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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락별의 '위 빌리브'
ⓒ 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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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좁은 방에서 당장 어떻게 (슬픔을) 표출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엔 장난인줄 알았단다. 동생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핸드폰 문자를 받았을 때, 락별(본명 김성만·29)은 여느 때처럼 음반작업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 강북구 수유동 4·19 삼거리 부근 작업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부엌까지 합해 7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은 보증금 300만 원에 월 22만 원을 내는 작은 옥탑방이다.

자신의 잠을 깨우려고 동생이 장난을 치는가 싶어 다시 잠을 청했는데, 이번엔 친구로부터 같은 내용의 문자가 왔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TV를 켰고, 인터넷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실감이 됐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먹다 남은 소주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마신 술로 그는 금세 취기가 돌았다.

"기타가 늘 바로 옆에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손이 갔고, 작업실에는 언제나 녹음이 가능한 기본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노래가 녹음이 돼 있더란다. 다시 한번 연주를 해서 정식으로 녹음을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1995년 부산시장 선거 유세 중)라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육성 연설도 집어넣었다. 그렇게 노 전 대통령의 추모곡 'We Believe'가 만들어지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쯤 되니까, 이 노래를 혼자 듣기보다는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과 들으면 더 의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의 사진을 찾아 동영상을 만들었다. 이날 점심 때 만들어진 노래가 밤 늦게야 세상에 공개된 것은 이 영상 작업 때문이었다.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UCC는 금세 슬픔에 빠진 누리꾼들의 입소문을 탔고, 1주일 만에 100만이 넘는 조회수를 올릴 만큼 대표적인 노 전 대통령의 추모곡으로 떠올랐다.

울트라컨디션. 락별(왼쪽)과 헤드
 울트라컨디션. 락별(왼쪽)과 헤드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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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컨디션?... 기타리스트는 바텐더, 드러머는 타워크레인 기사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를 이틀 앞둔 8일 오후, 수유동에 있는 락별의 작업실을 찾았다. 좁은 부엌을 지나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면에 걸려있는 대형 태극기가 여느 작업실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기타, 앰프, 노트북, 마이크 등의 음반 설비만 없다면 흡사 독립운동가의 방을 연상케 할 만하다.

사방 벽은 다시 알록달록한 대형 커튼과 검은색 방음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소리가 구석에서 울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이다. 소리를 한 곳으로 모아야, 정확한 음감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장비를 갖춘 녹음실이나 대형 기획사에 딸린 작업실이 아닌, 인디밴드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2003년 결성된 '울트라컨디션(ULTRACONDITION)'은 '디스코트럭', 'AD18-292413', 'SF'에서 활동해온 락별(보컬·기타)을 중심으로 '타카피', '치킨헤드' 등을 거친 기타리스트 헤드(본명 조성준·28)와 '랜드라라', 'BBLT' 출신의 드러머 주노(본명 김준호·31)로 구성된 3인조 록밴드다.

락별이 음반작업을 하기 위해 이 작업실에서 '칩거(?)'를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방송국이나 기획사, 음악사이트 등에서 일을 해 1년치 월세를 벌면, 음반작업을 시작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일을 하고… 이렇게 반복되는 생활 역시 인디밴드의 '숙명'이다.

다른 멤버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침 작업실에 있던 헤드는 서대문에 있는 한 바에서 7년째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70가지 이상의 칵테일 제조법을 외우고 있을 만큼 전문가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뭐니뭐니해도 기타리스트다.

"바텐더를 하는 것도 음악을 하기 위해서다. 다른 직업에 비해 음악하는 데 지장을 덜 준다. 밤에 일하기 때문에 낮에 활동하기도 편하고…."

그는 "울트라컨디션은 메시지 전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그룹"이라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보다 우리가 경험했던,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이번 추모곡에도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가 노랫말에 모두 담겨있다"고 말했다. 헤드는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출근해야 한다"면서 서둘러 작업실을 나섰다.

주노는 한 달째 강원도 속초에서 타워 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다. 크레인 기사 일을 시작한 지는 1년이 넘었다. 락별은 "생활이 힘들어서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연습을 쉬는 것은 아니다"며 "주노는 크레인 위에서도 드럼 스틱을 잡고 있다"고 귀띔했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다시 만나는 'We Believe'

울트라컨디션(락별)의 옥탑방에서 바라본 도시의 전경
 울트라컨디션(락별)의 옥탑방에서 바라본 도시의 전경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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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안타까워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락별이 만든 추모곡으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락별은 오히려 "제가 더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저만큼 슬퍼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게 저에게는 더 큰 위로가 됐다"는 것이다.

