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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의 본고향, 피렌체의 한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나는 아침부터 호텔 로비의 PC를 찾았다. 한국에서 예약한 우피치(Uffizi) 미술관의 답변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인 일인지 로비의 PC에는 국내의 포털 메인화면이 나타나지지 않았다.

 

  호텔 리셉션 데스크의 종업원 아가씨에게 데스크의 PC를 잠깐 사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로그인한 화면이 온통 한글로 가득 차자 호텔의 아가씨가 한글 글자에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미술관 예약확인서를 출력하고 박물관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아내와 딸을 깨웠다.

 

  이탈리아의 아침은 왜 이리 햇살이 맑고 싱그러운지 모르겠다. 투명한 햇살은 땅위에 부서질 듯 깔리고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파랗기만 하다. 시원한 아침 공기는 앞으로의 여행을 설레게 한다.

 

  우피치 미술관이 있는 피렌체의 중심,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까지 먼저 이동하기로 했다. 광장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걸어서 이동할 경우에 아침부터 다리의 힘이 많이 소진될 것이다. 나는 피렌체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호텔 바로 앞의 역까지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딸, 신영이의 발걸음이 자꾸 뒤쳐졌다. 식사를 서둘러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체한 모양이다. 나는 택시 정류장 앞에서 신영이의 투정을 들으면서 택시를 기다렸다. 어제 로마에서 강행군을 한 신영이의 몸은 휴식을 원하는 상태인 것 같지만 수많은 여행자들이 유적지마다 긴 줄을 서는 피렌체에서 한껏 늦장을 부리다가는 아무 곳도 입장할 수 없다는 상황을 나는 알고 있었다.

 

  택시는 피렌체의 구시가로 들어섰다. 작고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길을 택시는 잘 빠져나가고 있었다. 택시 앞 차창으로 아침의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 하얀 역광이 나올듯한 빛이 얼굴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 맑은 아침 햇살 속에서 가족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지만 내가 준비한 답사 일정을 시작할 수 없었다. 나는 피렌체의 햇살 가득한 광장에서 화장실을 먼저 찾아야 했다. 신영이가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을 계속 찾았기 때문이다. 이 아침에 어디 가서 화장실을 찾아야 하나? 내가 한국에서 수집한 수많은 피렌체의 정보 속에 시뇨리아 광장의 어디에 화장실이 있는지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여행이 시작되는 아침부터 작은 돌발상황에 대한 순발력이 필요했다.

 

  유럽의 옛도시에서는 화장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나는 문을 연 큰 식당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시뇨리아 광장을 면한 곳에는 몇 곳의 식당과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첫 번째로 찾아간 식당은 방금 문을 연 듯 했고 남자 종업원이 나무 바닥에 물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물에 젖은 식당의 야외 바닥이 아침 햇살에 빛나며 말라가고 있었다.

 

  내가 식당 야외좌석을 청소하고 있는 종업원에게 다가서자, 그는 자기가 청소하고 있는 물기 묻은 바닥에 내가 올라서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가 화장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그는 화장실은 여기저기에 있다고 이야기했다. 자기 식당 손님도 아니고 식당일 개시를 위해 청소하고 있는데 화장실을 찾는 나를 반길 이유가 없었다.

 

  나는 주변에서 가장 크고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 있는 식당을 찾았다. 이 리보이레(RIVOIRE) 레스토랑의 야외 좌석에는 이미 많은 피렌체 시민들이 앉아 아침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크기나 내부 장식으로 보아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 내부로 나는 가족과 함께 무작정 들어섰다. 나는 손님인양 종업원에게 화장실을 물었다.

