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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셀므 브와-비브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셍-피에르 홀 외부 전경
 앙셀므 브와-비브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셍-피에르 홀 외부 전경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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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몽마르트 언덕을 올라가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평탄한 길을 조금만 따라가면 왼쪽 모퉁이에 생-피에르 홀이라는 화랑 겸 서점, 간이 카페점이 나온다. 이전엔 상설시장이었던 곳이 지금은 다용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현재 '앙셀므 브와-비브'(Anselme Boix-Vives)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독특한 이름은 듣도 보도 못했던 이름이다. 파리라는 거대한 문화 도시에서는 무명화가의 전시도 유명 화가의 전시 못지않게 자주 열리고 있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전시회를 보러 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어야 가능한 법. 기자가 이 무명화가의 전시회를 찾은 것은 이 화가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다.

전시회장 입구에 붙여있는 전시회 포스터 (제목: 할아버지 1967)
 전시회장 입구에 붙여있는 전시회 포스터 (제목: 할아버지 1967)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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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어느 '낯선' 화가의 전시회

평생을 과일상으로 일했던 노인이 은퇴를 1년 앞둔 63세에 아내를 병으로 잃는다. 갑자기 삶의 의욕을 상실한 그는 아들에게 잘 나가는 가게를 물려주고 할 일 없이 부엌에서 시간을 허송하고 있었다. 때마침 친구처럼 찾아온 천식이 그를 붙잡고 괴롭혔다.

이렇게 상태가 좋지 않은 그에게 아들이 그림을 그려볼 것을 권했다. 생전에 제대로 된 붓 한번 잡아보지 않았던 노인은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리냐"고 질색했지만 결국 아들의 권유에 넘어갔다. 그런데 소일거리로 시작했던 그림에 그는 광속도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사망하기 전까지 7년 동안 2400여 점의 그림을 그려냈다.

그림의 그자도 모르는 노인이 7년 동안 혼신을 다 바쳐 그린 그림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의 그림은 마치 옛날 이야기에나 존재할 듯한 것들이었다. 원시인들이 현란한 색채를 둘러 입고 마치 민화처럼 우리에게 환한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그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앙셀므 브와-비브
 앙셀므 브와-비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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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출신의 목동, 63세에 화가가 되다

앙셀므 브와-비브는 1899년 1월 3일, 스페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교라고는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고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동물들을 키우며 목동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18세가 되던 1917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로 이주해 온다. 돈 한 푼 없이 맨몸으로 프랑스 땅을 밟은 그는 알프스 지방에 정착하여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면서 밥벌이를 한다.

이렇게 푼푼이 모은 돈으로 알뜰히 절약한 결과 그는 1928년 29세의 나이로 알프스의 무티에라는 마을에 작은 과일가게를 연다. 하루도 쉴 새 없이 일한 결과 그의 과일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그는 이런 생활 속에서 3남 1녀를 넉넉하게 키워냈다.

이런 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노년에 이르러서였다. 63세가 되는 해, 아내가 병으로 사망하고 때마침 찾아온 천식으로 가게 운영도 불가능하게 되자 그는 아들에게 가게를 넘겼다. 은퇴를 1년 앞두고서였다. 평생을 소처럼 일만 하면서 살았던 그에게 (그는 생전에 자신이 하루에 48시간을 일해 왔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삶이 갑자기 텅 빈 공터를 부여한 것이다.

그의 3남 중 당시 미대에 다니고 있던 아들 미셸이 아버지에게 소일거리로 그림을 권했다. 가끔 젊었을 시절, 가게의 영수증 뒤에 그림을 끼적거렸던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잡게 된 붓, 이로 인해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전시회장 내부
 전시회장 내부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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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가게에서 열린 첫 전시회... 유명화가로

가게 뒤에 위치한 작은 부엌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붓을 움직이는 노인에게서 쏟아지는 그림은 굉장했다. 그림에 입도한 그해, 그의 첫 번째 전시회가 아들이 운영하는 과일가게에서 열렸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단골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는데, 이들은 이 뜻밖의 선물에 당황해했다. 이제까지 전혀 본 적이 없었던 희한한 그림이었기 때문에 집안에 걸어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파리에서 미대에 다니고 있었던 아들 미셸은 아버지의 그림을 파리 화랑가와 미술계에서 일하고 있던 지인에게 보여주었다. 이 그림들은 즉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됐고, 쉬르 레알리스트(초현실주의)의 대부인 작가 앙드레 브르통의 눈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특히 그의 고무 수채화 그림에 관심을 가진 브르통은 1963년 그에게 편지를 보내 그림을 계속 그리라고 권유하고는 다음해인 1964년에 그의 그림을 구입한다. 이 그림은 그의 쉬르 레알리스트 잡지의 창간호 표지에도 등장하게 된다.

