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보테로전이 열리는 덕수궁미술관 입구에 대형포스터. '죽마를 탄 광대들' 2007. '기대여 있는 여자' 청동 2002(아래). 1973년부터 보테로는 조각가로 변신한다 작가가 원하는 만큼의 양감을 평면회화만으로 다 표현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테로전이 열리는 덕수궁미술관 입구에 대형포스터. '죽마를 탄 광대들' 2007. '기대여 있는 여자' 청동 2002(아래). 1973년부터 보테로는 조각가로 변신한다 작가가 원하는 만큼의 양감을 평면회화만으로 다 표현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展이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오는 9월 17일까지 열린다. 2천년대 근작중심으로 회화 89점, 조각 3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정물과 고전해석, 라틴의 삶, 라틴사람들, 투우와 서커스, 조각 순으로 구성되었다.

보테로는 1932년 브라질과 접한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험준한 산악지역을 조랑말로 행상하는 상인이었으나 페르난도가 4살 때 돌아가셨다. 빈한할 수밖에 없어 보테로는 처음부터 그림을 할 생각은 못했다. 그래서 한때 숙부의 권유로 투우사학교를 다녔다.

16살에 메데인미술연구소가 주최하는 미전에서 2점의 수채화를 출품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지역신문에 삽화도 그린다. 이때부터 멕시코벽화운동에 관심을 가지더니 보고타국립미대에 진학한다. 그 후에는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도 공부한다. 

그는 서구미술을 근본적으로 의심했고 회화의 기본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미술보다 특징적인 각도에서 그리는 이집트미술에 더 관심을 쏟고 이를 미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이번 전을 기획한 류지연 학예연구사가 귀띔해 준다.

중남미의 관점에서 미술사를 다시 쓰다

'벨라스케스를 따라서' 캔버스에 유채 205×176cm 2006
 '벨라스케스를 따라서' 캔버스에 유채 205×176cm 2006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보테로는 세계미술사를 중남미적 관점에서 다시 쓴다. 색채는 그래서 중남미풍이고 조형은 단순하다. 서구에서 근대이후 강조한 개성을 없앤다. 그래서 얼굴에 표정이 없다. 그리고 육덕(肉德)을 강조한다. 이런 발상의 대전환으로 그만의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속 마르가리타공주는 원래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이나 여기선 기형적으로 큰 몸집에 뚱한 표정, 비정상적으로 작은 얼굴로 그린다. 보테로는 이렇게 날씬한 것은 세련되고 뚱뚱한 것은 촌스럽다는 도식을 깨고 세련되고 장엄한 서구미술의 위세와 오만에 일침을 가한다.   

195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풍만하고 볼륨(量感)있는 뚱보그림으로 그는 20세기 미술사조와 상관없이 최고의 거장이 된다. 1961년 작 '모나리자 12세'가 16년이 지난 후지만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건 그를 세계적 작가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폭소'로 서구회화를 해체시킨 미술혁명가

'루벤스와 아내' 캔버스에 유채 203×173cm 2005. '얼굴' 캔버스에 유채 203×170cm 2006
 '루벤스와 아내' 캔버스에 유채 203×173cm 2005. '얼굴' 캔버스에 유채 203×170cm 2006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얼굴'이나 루벤스의 1609년 작품을 패러디한 '루벤스와 아내'는 귀엽고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팽팽한 얼굴에 '눈·코·입'이 우스꽝스럽게 한데 쏠려 있어 폭소를 자아낸다. 형태의 왜곡으로 신체미를 새로 규정하고 서구적 잣대를 비균형과 비전형으로 대체시킨다.

그의 이런 뚱보그림은 이렇게 문턱 높은 미술관과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의 벽을 넘게 하고 누구나 쉽게 미술을 즐길 수 있게 만든다. 신비한 모나리자를 발랄하고 통통한 소녀로, 범접할 수 없는 미의 여신을 옆집여자로, 위세 당당한 여왕을 보통아줌마로 변화시킨다.

그는 이렇게 폭소로 서구회화를 해체하고 세계미술의 혁명가로 우뚝 선다. 자신이 혁명가임을 "어떤 면에서 예술가의 가치는 비동조성이나 반항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영속적 혁명의 상황에 위치할 수 있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서구식 유행을 걷어내고 라틴식 배경을 놓다

'남자와 여자' 캔버스에 유채 75×94cm 2001. '애인들' 캔버스에 유채 153×98cm 2003
 '남자와 여자' 캔버스에 유채 75×94cm 2001. '애인들' 캔버스에 유채 153×98cm 2003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서구식 연애는 몸보다는 돈으로 이루어지기 십상이다. 남자는 여자와 섹스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버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랑은 원래 단순하고 자생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여기 라틴식 육덕사랑은 인간적이고 해학적으로 보인다.

보테로는 위에서 보듯 모든 작품에 자신이 어려서부터 본 고향산천과 중남미적 정서가 깃들기를 바란다. 중남미의 긍지를 가진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라도 확인하려 한 것인가. 작가의 추억과 경험이 어린 배경이라 그런지 관객에게 더 친근감을 준다.

여기 연애하는 모습은 요즘 같은 이해 타산적 사랑이나 불쾌감을 주는 관음증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서구인들이 보이는 죄의식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랑의 본질은 묻는 것인가 아니면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괴롭지만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림

'자살' 캔버스에 유채 168×109cm 2006
 '자살' 캔버스에 유채 168×109cm 2006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이 작품은 제목은 무거운데 상황은 오히려 코믹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자살하려는 걸까? 남녀문제인가 돈 문제인가 아니면 정치관련 문제인가. 하긴 우리가 남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 작가는 삶을 사랑하기에 당면한 이런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화폭에 그대로 옮긴다.

