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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다시 불탔는데 너무 쉽게 가라앉았다.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두근두근했는데 금방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서거정국이 좀 더 오래가길 바랬는데…."

 

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 말이다. 그는 "민주주의 후퇴나 미디어법 개악저지, 4대강 사업 반대, 용산참사 해결 등 많은 요구가 나왔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사과 한마디 없이 하려던 일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면서 "그동안의 의제가 '시민의 의제'가 아닌 몇몇 '시민사회단체만의 의제'로 남겨졌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한 달이 됐다. 서거 당일인 지난달 23일, 서울 도심 대한문 앞에서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분향소를 차렸다. 사회 각계의 시국선언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시국회의가 이어졌다.

 

지금도 대한문 앞에는 100명의 시민들이 상주하고 있다. 주요한 시민사회단체들의 기자회견이나 문화제도 이곳에서 열린다. 그러나 지난해 촛불과 같은 동력은 없다. 정부 여당의 태도도 지난해와는 다르다. 이명박 대통령은 끝내 대국민사과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으며, 한나라당은 단독국회를 강행하겠다며 민주당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 한 달, 진보진영의 성과는 무엇이었을까.

 

촛불은 다시 켜졌지만... 이명박 '마이웨이'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그동안 진보진영이 요구한 것 중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오히려 '공안통'을 검찰총장에 앉히고 최측근을 국세청장에 앉힌 것은 '마이웨이'하겠다는 것이다, 이 정권 불통의 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난 한 달간의 활동에 대해서도 사회단체 활동가들은 "현안에 대한 대응이 느렸다"고 한계를 자성하는 분위기다. 오광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책팀장은 "시민단체추모위도 만들었지만 역동성은 떨어졌다, 분향소만 하더라도 시민단체가 아닌 네티즌단체가 만든 것 아니냐"고 말했다.

 

김춘이 환경운동연합 소통협력국장은 "새로운 세대를 끌어들일 수 있는 문화적 코드 없이 고전적 방식으로 운동을 했다"고 지적했다.

 

민중단체들은 더욱 비판적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가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계기는 됐지만, 정작 중요한 사회현안들이 묻혀버렸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이승철 민주노총 대변인은 "'반 이명박'을 외치며 광장에 사람들은 모여 있는데 과연 '반 이명박'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이 대변인은 "'대한문 현장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최저임금 삭감 문제로 서명을 하는데 정말 관심을 갖는다기보다 일종의 '반 이명박' 반사효과"라면서 "노동문제가 여러 사회부문 의제 중 하나로 인식되어 쟁점을 만들기 어려웠던 측면도 있다"고 진단했다.

 

용산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꾸준히 현장을 찾던 사람들도 대한문으로 활동장소를 옮겼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촛불추모제를 하려던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 활동가들은 촛불을 든 시민에게 "이 와중에 그거 하냐"는 질타를 받았다.

 

홍석만 용산범대위 대변인은 "검찰의 수사행태나 경찰의 강경 진압을 규탄하면서 용산 참사 상황이 환기되는 측면은 있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억울한 죽음을 설명하는 소재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천주교 사제단의 시국농성와 촛불미사로 용산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참사 현장에서는 매일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홍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장례를 치르지 않았나, 그보다 억울하게 죽은 5명 철거민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한 상황"이라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호소했다.

 

이 와중에 용산 철거민 추모하냐고?

 

대한문 앞 촛불 열기는 줄어들었지만,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모였던 시민단체들의 시국회의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활동가들의 정서적 충격이 워낙 컸고,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도 보다 절박해졌다. 단체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우리도 노 전 대통령에게 가해자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지금 일상적인 사업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 19일 대전의 한 호텔에서는 50여 명의 단체 활동가가 모여 시국모임을 열고, 전국적인 시민운동 연대조직을 결의했다. 이들은 22일 보도자료를 통해 "개별 단체의 일상적 사업과 연대를 뛰어넘어 현 시국에 비상하게 대응하는 연대조직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 시국회의에는 서울·경기·인천·충북·충남·대전·전북·부산·경남·대구·울산 등 전국의 단체들이 참여했고 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한국여성단체연합·YMCA 등 대중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이 모두 모였다. 참가자들은 "2004년 총선연대 이후 최대"라고 회의 규모를 설명했다.

 

천준호 한국청년연합 대표는 "시민단체는 원래 정책을 감시하고 시민을 교육하는 역할이지만 지금은 그런 활동을 조정하고 정권에 전면적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컸다"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또한 천 대표는 "아직도 연대가 잘 안 되고 있다, 서거정국에서도 이 문제로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예를 들어 민주당과 함께 여는 집회에서 일부 단체 활동가들이 "FTA에 찬성한 정당에 발언권을 못 준다"고 주장하면서 비판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만들 전국조직을 바탕으로 시국현안에 대응하고 시민들은 물론 정당과 종교, 학계 등 범민주세력의 연대를 만들겠다는 것이 시민단체들의 포부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연대를 외치지만 무엇에 집중할지는 단체마다 다소 의견차가 보인다.

 

지난 한 달을 평가하면서도 한 활동가는 "시민단체가 언론 문제에 대해 총대를 멨어야 했다"고 말했고, 다른 활동가는 "검찰개혁에 대한 대응이 반박자씩 늦었다"면서 각자 다른 의제를 강조했다. 일단 시국회의에 참석한 단체들은 미디어관련법 철회와 4대강사업 중단, 검찰 개혁, 서울광장 개혁 등을 의제로 내놓고 이중 미디어법과 4대강 사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정권 불신임? 선거에서 두고 보자"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공통적으로 불통의 '벽'을 호소했다. 답답하다고도 했다. "정부 여당에서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수위를 높여야 한다, 결국 정권 불신임인데 수단이 마땅치 않다"고 입을 모았다.

 

정책 비판이나 대안 제시 같은 전통적 시민단체 활동은 물론, 기자회견이나 집회·농성 같은 거리투쟁을 해봐도 정부에 시민사회단체들의 주장은 반영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들의 다음 행동은 자연스럽게 선거 전략으로 모이고 있다. 오는 10월 재보선과 내년 지방선거에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한문 앞에 나온 시민들은 '불신임 국민운동'을 주장하지만,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민심은 '당장 대통령을 임기 중에 끌어내리자'는 의견이 아니다"면서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김춘이 국장은 "회원들 중에서도 '환경단체가 왜 정치운동을 하냐'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박원석 협동사무처장은 "민주당 지지율이 잠시 오른 것은 노무현 효과 때문이고 정당을 비롯해서 시민사회단체에서도 '반 이명박' 여론을 수용할 대안이 없다"면서 "시민사회가 과거의 활동력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책대안이 제도화될 수 있었던 지난 10년간은 달라진 환경에서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의 전망은 밝은 편이었다. 박 사무처장은 "정부를 비판할 구체적 정책콘텐츠를 달라거나 시민사회단체들이 상황을 주도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민사회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복원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진 인권단체연석회의 활동가도 "미디어악법 등의 당면 의제가 정리되고 나면 생존권 문제가 가시화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폈다. 그는 "이번에 촛불의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은 지난해 촛불정국에서 절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분노가 저축되는 상황이고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고 내다봤다.

 


태그:#서거 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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