락별은 추모곡 'We Believe'를 만든 이유에 대해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맞이하게 된 것은 독재자 한 명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며 "존경하는 대통령 한 사람의 죽음 이상으로, 이런 사회가 되도록 방관했던 것에 대한 자책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추모곡에는 "단순히 (슬퍼서) 우는 것에 끝나지 않고, 이런 아픔을 겪음으로써 더 단단해져서 좋은 날이 올 때까지 버티자는 희망을 담고 싶었다"고 한다. 락별이 'We Believe'에서 강조한 '믿음'도 같은 맥락이다.

"노 전 대통령의 결백함도 포함될 수 있겠고, 언젠가는 이런 안 좋은 일이 없어지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날이 온다는 것을 믿겠다는 광범위한 의미다."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맞춰 쏟아진 여러 추모곡들이 자신(밴드)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홍보용이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각도 있다. 하지만 락별은 웃는다.

"13년째 음악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로 머리가 좋았으면, 아직까지 이런 옥탑방에 있겠나? 아마도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지 않고, 대중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노래를 많이 했겠지. 우리는 록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TV에 나오는 '아이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 음악을) 10명보다 100명이 들으면 당연히 만족감이 커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10명이 들으나, 100명이 들으나 큰 차이가 없다."

락별에게 '노무현'은 어떤 의미일까?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이다. 상고 출신이고, 시골에서 아무런 기반 없이 시작했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산다면 자기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분이다. 아마도 내 상황과 결부되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웃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슬퍼한다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이 정말 멋진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아쉽게 가시지만, '정말 멋진 삶을 살았다'고 엄지 손가락을 내보여주고 싶다."

'노무현의 정신'은 남겠지만, 언젠가는 '노무현'도 그의 추모곡도 잊힐 것이다. 그런데 락별은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단다.

"그랬으면 좋겠다. 노 전 대통령의 아쉬운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울분이나 슬픔은 가슴에 모두 담아놓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빨리 잊혔으면 좋겠다. 슬픔은 가슴에 묻을 뿐 계속 슬퍼할 수만은 없지 않나. 이런 노래를 다시 듣지 않아도 될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락별은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조했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는 "사회에 무관심하고, 바쁘게 살고 있지만,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개개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돌아간다"며 "그때 가서 세상 탓해봐야 변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이 세상에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락별이 만든 추모곡은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추모제에서도 불렸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 49재가 끝난 뒤, 그는 다시 무대에 설 예정이다. 울트라컨디션은 오는 12일 오후 6시 30분 경기 고양시 장항근린공원에서 열리는 고양시민 추모콘서트 '천 개의 바람이 되어'에 출연한다. 물론 출연료는 받지 않는다.

락별은 "사람들이 아직 그 노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참여하기로 했다"며 "우리들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울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울기만 하는 무대는 아니다. 기존에 사람들에게 알려진 추모곡에 '희망'을 덧붙여 만든 새로운 버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 노래는 울면서 끝난다. 그래서 마지막에 희망적인 부분을 추가했다. 아마도 '사람사는 세상 올 거라고 우린 믿어요'라는 정도의 내용이 추가될 것이다. 슬픈 노래에서 끝나지 않고, 희망을 노래했으면 좋겠다."

한편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추모콘서트에서는 락별의 'We Believe' 외에도,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씨를 비롯해 조관우, 안치환, 노찾사, 김용우, 권진원, 우리나라, 네바다51, 백창우와 굴렁쇠아이들 등을 만날 수 있다.

이번 공연은 고양시민추모위원회가 주관하고, '고양파주 노사모'와 '고양파주 문함대'가 공동 주최하며, 고양 시민광장과 고양지역시민사회연석회의가 후원한다. 시민들이 주축이 되다보니, 입장료를 받지 않는 무료 공연이긴 하지만 공연에 들어가는 최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소액의 '자발적 후원금'을 받는다.

덧붙이는 글 | 공연 후원 계좌 : 국민은행 194601-04-093058 , 예금주 이경혜(고양시민 추모위원회)



태그:#울트라컨디션(락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천개의 바람이 되어, #노무현 전 대통령 49재, #'WE BELI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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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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