 

  나는 식당을 가로질러 식당 내부 가장 안쪽에 자리한 화장실을 찾았고 신영이는 화장실 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고급 갈색 목재로 마감된 화장실은 참으로 안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금발의 백인 여자 어린이가 화장실 앞에 줄을 섰다. 나는 신영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야외박물관 같은 시뇨리아 광장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수준 높은 조각상들이 광장을 에워싸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광장의 모든 조각상들은 누구나 한 번씩은 보았을 정도로 명성을 자랑하는 작품들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정치, 문화의 중심이었던 이 광장은 수많은 명작들이 남아 있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넵튠(Neptune) 분수에서는 물줄기가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넵튠은 나 어릴 적 만화에서 많이 보았던 그리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로마화된 이름이다. 1575년에 바르톨로뮤 아마나티(Bartolomeo Ammannati)가 만든 넵튠 대리석상은 조각상들을 내려 보는 위치에서 늠름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넵튠 상은 주변의 조각상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넵튠을 둘러싼 물의 요정, 아들인 트리톤(Triton)이나 광장의 다른 조각상들에 비해 넵튠은 신체 비례상 얼굴이 너무 커 보인다. 그의 턱을 감싸고 있는 수염이 너무 덥수룩해서 얼굴이 너무 도드라지고 있었다. 광장 안에서도 넵튠신만 유난히 커서 광장 조각상들과의 균형이 깨지고 있었다.

 

  이 넵튠상은 내가 어디선가 보았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넵튠이 부리는 바다의 말 4마리는 어찌 된 일인지 잘츠부르크 구시가 광장분수에서 보았던 말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도시 곳곳의 건물과 조각상들이 이태리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넵튠상은 로마의 어디선가 본 듯한 조각상이다. 이 넵튠 분수대는 넵튠 조각을 중심으로 트리톤, 물의 요정, 해마로 이루어진 로마 트레비 분수와 형제 같이 닮은 조각상이다.

 

  나는 이 시뇨리아 광장에서 영화 '전망 좋은 방'을 떠올렸다. '전망 좋은 방'의 여자 주인공은 피렌체 여행을 왔다가 이 시뇨리아 광장에 들르게 된다. 여주인공으로 나온 영국 배우, 헬레나 보헴 카터(Helena Bonham Carter)는 이 광장에서 그로테스크한 한 조각상을 보고 기절을 하게 된다.

 

  그 작품은 이 광장의 어떤 작품이었을까? 내가 대학생 때 보았던 영화라서 그 조각 작품이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배우가 충격을 받고 쓰러졌던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3개의 대형 아치로 이루어진 란치 회랑(Loggia dei Lanzi)을 우선 찾았다. 고딕 말기 양식의 건물 내부에는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표현한 여러 조각상들이 박물관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사람을 기절케 한 강렬한 힘을 가진 그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영화 대본 속에서 주인공이 기절하는 상황설정이 가능케 한 그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내 눈 앞에는 강렬한 힘을 지닌 한 작품이 나타났다. 1554년에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가 만든 '메두사(Medusa)의 목을 베어 든 페르세우스(Perseus)'였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인 페르세우스 조각상은 주변의 대리석 작품들과 달리 청동으로 만들어져서 강렬한 구리빛이 감돌고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는 목이 잘린 메두사의 끔찍한 얼굴을 든 채로 잘려나간 메두사의 몸통을 밟고 있다. 헬레나 보헴 카터는 아마도 뱀의 형상을 한 머리카락과 함께 목에서 피가 떨어지는 메두사의 두상을 보고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어찌나 끔찍하게 사실적인 묘사를 하였던지 나는 마치 신화 이야기가 실제의 사실인양 착각하고 있었다. 잘려나간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 있으면 마치 신화에서와 같이 내 몸이 돌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러한 괴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광장에 배치해 놓은 피렌체 사람들의 문화와 이런 작품이 가능했던 문화적 자연스러움에 경외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앞서서 우피치 미술관으로 걸어가는 아내와 딸이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 청동상 앞에 돌같이 서 있었다.

 

  광장에는 각국에서 온 부지런한 여행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여름의 아침 태양은 아직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건물 그림자들은 광장을 향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광장의 아침은 상쾌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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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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