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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설원랑.
 <선덕여왕> 설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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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 <적벽대전> I·II의 제갈공명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했다. <선덕여왕> 10부 때 방영된 속함성 전투의 총지휘자 설원랑(미실의 정부, 전노민 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백제군이 무서운 기세로 신라 속함성 등을 빼앗자, 이를 되찾기 위해 결성된 신라 구원군의 총지휘자 설원랑이 구사한 전술은 이른바 '육참골단'(肉斬骨斷)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살을 베어 주는 대신에 적의 뼈를 끊는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설원랑의 '살'은 '김서현 부대'이고 적의 '뼈'는 속함성의 백제군이었다.

애초 설원랑은 자기 자신은 속함성(경남 함양)으로 진격하고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에게는 아막성(전북 남원) 제1관문을 공격하도록 했다. 지금의 88올림픽고속도로(담양-대구) 구간에 있는 아막성과 속함성 사이의 거리는 대략 서울 중심부에서 수원 정도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설원랑이 속함성으로 진격한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받은 백제 본영에서는 속함성에 병력을 증파했다. 그러자 설원랑은 아막성 쪽으로 병력을 돌리는 척했고, '신라군의 진짜 목표는 아막성'이라고 판단한 백제 본영에서는 속함성 부대의 주력을 아막성 쪽으로 부랴부랴 이동시켰다.

<선덕여왕> 속함성 전투, 실제는 어떤 모습?

백제군이 아막성 쪽으로 급히 이동하자, 설원랑은 다시 속함성 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소수의 병력만 남은 그 성을 손쉽게 점령했다. 한편, 아막성 제1관문을 점령한 채 대기하고 있던 김서현 부대는 아막성 쪽으로 속속 모여드는 백제군의 기세에 당황하게 되었다.

김서현 부대를 사지에 빠뜨리고서 속함성을 손쉽게 탈환하고는 "육참골단의 병법을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설원랑을 두고 진평왕과 천명공주는 그저 분노를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미실 측은 적군과 정적을 동시에 곤경에 빠뜨리는 설원랑의 계책에 대해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제 남은 길은, 신라의 전령이 백제군의 포위를 뚫고 한시라도 바삐 아막성으로 가서 김서현 부대에게 철수명령을 전달하는 일뿐이었다. 목숨을 걸고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는 딱 하나! 아막성 현장에 있는 김서현과 용화향도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더 큰 애착을 갖고 있을 김유신뿐이었다.

아군을 희생시키고도 아무런 비난을 들을 여지가 없도록 해놓고 비정한 승리를 쟁취한 설원랑은 명실상부한 신라의 제갈공명이었다. 설원랑은 백제로부터 속함성을 탈환한 전투영웅이었다. 물론 드라마 속에서 말이다.

역사속 속함성 전투엔 '설원랑'은 없었다

그럼, 속함성 등을 놓고 벌어진 실제의 백제-신라 전투에서는 어떤 상황이 전개되었을까? 실제의 전투에서는 어떤 인물이 영웅으로 기억되었을까?

<삼국사기> 권4 '진평왕 본기' 및 권27 '무왕 본기'에 따르면, 백제가 신라의 속함성을 비롯한 앵잠성·기잠성·봉잠성·기현성·용책성의 여섯 성을 상대로 군사공격(이하 '속함성 전투')을 단행한 시점은 신라 진평왕 46년 및 백제 무왕 25년이었다. 서기로 치면, 624년이었다.

여기서 전투 발생연도를 자세히 언급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설원랑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이 전투를 지휘했는지를 따져보기 위해서다. 위작 논란이 있는 현존 <화랑세기>(필사본) 제7세 풍월주 설원랑 편에 따르면, 설원랑은 549년에 태어나서 606년에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속함성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설원랑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전투를 지휘할 수도 없었다. 또 그가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의 전투 상황 역시 드라마와는 전혀 판이하게 전개되었다. 백제가 속함성을 비롯한 여섯 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자, 신라 측에서는 이 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구원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실제의 신라 구원군은 드라마 속의 신라 구원군과는 전혀 판이했다. 백제군의 기세에 놀란 신라 구원군은 "병법에서는 어려울 때에 물러서야 한다고 했다"면서 시일을 끌며 진격을 늦추다가 결국 회군하고 말았다.

