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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철거민변호인단' 권영국 변호사.
 '용산철거민변호인단' 권영국 변호사.
ⓒ 권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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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국 변호사는 '용산철거민변호인단'에서 활동하지만, 용산 철거민을 위한 변호는 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법정에 선 지 벌써 세 달이 다 되어가고, 아예 변론 자체를 거부한 지도 두 달이 넘었다.

지난 4월 22일 열린 용산참사 사건 첫 공판은 울음바다였다. 황희석 변호사가 고 윤용헌씨의 아들 현구군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읽는 동안, 방청석에서는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권 변호사는 재판을 준비하면서 이미 두 번이나 편지를 읽었고 그 때마다 울었는데도, 법정에서 다시 한 번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변호사로서 제일 감정들이 개입하는 사건들이 생존권 다툼인데, 나에겐 이번 용산 참사가 결정판이었다"고 말했다. 차분하게 변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아픈 사건. 그러나 참사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이 '눈물의 공판'을 끝으로 용산 재판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변호사법 1조 1항에 나와있는 대로...

권 변호사의 전문 분야는 '철거'가 아니다. '노동'이다. 89년 풍산금속 파업을 주도한 뒤 그해와 91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3년6개월 징역살이를 했고, 200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첫 사건은 발전노조 파업 법률지원이었다. 한달반 가까이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노동자들이 연행됐고, 권 변호사는 전화로 이들을 접견했다. 당시 경찰은 "현장에 복귀하면 풀어주고 계속 파업하면 입건한다"면서 조합원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노동위원장이다. 요즘에는 비정규직법안에 대한 법률적 의견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투쟁사업장에 대한 상담도 많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의 휴대폰이 여러 차례 울렸다. 비정규직 노조의 문의전화다. 그는 "개별적으로 대응하면 내부에서 무너져서 힘들어집니다"고 귀띔했다. 

노동법 전문 변호사가 용산으로 간 것은 그 참사가 "변호사면 누구나 문제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참사 당일, 그는 사고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해 말부터 촛불시민들에 대한 강압통치가 강해져서 '이러다가 크게 사고가 나겠다' 싶었지만, 서울 도심에서 이런 대형 참사가 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두려웠다.

민변은 회원들에게 변호인단 모집 이메일을 띄웠고, 그는 변호사법에 따라 용산철거변호인단이 됐다. 그가 알려준 변호사법 1조1항은 다음과 같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권영국 변호사가 인터뷰 도중 잠시 전화로 비정규직 노조에 법률 자문을 하고 있다.
 권영국 변호사가 인터뷰 도중 잠시 전화로 비정규직 노조에 법률 자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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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4구역 철거현장. 지난 4월에 찍은 모습이다.
 용산 4구역 철거현장. 지난 4월에 찍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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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비밀의 3천쪽

이번 사건에서 검찰의 수사기록은 모두 1만여 쪽. 검찰은 이 가운데 김석기 당시 경찰청장 등 진압작전 지휘라인의 진술이 담긴 것으로 알려진 3천쪽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명예훼손 및 사생활 침해 우려,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그 이유다.

증거를 바로 앞에 두고도 볼 수 없는 변호사들의 마음은 구속자들 못지않게 답답하다. 권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서는 공권력의 적법성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에 (경찰 지휘자들의 진술이 담긴) 수사기록 3천 쪽에 실마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 변호사는 "검찰이 그렇게 자신 있으면 공개해도 될 텐데 굳이 저렇게까지 숨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끝까지 공개를 못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그 3천쪽 안에 담겨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밝히는 것이 변호사의 임무"라고 말했다.

결국 지난 5월 14일 변호인단은 재판기피를 신청했다.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었다. 원래 재판기피 신청은 군사독재 시절, 시국사건으로 잡혀온 '사상범'이 법정에서 고무신을 던지며 스스로 재판을 거부할 때나 있던 일이다. 권 변호사도 재판기피 신청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변호인단의 의지로 재판기피 신청을 했다. 법원에 대항하는 것이 재판에서 불리하다는 것은 당연히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불공정한 재판에 협조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 결과가 피고인에게 유리할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끝내 '물음표'가 남아서" 내린 결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 믿고 있을 구속자 가족들을 생각하면 권 변호사는 늘 죄짓는 기분이다. 변호사가 왜 변론을 안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몇몇 가족들은 그에게 "아직도 변론 안 하냐"고 물어보곤 한다. 오히려 구속자들은 "사건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재판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변호인단 결정을 지지한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마음의 짐이 있기 때문이다.

길 위의 변호사, 그는 지금 아프다

용산 재판은 못 나가지만, 길에는 나간다. 용산참사 추모문화제 무대에도 오르고, 검찰수사 규탄 기자회견에도 나가는 '현장파'다. 요즘은 기자회견 현장에서 수난이 많았다. 지난 5월 14일 '용산참사 검찰수사 규탄 기자회견'과 지난달 26일 '쌍용차 해결 법률전문가 기자회견'에서 그는 두 차례나 경찰에 연행됐다. 두번째 연행됐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밥을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권 변호사는 "법정에 서는 것만이 변호사의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권 옹호', '정의 실현'이라는 변호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터진 뒤 법정에서 대응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난 5월 14일 권영국 변호사가 팔이 꺾인 채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지난 5월 14일 권영국 변호사가 팔이 꺾인 채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 김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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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권교체 이후 사법부의 보수화 경향을 생각하면 용산 재판은 승소 가능성이 높지 않다. 법정에서 또 길에서 아무리 외쳐도, 권 변호사는 끝내 인권을 옹호하지 못하고 승률만 떨어질 수 있다.

그는 그래도 용산을 포기하지 못한다. 왜? "이 정권의 가장 비인간적 모습이 드러났고, 다른 많은 문제를 함축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더니 "그런데 이건 멘트용이다"고 덧붙인다. 속마음은 따로 있다. "아파서" 그렇다.

"장례도 못 치르고 유랑자처럼 떠도는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못 그만 두겠어요. 그 때 법정에서 읽은 편지에서 정말 와닿던 내용이 '용역깡패들이 욕설하고 행패를 부려서 경찰에 신고하니까 출동한 경찰은 뒷짐을 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절망감…. 아, 이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구나, 얼마나 절망했을까…. 그 생각하면 끔찍해요."


태그:#용산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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