작가가 여기에 드러내놓기 꺼리는 이런 소재를 다루는 건 단지 그 예방보다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고, 그 근본적 원인을 찾아 이 세상 사람들이 더 편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대안을 촉구하는 그런 의도를 담은 것이 아닌가.

중남미의 현실을 사회적 풍속화에 담다

'거리' 캔버스에 유채 200×139cm 2000
 '거리' 캔버스에 유채 200×139cm 2000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거리'를 보면 보테로가 삶의 리얼리티를 직시하는 작가임에 알 수 있다. 팍팍한 민중의 사회적 전기를 풍속화로 압축시킨다. 군부독재 속에서 서로 염탐하고 감시하는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동네사람들이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보인다.

여긴 사회계층을 대표하는 7명이 나온다. 다 희화적으로 그려졌다. 사회와 종교의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경찰과 수녀, 돈과 권력을 휘두르며 으스대는 고위층인사, 이들의 눈초리는 감시자처럼 차갑다. 길 한복판엔 모자(母子)가 지나간다. 반면 위층에서 고객을 기다리는 창녀나 할일 없이 문 앞에 서성이는 남자는 같은 처지인 것 같다.

그의 작품 중엔 무고한 시민이 집에서 체포되어 경찰의 곤봉을 맞고 끌려가는 국가폭력에 대한 관한 것도 흔하다. 같은 맥락인지 보테로는 2003년 바그다드교외 '아부그라이브'수용소에서 미군들이 이라크포로들을 잔혹하게 가해한 사건에 분노해 그 '연작'을 발표한다.

권력이 되어버린 종교에 대한 풍자

'잠자는 추기경' 캔버스에 유채 151×202cm 2004. '신학교' 캔버스에 유채 151×193cm 2004
 '잠자는 추기경' 캔버스에 유채 151×202cm 2004. '신학교' 캔버스에 유채 151×193cm 2004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여기서 보면 추기경이나 신학교의 모습은 그렇게 사회의 빛과 소금의 몫을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중남미에도 "가난한 자들의 울음소리가 신의 목소리"라고 말한 카마라 신부나 보프 신부처럼 예언자 전승에 충실한 성직자나 신학자도 있다. 허나 소수일 것 같다. 하여간 작가는 특정교파를 떠나 종교전반에 대해 비판한다.

어떤 종교든 제도권권력이 되면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그 효력을 잃게 된다. 우리나라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불교도 고려시대에는 귀족화되면서 타락한다. 예수마저도 당시 '회당체제'로 주름을 잡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라는 종교권력집단에 의해 신성 모독죄로 몰려 십자가에 죽지 않았던가.

아무리 삶이 고단해도 춤과 음악과 여흥은 필수적

'음악가들' 캔버스에 유채 182×119cm 2006. '춤' 다인종다민족이 너무나 아름답게 어울린다. 캔버스에 유채 151×202cm 2002
 '음악가들' 캔버스에 유채 182×119cm 2006. '춤' 다인종다민족이 너무나 아름답게 어울린다. 캔버스에 유채 151×202cm 2002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보테로의 작품에는 춤과 연주자그림이 유난히 많다. 콜롬비아에서는 걷는 것을 배우기 전에 춤부터 배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런 것이 삶 그 자체다. 라틴댄스는 전 세계적으로 그 열풍이 대단하다. 그리고 중남미에서 춤이란 다인종국가의 장벽을 뛰어넘어 소통하고 사회통합을 이끄는 언어이기에 이를 중시하고 많이 그린 것 같다.

이런 여흥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삶에 생기를, 작가에게는 창작에 영감을 줄 것이다. 보테로는 모 외국방송과 인터뷰에서 당신은 왜 볼륨 있고 중량감 넘치는 그림을 일관되게 그렸냐고 묻자, 작가는 일찍 여읜 아버지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동경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바로 그런 삶의 회환을 이런 작품 속에서 녹이고 승화시킨 것이리라.

이 작가의 두 영웅인 투우사와 광대

'피카도르' 캔버스에 유채 200×134cm 1992. '하얀 옷을 입은 광대' 캔버스에 유채 140×100cm 2008
 '피카도르' 캔버스에 유채 200×134cm 1992. '하얀 옷을 입은 광대' 캔버스에 유채 140×100cm 2008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이제 끝으로 이 작가의 영웅이자 분신인 투우사와 광대를 소재로 한 작품을 보자. 둘은 삶을 진지하게 관조하는 모습이다. 보테로가 그린 유일한 '자화상(1992)'도 투우사복장을 하고 있다. 작가 자신도 나의 그림은 못 다한 투우사의 소명을 대행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렇듯 스페인이나 중남미에서 투우는 스포츠가 아니라 예술이다. 죽음과 대면하여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숭고한 인간영웅의 퍼레이드이다. 그리고 또한 그런 난관을 의연히 극복하며 극적인 장면을 창출하는 투우사는 그 속성에서 예술가나 철학자를 닮았다. 하여간 보테로의 작품이 바로 그런 기질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싶다.

덧붙이는 글 | 보테로展 홈페이지 http://botero.moca.go.kr/index.jsp 라틴아메리카의 다양한 문화를 살펴보기 위한 <릴레이 강연회>와 라틴 아메리카의 뜨거운 정열과 마술적 리얼리즘을 영화로 만나볼 수 있는 <2009 라틴영화제> 등이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다. 요금은 10,000원~8,000원 유아는 4,000원 월요일 휴관.



태그:#보테로, #뚱보그림, #벨라스케스, #중남미미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