(趙博, 53)이 바로 그 사람이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재일한국인'이라는 일반적인 용어의 사용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성을 따른 조(趙)와 일본식으로 지은 이름 박(博)에 그 답변의 비밀코드가 숨어있다.

재일한국인 100년의 한(恨)

조박은 지난 7월 16일부터 26일까지 호주의 네 도시를 순회하면서 4개 대학에서 강연과 함께 공연을 했다. 시드니에 있는 뉴사우스웨일즈대를 시작으로 캔버라의 호주국립대, 멜버른의 모나쉬대, NSW주의 뉴잉글랜드대이다.

강연 주제는 '재일한국인 100년의 역사'였다. 재일한국인 정착 100년을 맞아 호주일본학회 소속 휴 페란티 교수와 앨리슨 토키타 교수가 그를 초청했다. 그들은 일본 방문 중에 조박의 강연과 공연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공동연구자로 초빙했다.

조박은 호주에 머무는 동안 ARC 디스커버리 프로젝트 '1930년대 오사카의 음악과 현대성'의 공동연구자로 활동했다. 그는 오사카 재일한국인 집단거주지역인 '이쿠노구 한인커뮤니티'를 소개하면서, 거기에 얽힌 '재일한국인 100년의 한(恨)'을 노래로 불렀다. 또한 조박은 올해 안에 휴 페란티 교수와 공동집필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논문의 작은 주제로 '재일한국인 100년과 전쟁의 상관관계'를 다룬다. 재일한국인의 역사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1·2차 세계대전 등을 포함한 전쟁들의 산물이라는 것.

조박이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100년으로 추산한 것도 러일전쟁과 연계된 일제강점기와 함께 재일한국인의 한(恨)도 시작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오사카 지역으로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 중에는 그의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지만, 조박의 장인 장모가 '제주 4.3항쟁' 와중에 일본으로 밀항했으니 그의 가족사는 전쟁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런 그가 왜 일본식 이름인 '박(博)'을 사용하는 것일까? 그에게 한국식 이름은 없는 것일까?

NSW대학교 학회에서 한국민요를 소개하는 조박.
 NSW대학교 학회에서 한국민요를 소개하는 조박.
ⓒ 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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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사카인입니다"

조박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 두 가지.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와 "나는 오사카인입니다"라고 고집하는 이유였다. 넌지시 두 번째 질문부터 던졌다.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나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반목하고 싸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내가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100년 동안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도 갈등과 전쟁의 피해자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7월 26일 오후, 시드니 하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조박은 그 대목까지 답한 다음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서 짙은 그늘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환하게 웃을 때도 그 그늘은 지워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게 한국인이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일본인이냐고 묻습니다.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일본이 나에게 외국인으로 등록하도록 강요하고 제도적으로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조박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지면서 답변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나는 오사카인입니다.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난 100년 동안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은 재일한국인들을 냉랭하게 외면하면서 방치해 버렸습니다."

'다리'를 건너서 '임진강'으로

답변은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26일 밤, '오사카의 거인 조박의 노래와 이야기 한마당' 무대에서 그가 나머지 답변들을 이어갔다. 겨울비가 내리는 일요일 밤에 공연장을 찾아온 시드니동포들과 호주사람들을 위해 한국어와 영어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은 것.

그는 자작곡 '다리'로 무대를 열었다. 수많은 다리로 유명한 오사카 도시의 상당 부분을 한국인 노동자들이 만들었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그래서 그곳에 김치냄새가 나는 동네, 지금은 '코리아타운'이라고 불리는 '조센징마을'이 생겨났다고.

두 번째 곡은 북한 노래 '임진강'이었다. 조박은 "임진강은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서정적인 노래인데, 북한노래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40년 동안 취입조차 불가능했지만 재일한국인들과 진보적인 일본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라고 소개했다.

'다리'를 절규하듯이 소리쳐 부른 것과는 달리 '임진강'은 비교적 잔잔하게 불렀다. 1절은 한국어, 2절은 일본어, 3절은 영어로. 그는 노래를 마친 다음 "작년에 일부러 임진강과 휴전선을 관광했다"고 말했다.

그는 밥 딜런의 포크송에 이어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로 무대를 이어갔다. 히바리의 노래를 부르기 전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한국인이었지만 그녀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지금도 일본의 스포츠 스타와 유명 연예인들 중에 한국인임을 숨기는 케이스가 많다"고 말했다.

'오사카의 거인 조박의 노래와 이야기 한마당' 시드니 공연 모습.
 '오사카의 거인 조박의 노래와 이야기 한마당' 시드니 공연 모습.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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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박이 자신을 오사카인으로 규정하는 이유

조박은 김민기의 '가뭄'을 부르면서 "1980년대에 한국의 저항가요를 열심히 배웠다"면서 "그즈음에 일본에서는 외국인에게 지문날인을 강요했는데, 그걸 거부한 많은 재일한국인이 체포됐고 약 600명이 고발당했다"고 밝혔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차별받는 재일한국인과 아이누의 역사로 이어졌고, 같은 맥락으로 미국에서 차별 당했던 흑인 인권운동가 말콤 엑스의 비극적 생애를 소개하는 1인극 연기로 전환됐다.

무대의 열기를 최대한 고조시킨 조박은 '타향살이'를 처연한 음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마침내 자신을 오사카인으로 부르는 이유를 털어놓았다.

"사람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고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국가라는 이름으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죽자 사자 싸웁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성도 상실하고 행복도 날아가 버립니다. 내가 아나키스트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진정으로 평화롭게 살고 싶으면 국가를 배경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주지역에서 이웃끼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재일오사카인, 재일고베인, 재호시드니인처럼 거주지역의 주민으로 살아야 타향도 고향이 되고 싸움도 멈추지 않을까요."

