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산상수훈(山上垂訓)

수경에게,
이제부터 꽤 긴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그대에 대한 나의 호칭부터 정해야겠군.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어. 막상 호칭을 정하려니까 한국인들의 호칭 관습은 예나 지금이나 빈곤하다는 생각이 드네. 특히 여성에 대한 호칭이 더욱 그런 것 같아. 그대의 이름에 직함을 붙여 정중히 조 수사관이라고 불러야 할지, 또는 고전적인 서양식으로 미스 조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대의 이름을 허물없이 불러 수경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자못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어.

이윽고 나는 감히 마지막 것을 선택하기로 했어. 수경의 이름을 곧장 부르기로 한 것이지. 다만 나는 수경에 대한 나의 친근감이 비례(菲禮)로 비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것이 타인에 대한 비례라는 점을 밝히고 싶어. 이런 말을 해 놓고 보니, '나는 살인을 참을 수는 있지만 비례를 용서할 수는 없다'고 한 범죄자, - 토머스 해리스의 소설 <양들의 침묵>에 등장하는 렉터 박사- 를 내가 흉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우리의 첫 만남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어. 나에게 상투적인 표현을 허락한다면, 우리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수경을 비행기에서 만나 얼굴을 보고 직접 대화를 나누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 미상불 수경은 난데없이 내 자리로 찾아들었지. 그렇게 찾아든 수경은 나의 '사업'에 모종의 운명적인 예감을 부여했어.

그의 비망록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비망록대로 조수경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기내에서였다. 그때 조수경은 뉴욕 발 인천 행 대한항공의 일등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미국 메릴랜드에서 연방수사국(F.B.I.)의 강력범죄 프로파일러 훈련(VICAP, Violent Crime Apprehension Program)을 받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녀가 이수한 프로그램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여주인공 조디 포스터가 받은 훈련 과정과 같은 것이었다.

- 수사관에게는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만약 미국에서 1년 반 동안 교육 받은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하라고 한다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을 터이다.

조수경은 머리카락을 귀 너머로 쓸어내면서 옆 좌석의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벌써 비행기는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헤어지는 인사를 미리 해 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수경이 1등석에 앉은 것은 본의 아닌 일이었다. 사무 착오인지, 그녀의 일반석 좌석에 두 사람이 배정되어 있었다. 탑승 티켓을 보이며 문의하는 그녀에게 승무원은 정중히 양해를 구한 후 뜻밖에도 1등석 좌석을 안내했던 것이다. 3인석 줄의 통로 쪽 좌석에는 웬 장년 남자가 앉아 있었고 나머지 두 자리는 비어 있었다.

조수경은 창 쪽 자리를 선택해 앉았다. 음료 서비스가 지나간 후 장년 남자가 마시던 커피 잔을 놓으며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저는 아브라함입니다."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유대교인이거나 아니면 안식교인이라고 일단 추정해 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는 한국인의 얼굴이었고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조수경입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미스 조는 무슨 일로 미국에 갔다 오시는지요?"
"연수 받고 오는 길입니다."
"연수라고요?"
"네. 어학연수를 받았습니다."

장년 신사는 웃었고, 순간 조수경은 당황했다. 그의 표정과 웃음은, 너의 거짓말을 내가 안다는 표시를 은연 중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왜 존함이 아브라함이시지요?"
"흠… 구약성서에는 세 명의 의인이 있습니다. 욥과 노아와 아브라함이지요. 셋 중에서 아브라함이 저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본 것입니다."

조수경은 웃었다. 그녀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눕혀 놓고 칼을 치켜드는 원조 아브라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또 네가 웃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 지었다. 조수경은 약간 장난기를 섞어 웃으며 물었다.

"왜 꼭 의인 중에서만 골라야 했습니까?"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꽤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 질문이 재미있군요. 제가 악인이니까요."

아브라함은 30년 만에 조국을 찾는 거라고 했다. 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해 보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조수경은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직감했다.

아브라함은 성경을 읽고 있었다. 조수경은 그가 정말 유대교인이거나 안식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들었다.

아브라함이 성경을 두 사람 사이 빈 자리에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에는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군요."

조수경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려 합니다."

조수경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녀오시지요."

조수경은 아브라함이 펴 놓고 간 성경에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펼쳐져 있는 성경의 내용들은 그녀도 아는 것이었다. 이른바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는 것으로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제시한 신율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좌석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턱을 받친 채 성경 구절들을 읽어 보았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모두 이루리라.

성경에서 눈을 뗀 조수경은 어둠이 걷히고 있는 기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착륙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는 듯했다. 착륙에 대한 안내 방송이 몇 차례 나온 후, 인천공항의 활주로 등들이 눈 아래로 나타났다.

조수경은 아브리함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

"덕분에 무료하지 않게 잘 왔습니다. 사업에 성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미스 조도 악인들을 많이 검거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악인'과 '검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그는 조수경의 직업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산 사람이 낯선 상대방의 직업을 알아맞히는 경우를 그녀는 종종 보았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7월 초부터 올 연말까지 6개월 동안 주 2~3회씩 연재될 예정입니다.



태그:#아브라함, #FBI, #조수경, #양들의침묵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