그의 그림에 관심을 표한 사람은 더 있었다. 파리의 화랑계 인사 드니즈 브르토는 1964년 3월 자신의 화랑에서 브와-비브의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주관한다. 이어 두 달 후에는 스위스 베른느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다. 브와-비브가 무명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잘 팔리는 화가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창백한 예수 1964, 고무 수채화
 창백한 예수 1964, 고무 수채화
ⓒ 앙셀므 브와-비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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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그려진 기 1967, 유화
 개가 그려진 기 1967, 유화
ⓒ 앙셀므 브와-비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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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브와-비브의 느낌은 어땠을까.

"그림을 돈 주고 산단 말이지? 아니 어느 바보가 내 그림을 돈 주고 산단 말이야?"

화랑계에서 알아주는 화가가 된 뒤에도 그는 유명세를 내지 않았다. 1965년부터 그는 리폴린(Ripolin)이라는 건축 페인트 재료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들이 운영하는 과일 가게 옆의 페인트 가게 주인이 팔리지 않는 페인트 통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이 절로 그려진다"

초기에 그는 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스페인의 카탈란느(카탈로니아) 산악지대와 이후 프랑스에 정착해서 살게 된 알프스의 산악지대에서 본 야생화와 야생동물을 화폭에 옮겼다. 학교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고 다른 화가의 그림을 본 적도 없는 그에게서 샘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림은 그가 평생 관심 있게 보고 관찰해왔던 자연경관과 성당 내부의 장식과 그림에서 소재를 취했다. 그의 그림은 성경 속의 인물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데 스페인 카탈란느 지방의 로만식 성당의 중세기 문화와 프랑스 알프스 소성당의 바로크 문화를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소화시켜 재현시키고 있다.

인간의 내적인 세계를 독특하게 그려내고 있는 그의 그림은 '원시예술'(art primitif) 혹은 '원생미술'(art brut, 다듬어지지 않은 예술)로 구분되는데 그의 야생화 그림은 또 다른 원시 예술 화가인 세라핀 드 상리스(Seraphine De Senlis)의 그림과 희한하게도 닮았다. 하녀 출신의 세라핀도 그처럼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신의 계시를 받고 그려진다고 말한 바 있다. 브와-비브도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이 저절로 그려져 나온다고 말하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프로이드나 쉬르 레알리스트 작가들은 우리 인간의 머리에 무의식 상태로 간직되고 있는 인류 최초의 흔적과 기억에 관심을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맨발로 걸었을 때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이나 뼈에 붙어있는 고기의 살점을 이빨로 뜯어먹을 때 기분 좋은 느낌이 나는 것은 우리 몸에 인류 초기 선조들의 습관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원시 예술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시 예술을 하는 작가들의 그림 속에서는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삶의 초기 상태와 꿈이 여러 가지 색채와 모형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파리이기에 가능한 화가 브와-비브의 '발견'

푸른 꽃 1964, 고무 수채화
 푸른 꽃 1964, 고무 수채화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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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예술과 대중예술을 본능적으로 시각화 하는데 성공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인간 심리현상의 충동적인 부분을 잘 묘사한 브와-비브.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림이 달리(Dali) 그림과 비교되고 원시 예술이니 원생 미술 등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7년 동안 오로지 혼신을 바쳐 그림에 몰두해서 2400여점의 그림을 남긴 그는 1969년 사망한다.

그의 사후 40년을 기념하여 파리 생-피에르 홀에서 그의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는데 3월 23일 시작된 전시회는 8월 21일까지 지속된다. 파리 시내의 알랭 마르가롱(Alain Margaron) 갤러리에서도 5월 14일부터 7월 4일까지 동시에 그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알랭 마르가롱에서는 정기적으로 그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그의 그림값은 최고 2만 유로에 달한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그림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해도 그림에 대한 열정과 재주만 있으면 어느 날 갑자기 60세가 넘은 나이의 노인도 화가가 될 수 있는 나라 프랑스. 문화의 역사가 길고 그 폭이 두텁기에 가능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 작성에 도움을 주신 생-피에르 홀의 프레스 담당자인 올가(Olga)와 알랭 마르가롱 화랑의 마르가롱씨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마르가롱 화랑에서 발간된 <앙셀므 브와-비브, 세계의 정비> 책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태그:#앙셀므 브와-비브, #파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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