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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수사(淨水寺) 고려 옛 도공들의 삶의 고난과 역경을 떨치기위해 불공을 드렀던 정수사
ⓒ 조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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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천개산(天蓋山)자락에 위치한 정수사라는 절이 있다. 정수사를 찾아 올라가면 천개산 자락의 연무와 회색빛깔의 채색이 산채와 어울어져 운치를 더해 준다. 공사가 한창 진행중에 있어 바닦은 온통 자갈이 깔려 바지락거리는 소리가 정수사에 울려 펴진다. 절을 찾는 이들에게 오서오라는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 딛을 때마다 마음은 평온을 찾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정수사 정면으로 보이는 대웅전
▲ 정수사 대웅전(大雄殿) 정수사 정면으로 보이는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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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전이 있다. 석가모니를 모시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인 맞베지붕(옆에서 볼 때 "人"자 모양)으로 되어 있다. 천장의 둘레에 평방위에서 공포(처마를 받치는 부재)까지의 공간을 사면인 판백으로 처리하고, 판백에 벽화를 그려 내부천장을 장식했다. 바닥은 마루판으로 된 우물마루(우물"井"자 형태)이며 후면 중앙 벽쪽으로 불단이 있다. 경내를 둘러 보다 이네 다시 한 번 눈과 마음를 이끄는 도조사를 볼 수 있다. 도조사는 고려시대 청자를 굽던 옛 도공들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고려시대 고려청자를 굽던 무명도공들의 넋을 기리기위한 위패가 정수사 도조사에 모셔놓았다.
▲ 고려청자 도공들의 위패 고려시대 고려청자를 굽던 무명도공들의 넋을 기리기위한 위패가 정수사 도조사에 모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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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淨水寺)는 고려시대 9세기~14세기에 걸쳐 고려청자를 굽던 도공들이 청자를 굽기 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좋은 청자를 만들 수 있도록 부처님께 공양과 불공을 드리던 곳 이였으며, 도공들의 어렵고 힘든 삶에 대한 고통을 이기기 위해, 가족의 건강을 위해 정수사를 찾았다고 정수사 주지 수현스님은 말한다.  

현, 정수사 주지 수현스님
▲ 정수사 주지 수현스님 현, 정수사 주지 수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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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 주지 수현스님에 따르면 "고려시대 도공들이 한때는 대우도 받았겠지만 500년 세월동안 조정의 압력을 받아오면서 도공들은 숫한 서러움을 받았을 것 이며, 이에 후손들에게 전승·계승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본다."며 정수사는 옛 도공들의 마음의 안식처라고 했다. 도조사 바로 앞에는 "혼불등"탑을 세워 도공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무명도공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
▲ 도조사 무명도공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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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사(淨水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구군지(舊郡誌)에 의하면, 805년(애장왕 6)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선은 827년(흥덕왕 2) 영암(靈巖)에서 출생하였고, 842년 승려가 되었으므로 그 연대에는 다소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창건 당시에는 이곳의 계곡을 중심으로 양쪽 언덕에 묘적사(妙寂寺)와 쌍계사(雙溪寺)의 두 사찰을 건립 하였다.

쌍계사는 수정사(水淨寺)라 불렸으나, 1529년(중종 24) 중창하면서 정수사라 하였고, 1574년(선조 7) 성운(性雲)이 중건하였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대파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종인(宗印)이 현감 강유(姜諭)의 시주로 중건하였고, 1664년(현종 5)에는 능우(能佑)가 중수하였다. 1706년(숙종 32) 처사(處士) 이득종(李得宗)이 당시의 현감이었던 김중려(金重呂)의 협력을 얻어 중수하였고, 1794년(정조 18) 왕명으로 고금도(古今島)에 있는 관왕묘(關王廟)를 이 정수사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조선말까지만 하여도 강진 부도의 사암(寺庵)들을 관장하는 수찰(首刹)이었으나 차츰 퇴락하다가 6·25 이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었으며, 뒤에 사찰 승려들이 지방민의 협조를 얻어 중건하였다. 1991년에는 요사를 지었고, 1995년에는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나한전·산신각·종각·산문(山門), 요사채 등이 있다. 산문 밖은 임진왜란의 격전지로 유명하며, 남쪽으로 3㎞ 떨어진 곳에는 고려청자 도요지인 당전리가 있다.

염걸 장군은 1545년(인종1년) 강진군 칠량면 율번(栗邊)에서 출생했다. 율번은 목암, 월송과 함께 칠량면 단월리에 속한다. 율번 마을은 1789년 <호구총서>에 기록된 28개 마을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단월리 3마을 중 가장 먼저 설촌된 것으로 보인다. 자는 국충(國忠), 호는 퇴은당(退隱當)으로 기마와 궁술에 출중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구강포(九江浦, 현구십포)와 정수사 사이에 쳐들어오는 적을 두 아우 서(瑞)와 경(慶), 외아들 홍립(弘立)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섬멸했다.

염결장군전승기적비와 운계천기대사의적비가 나란히 자리 잡고있다.
▲ 염결장군전승기적비, 운계천기대사의적비 자리 염결장군전승기적비와 운계천기대사의적비가 나란히 자리 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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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이 강진만을 경유해 이곳으로 들어왔던 것은 고려청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선 수백 척이 구강포에 들어오자 수백 개의 허수아비를 바닷가에 세우고 의병들이 후퇴하는 척 위장 전술을 펼쳐 정수사 골짜기에 매복해 유인된 적 수천 명을 소탕하기도 했다.

또한 강진 도자가마터는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삼흥리와 명주리 일대에 분포한다. 강진 가마터의 핵심은 대구면 일대로 특히 용문천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바다와 접해 있어 해로를 통한 운송이 쉬웠던 대구면 일대는 국가에서 자기 제작을 통제하였던 자기소가 있었던 곳으로 고려 전시기에 걸쳐 가장 우수한 도자를 만들었던 곳이다.

가마터는 용문천 상류인 용운리에서 발생하여 용문천을 따라 바닷가인 사당리까지 분포하고 있다. 용운리는 운곡과 항동, 용문마을로 이루어졌으며 75기의 가마터가 있다. 용운리 가마는 몇 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0세기 전반부터 11세기 중엽의 고려초기 가마들로 청자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해무리굽 등의 도자편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청자의 기원을 추측할 수 있는 중국 월주요에서 만든 것과 비슷한 그릇형태와 무늬들도 볼 수 있다.

계율리는 계치와 청룡, 난산, 율촌마을로 이루어졌으며 59기의 가마터가 있다. 이들 가마는 초기 것들도 일부 있으나 대체로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의 것들이다. 사당리는 당전과 미산, 백사마을로 이루어졌으며 가마터는 43기가 있으나 용문천의 침식과 경작으로 훼손된 곳이 더 많다. 이 중 당전마을 가마터는 전성기 청자들로 비색의 완성과 상감청자가 발달되던 12세기 전반에서 13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 가장 많은 데 이것은 바닷가 미산마을로 연결되어 청자가쇠퇴하는 14세기까지 이른다. 수동리는 6기의 가마터가 있으며 대체초 13세기부터 14세기대의 것들로 대부분 논밭으로 변화되었다.

이곳 일대에는 자기가마터 이외에도 토기가마터들이 분포하고 있어 당시 자기와 토기를 함께 사용하였던 식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태그:#정수사, #도조사, #도공, #청자, #강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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