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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초여름,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는 아무 고민하지 않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것도 우등버스에. 여행지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전날 인터넷으로 봐둔 여행지 '무릉계곡'을 점 찍어두긴 했지만 사실 별 의미는 없었다. 우등버스 에어컨은 성능이 좋아서 바깥 쨍쨍한 더위 따위는 쉽게 잊을 수 있었다. 버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버스기사를 제외하고 손으로 헤아려보니 열 명 남짓. 휴가철도 아닌 평일에 강원도행 버스를 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헤드(Radiohead)나 콜드플레이(Coldplay), 고찬용, 김광석, 유재하의 노래를 들었더랬다. 누군가는 꽉 막힌 사무실에서 컴퓨터, 보고서와 씨름하고 있겠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좌석에 머리를 기대기만 해도 잠이 쏟아졌지만 이 날은 달랐다. 때때로 이어폰을 빼고 바깥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고, 버스 타기 전에 미리 준비해둔 김밥을 꺼내 오물오물 입 속에 넣어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가방에서 '한겨레21'이나 '시사in'같은 잡지를 꺼내 흥미로운 기사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동해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는 다시 한 번 무릉계곡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때는 정오를 막 넘어 뜨거운 오후로 달려가고 있었다. 허름한 버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이 덥고 사나웠지만 기분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초여름의 어느 평일, 낯선 도시에서의 허름한 버스 구석에 앉은 나는 마치 다른 세계로 진입한 우주인이 된 것 같았다.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을 깃털이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대로, 그냥 그렇게. 온 몸에 힘을 쭉 빼고서.   

숙박업소와 상점이 즐비한 계곡 입구는 한산했다. 멀뚱멀뚱 여기저기 바라보다가 제일 큼지막한 모텔로 들어가 방 하나를 잡았다. 비수기여서인지 방값을 비교적 싸게 받았다. 짐을 풀고서 창문을 열었다. 밖은 산과 시퍼런 하늘로 가득했다, 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상점과 숙박업소뿐이었다. 그래도 담배 하나를 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사방은 시꺼멓게 조용했다. 하나 둘 그리고 셋, 다시 하나. 숫자를 세다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떠보니 오후 세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더는 주저할 수 없어서 짐을 꾸리고 계곡으로 나섰다.

세월아, 네월아! 발길 닿는 대로

무릉계곡 입구
 무릉계곡 입구
ⓒ 노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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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오백 원 하는 입장권을 구입하고 입구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올라갔다. '국민관광 제1호로 지정된 이곳 무릉계곡은 청옥산과 두타산을 배경으로 어쩌고저쩌고∼.' 무릉계곡 소개 문구가 쓰인 팻말을 띄엄띄엄 보았지만 도무지 글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다 읽는 건 포기했다.

입구 근처 강 위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실은 그보다는 그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저씨가 더 눈에 띄었지만. 땅에 쓰인 해독 불가능한 한자들을 정확히 이십초 가량, 그것도 예의상 봐주고는 냅다 발걸음을 돌렸다. 나처럼 팔자 좋은 청년 몇 명, 언제나 유쾌한 아줌마 부대가 멀리서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들은 어디까지 갈까. 참, 나는 어디까지 가야하지? 무릉계곡이 목표였나, 아니면 산 정상이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 때부터 세월아 네월아, 목적 없는 내 산행이 시작되었다. 하이얀 거품 내며 맑게 흐르는 물을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강 한 가운데 놓인 커다란 바위 몇 개를 발견하고는 도대체 저건 누가 저기다 갖다 놓았는지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고민해 보기도 했다. 좁은 길에서 이따금 유쾌한 부녀회 아주머니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나에게도 기꺼이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산에서는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그 당시에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갈래 길이 날 유혹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이리로 가면 뭐가 나오고, 또 저리로 가면 뭐가 나오려나. 내가 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거대한 기계 속에서 잘 조여진 톱니바퀴처럼 자란 이들에게 이런 여정은 더욱 각별하다.

서점의 어학 코너 직원으로, 출판사 편집부 막내 직원으로, 중소 신문사의 일개 취재기자로. 강원도 철원 모 부대의 일반 병사로, 4년제 대학 문예창작과의 어수룩한 학생으로, 한 가정의 아들로, 누군가의 오빠이자 불편한 짐으로.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의, 무언가의 무엇으로 다듬어졌다. 모나지 않게, 튀지 않고 최대한 중간만 하고 싶었지만 언제든 나는 구석으로 몰리거나 밖으로 쫓겨났다. 다들 사는 만큼만 산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본 후부터 낯선 여행지에서 매혹적인 여자와의 만남을 꿈꾸었다. 정해진 것도 없고,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은 여정에서의 특별한 인연이란 언제나 짜릿한 일 아닐까. 물론 끝도 없이 울퉁불퉁 놓인 산길의 곳곳을 거닐다가 그럴듯한 연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보이는 이라고는 머리 빡빡 깎은 남정네와 걷는 것도 힘겨운 노부부,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언제나 유쾌한 아주머니 관광객들뿐이었다. 물론 예쁜 여자를 만났다 치더라도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할 숙맥에 불과하지만.

무릉계곡 용추폭포
 무릉계곡 용추폭포
ⓒ 노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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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대충 걸어 알 수 없는 폭포를 만났다. 쉬고 있는 노부부에게 물어보니 용추폭포라고 했다. 생각보다 크기가 작아 실망하다가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기가 민망해 습관적으로 담배 하나를 물었다. 어른들 눈치가 보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갔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는 폭포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무언가 느껴보려 했지만 뭐랄까, 도무지 느껴지는 게 없었다. 역시 생각 없이 오면 안 되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평평한 바위를 찾아 누워버렸다. 신발도, 바지도 젖어들었지만 별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평일 오후에 강원도의 어느 계곡 앞에서 누워 담배를 피우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꿈인가, 아니야, 아니야, 현실이야.

타들어가는 꽁초를 꺼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알람을 맞춰놓으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삼십 분이든 몇 분이 됐든, 잠시만 누워있고 싶었다. 2009년 6월이나 7월. 아니면 그 이후. 조그만 방안이나 사무실에 갇혀 잘나빠진 여름휴가나 기다리고 있을 내가 아마도 이 순간을 몹시도 기억하겠지. 기껏해야 기름칠 잘 해 상사한테 잘 보이거나 누군가를 위해 일하고 있을 나는 아마도 이 순간을 평생 그리워할지 모른다.

온 몸을 감싸 도는 빛이 느껴졌다. 좀처럼 식지 않는 빛살들은 내 곁에 한참동안이나 머물렀고, 눈을 뜨려고 할 때마다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조금 더 누워 있어도 돼. 지금은 온전한 네 시간이야.

덧붙이는 글 | '2009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



태그:#무릉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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