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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권하고 다독을 상찬하는 세상이지만 나는 책에 대한 불온한 상상을 쓰고 싶었다. 모두 좋다고 하면 괜히 어깃장을 놓고 싶은 타고난 심술 때문이기도 하고, 세상에 절대적으로 좋은 건 없다는 몸에 밴 비관 탓이기도 하다. 나아가 책이란 본래 불온하고 위태로운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에서

ⓒ 뿌리와 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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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고 가장 먼저 만난 작가의 말이 예사롭지 않았다. '책에 대한 불온한 상상'이라니 책을 보면서 어떤 '불온한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나아가 작가는 '책이란 본래 불온하고 위태로운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으니, 더더욱 궁금할 수밖에.

역시나 작가는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책에 대한 불온한 상상'을 풀어나가는데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다. 또한 경계도 없다. 동서와 고금을 마음껏 넘다들다 못해 작가의 상상은 이승의 경계를 넘어 저승에까지 이른다.

김이경의 <순례자의 책>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10편의 장편(掌篇)소설로 풀어냈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섬뜩하게, 때로는 참혹하게. 그런 이야기가 재미가 없을 리가 없고, 끌어당기는 힘이 없을 리 없다. 해서 한 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놓지 않게 된다. 오랜만에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흥미로운 책을 만났다고나 할까.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저승에 간다는 전제 아래 시작된 <저승은 커다란 도서관>은 지금까지 막연하게 품고 있던 저승에 대한 빈약한 상상을 여지없이 깬다. 저승사자도, 염라대왕도, 문지기도 없는 저승에 도서관이 있단다. 이곳에 잔뜩 쌓인 책들은 대체 누가 쓴 것들인가?

바로 죽어서 저승에 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책 한 권을 써내야만 니르바나에 들 수 있다. 까짓 책 한 권 쓰기, 쉬운 일이지, 하지 마라. 수천 년 전에 저승에 온 소크라테스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지금까지도 책을 쓰지 못해 니르바나에 들지 못했다. 어쩌다가?

<상동야화>는 조선 영조 시대, 한 남자가 알몸뚱이로 목을 맨 채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입 안에 종이를 물고 있는데, 짐작컨대 패설(소설)의 일부인 것 같다고 한다. 참군이 나서서 사인을 규명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자살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조선시대는 자살할 때 벌거벗고 입안에 종이를 무나? 사건은 그대로 종결되는 듯 했으나, 처음 시신을 발견한 사내가 사망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다시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다.

<저승은 커다란 도서관>은 상상 속의 도서관과 상상 속의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저승에 빗대어 풀어내고 있고, <상동야화>는 조선 사람들도 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졌던 역사적인 사실을 살인사건에 담아낸다.

책,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분서(焚書)가 아닐 수 없다. 작가의 말처럼 책이란 '본래 불온하고 위태로운 것'일 수밖에 없으니, 그 해악(?)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불태워졌던 역사가 있다. 분서, 하면 가장 먼저 진시황을 떠올리지만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분서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책 <신에 관하여>를 불태운 것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 뒤로 책은 여러 차례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어 사라졌다. 가까운 예로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들 수 있다. 국립도서관을 비롯한 희귀 고문서 보관소들이 약탈되거나 불타 없어졌다고 하니 분서의 역사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분서를 소재로 한 <분서>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이 어떻게 창·칼이 난무하는 세상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날카롭게 짚어낸다.

유럽의 대저택을 배경으로 한 <비블리오마니아의 붉은 도서관>은 책 제본을 둘러싼 비밀을 참혹하면서도 매혹적으로 들려준다. 물론 섬뜩하기는 하다. 책 제본에 동물의 가죽뿐만 아니라 사람의 가죽까지도 사용했다는 사실을 추리적인 기법을 통해 넌지시 알려준다. 인피로 장정이 된 책, 우리나라에도 있단다.

걸어 다니는 책 대여점, 가시혼야를 소재로 한 <들은 대로>는 일본의 에도시대가 그 배경이며, <꿈>은 중국 최대의 개인 도서관 '천운각'이 소재다. <어느 필경 수도사의 고백>은 중세 유럽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중세 유럽의 도서문화와 필경'의 역사에 얽힌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순례자의 책>은 책의 역사를 시원(始原)부터 찾아 떠난 순례자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책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종이로 만든 책만이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면서.

세계 책의 날 행사가 열린 가상의 도시 토틀리오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책의 적을 찾아서>는 역사상 가장 최악의 '책의 적'을 뽑는 과정을 이야기로 엮었으며, <살아 있는 도서관>은 사람이 책이라는 가정 아래서 출발한다.

이 책의 백미는 각 소설의 말미에 덧붙여진 '소설 속 책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소설을 구상하고 쓰게 된 동기와 배경을 설명한 것인데 작가의 넓고 깊은 독서이력을 알 수 있다. 또한 작가의 상상력이 동서와 고금을 넘나들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으며, 책과 관련된 흥미롭거나 숨겨진 역사적인 사건들을 알 수 있다. 그 재미, 상당히 쏠쏠하다.

김이경의 <순례자의 책>은 단순한 소설집이 아니라 소설 형식을 빈 책에 관한 일종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만큼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10편의 소설에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니, 작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책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순례자의 책>을 펼쳐 보기를 권한다. 결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뿌리와이파리(2009)


태그:#순례자의 책, #책, #김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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