말콤 엑스에 투영된 조박의 기구한 운명

그 무엇이 되고 싶었지만, 재일한국인이기에 포기해야 했던 조박은 어쩔 수 없이 일인다역의 삶을 살았다. 2004년에 조박을 소개한 KBS-TV <한민족 리포트> 프로그램에는 조박이 '노래하는 키네마' 형식을 빌어서 말콤 엑스의 생애를 재연하는 모습이 나온다.

빈한한 노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무학(無學)이어서 글조차 읽지 못했다. 그는 아들이 대학에 가려 하자 "조선인이 대학에 가면 무슨 소용인가?"라며 말렸다. 이는 공부 잘했던 흑인 말콤 엑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변호사를 꿈꾸자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말콤, 그건 불가능한 꿈이야. 차라리 목수가 되어라. 흑인에게 목수는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예수도 목수의 아들이었잖니. 네가 흑인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라."

어엿한 인물(somebody)이 되고 싶었지만 보잘것없는 인간(nobody)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재일한국인들의 삶이 말콤 엑스의 비극적 생애에 아프게 투영된 것은 아주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비극보다는 파토스(pathos, 페이소스)가 짙게 묻어나는 희극을 연기하고 싶어 한다.

조박은 고베 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간사이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문학 석사를 취득해 간사이대학교 강사로 활동했다. 그런 그가 교수의 꿈을 접고 음악인이 된 것은 재일한국인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4개 국어에 능통해 잘나가는 영어 학원 강사가 됐다.

조선북을 부서지라고 두들기면서

조박은 한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하다. 호주 순회강연과 공연도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진행했다. 26일 밤에 열린 시드니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공연장을 찾은 호주 현지인을 위한 배려였다.

기타를 들고 1부 공연을 마친 조박은 2부 공연 전에 호주공영방송 SBS라디오 한국어 프로그램 담당자와 인터뷰를 했다. 공연장을 찾지 못한 한인동포들을 위해 호주 전역으로 방송되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

북을 들고 나온 조박은 2부 순서를 시작하면서 '아리랑' 4곡을 연이어 불렀다. 일제강점기의 영화 <아리랑>에 삽입된 주제가,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그가 영어로 아리랑에 얽힌 내용을 설명한 것은 호주 현지인을 위한 배려였고, 북을 들고 나와 민요와 판소리를 부른 건 한인동포를 위한 배려였다.

그는 민요를 부르면서 연신 북을 세게 두들겼다. 탁한 음성에서는 한국인 특유의 한의 정서가 묻어났고, 그가 뽑아내는 민요들은 북소리에 실려 한민족의 예술로 승화됐다. 특히 영화 <서편제>에 삽입된 '사철가'를 부를 때는 청중이 박수를 치면서 호응했다.

북을 치면서 한국민요를 부르는 조박.
 북을 치면서 한국민요를 부르는 조박.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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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라고 거짓말한 벌이다"

26일 밤 공연을 끝낸 후 27일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그에게 나머지 한 개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는 뒤풀이 시간밖에 없었다. 한나절 동안 이어진 인터뷰와 2시간 남짓한 공연으로 조박은 약간 지친 모습이었다. 뒤풀이 장소에서 맥주 몇 잔을 들이켠 조박은 "열흘 동안 호주의 반쪽을 도는 일정이어서 조금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한국인과 호주인이 함께 어울린 뒤풀이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그는 예상 밖으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름에 얽힌 과거사를 털어놨다. 영태라는 어릴 적 이름이 갑자기 박(博)으로 바뀐 사연이었다. 그중 가족사에 얽힌 내용을 빼면, 일본이 역사가 100년이나 된 재일한국인들에게 아직도 외국인등록을 강요하는 차별정책으로 귀결된다. 어쩔 수 없이 외국인등록을 하면서,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된 것.

<한민족 리포트>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키 180cm의 거구. 성은 한국 성을 따른 조(趙), 이름은 일본식으로 지은 박(博). 재일한국인이 가장 많은 오사카에서 나고 자라 20살까지 한국인임을 속이고 살았던 조박."

조박은 강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 유도를 했다. 그러나 전국대회를 앞두고 한국인임이 들통 나는 것이 두려워서 출전을 포기했다. 학생 대표로 뽑히던 날, 경쟁했던 일본학생들로부터 집단 괴롭힘(이지메)을 당한 다음 그는 한국인으로 커밍아웃을 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나는 일본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일본학생들의 폭력은 견딜 수 있었지만 민족적인 모욕은 참을 수 없었다. 일본인이라고 거짓말한 벌이다. 지금부터라도 본디의 나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지금은 일본에서 차별받는 모든 소수자의 애환과 희망을 노래하는 '거인'이 된 조박. 그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지속적으로 노래운동을 하는 이유는 재일한국인의 한을 달래고 차별정책을 공론화하기 위해서다. 일본의 소수자, 주변인, 열패자들은 대부분 재일한국인이지만 가난하고 소외당한 일본인 노동자들과 유난스레 차별당하는 여성들도 이에 포함된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는 개츠비가 본심과 다르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박이 "나는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닙니다. 그냥 오사카인입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그 장면이 자꾸 오버랩됐다. 그러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표현하는 반어법적 넋두리일 뿐. 재일한국인 2세로 한국전통무용 이수자인 아내의 춤사위와 조박이 토해내는 한국민요의 가락에서 다음과 같은 환청이 들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래요, 오사카인들은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조박의 홈피 '황토통신'.
 조박의 홈피 '황토통신'.
ⓒ 조박 홈피 초기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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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박, #재일한국인,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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