신라 구원군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냥 철수할 정도로 백제군의 기세는 그렇게 대단했다. 그래서 위의 여섯 성 중에서 속함성·기잠성·용책성은 일찌감치 백제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드라마에서처럼 신라군이 육참골단의 기지를 발휘해서 속함성을 탈환하는 기적은 실제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영웅'으로 기억되는 신라군 지휘자 '눌최'

신라 진평왕 때에 속함성 등을 놓고 벌어진 백제와 신라의 전투. 오른쪽은 드라마 <선덕여왕> 속에서 신라 구원군 지휘자로 활약한 설원랑의 모습.
 신라 진평왕 때에 속함성 등을 놓고 벌어진 백제와 신라의 전투. 오른쪽은 드라마 <선덕여왕> 속에서 신라 구원군 지휘자로 활약한 설원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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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 성이 일찌감치 함락되고 나머지인 앵잠성·봉잠성·기현성도 머지않아 점령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신라의 영웅이 등장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영웅이란 기적적인 승리를 일궈낸 역전의 명수가 아니라, 계백장군처럼 최후까지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장수를 의미할 뿐이다.

<삼국사기> 권47 '눌최열전'에 소개된 그 주인공은 바로 눌최라는 신라군 지휘자였다. 구원군이 그냥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눌최 장군은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들에게 호소했다. 구원군도 돌아가고 승리의 가망도 없으니 이제는 최후까지 싸워서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는 수밖에 없다고 부르짖은 것이다. 이에 감동한 군사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오직 명령대로 따르겠다"며 외쳤다고 눌최열전은 전한다.

하지만, 신라군이 백제군을 대적하기에는 이미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그저 목숨을 바쳐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는 길밖에 없었다. 절대열세의 상황 속에서 신라군은 거의 다 죽고 이제 몇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눌최와 눌최의 종을 포함해서 몇 사람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 긴박한 대목에서 눌최열전은 눌최와 그의 종에 관한 이야기를 살짝 소개했다. 평소에 눌최의 종은 힘이 세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눌최에게 그 종을 멀리하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천한 자가 특이한 재주를 갖고 있으면 주인에게 반드시 해가 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눌최는 그 말에 관계없이 자신의 종에 대해 변함없이 신뢰를 보냈다고 한다.

바로 이 같은 신뢰의 효험이, 성이 함락되기 직전의 위급한 상황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승패가 이미 분명해진 상황인데도 그 종은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주인의 곁을 지켰다. 종은 눌최 앞에서 열심히 화살을 쏘아댔고 또 백제 병사들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그래서 백제 병사들은 눌최와 그 종의 앞에 감히 다가설 수 없었다. 전투는 이미 백제군의 승리로 사실상 종결되었지만, 최후까지 남은 눌최와 그의 종 때문에 백제 병사들이 곤욕을 치른 것이다. 

그런데 백제군 병사 하나가 이들의 눈을 피해 뒤로 돌아가서 도끼로 눌최를 쳐서 죽였고, 등 뒤에 있던 주인의 죽음에 놀란 눌최의 종은 몸을 돌려 백제 병사와 싸우다가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자신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준 주인에 대해 그 종은 최후까지 곁을 지키는 것으로써 보답한 것이다.

속함성 전투, 그곳엔 '제갈공명' 아닌 '계백'만 있었다

백제군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대목에서 김부식이 그대로 백제군의 승리로써 결말을 맺었다면, <삼국사기> 속의 속함성 전투는 별다른 스토리 없는 역사의 한 토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 직전에 나타난 신라군 지휘자 눌최와 그 종의 신의가 부각됨에 따라 <삼국사기> 속의 속함성 전투는 승자가 아닌 패자 쪽의 장렬한 최후라는 이미지로 후세에 기억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 전쟁은 스토리 있는 사건으로 기억될 수 있게 되었다.

속함성 전투와 관련하여 <삼국사기>가 승자가 아닌 패자를 강조함에 따라, 후세에 기억될 전투영웅도 승자인 백제가 아닌 패자인 신라 쪽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최후까지 도망가지 않고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웠을 뿐만 아니라 평소 인간을 신뢰한 덕에 끝까지 자신에게 충성하는 종을 둘 수 있었던 신라군 지휘자 눌최였다.

눌최라는 패장이 역사에 상세히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 <선덕여왕> 속의 설원랑처럼 냉정한 머리를 잘 굴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눌최는 뜨거운 심장이 박동하는 대로 그저 자신을 내맡겼을 뿐이었다.

드라마 속의 신라군은 자신의 살을 내주고 적의 뼈를 손쉽게 끊어버렸지만, 실제의 신라군은 살뿐만 아니라 자신의 뼈까지 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라 입장에서 볼 때, 속함성 전투는 '장렬한 최후' 그 자체였다. 그곳에는 '제갈공명' 같은 설원랑은 없었다. 그저 '계백' 같은 눌최만이 있었을 뿐이다. 


태그:#선덕여왕, #설원랑, #속함성, #눌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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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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