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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 나는 수학은 좋은데 계산하기는 싫어요. 계산기로 하면 될 것을 왜 필산으로 일일이 하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아요."

나는 어머니가 나에게 들려주었던 수학 이야기를 아들에게 고스란히 해 주었다.

"의외로 많은 아이들이 과학자로서의 좋은 자질을 타고 난단다. 다만 과학을 좋아하는 마음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것의 가장 큰 이유는 수학이라는 난관을 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수학이 없다면 우리는 자연이라는 무대에 활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피동적인 관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수학은 논리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한 편의 시'이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자. 누구나 중국 문화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그 속에 완전히 젖어들려면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 다소 지겹더라도 중국어의 구문 구조와 4성법을 익혀 익숙해져야 한다. 과학과 수학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일찍이 갈릴레오는 이런 말을 했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그에 적절한 언어를 반드시 익혀야 한다. 그 언어란 수와 도형들이 알파벳으로 사용되는 수학이다. 수학 없이 우주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수학은 어느 면에서 가장 무용한 학문이다. 그런데 수학자들은 자신이 가장 무용한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는 특이한 자부심을 갖고 있단다. 수학은 무용하므로 오히려 가치를 발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수학을 익혀야만 한단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 수학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필경 내 아버지라고 하는 그 분, 남반부의 그 더벅머리 청년, 포탄이 오가는 중에도 배밭골 움막에 앉아서 하루 종일 수식을 끼적였던 그 사람이, 배 향기 나는 너럭바위에서 어머니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임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우리 별들은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나

순수하면서도 단호했던 나의 어머니, 전쟁터 움막에서 나눈 순식간의 사랑 하나를 기억하며 평생을 자족하며 살았던, 어느 면에서 맹목적이기도 했던 나의 어머니가 가장 즐겨 썼던 말은 놀랍게도 '확률'이었다.

"우리가 강대국이 되거나 선진국이 되거나 아니면 더 바람직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 확률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만 한다."

나는 그것이 서울 정릉 배밭골에서 아버지라는 분에게서 전수받은 양자역학의 확률 이론이었다는 것을 어머니의 일기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아들로서 당신에게 느끼는 미안함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일구월심으로 깊어지고 있다.

나는 한동안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쳐 준 노래를 잊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동요 하나를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 동요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요즘 들어 나에게는 그 동요를 시도 때도 없이 읊조리는 버릇이 생겨났다. 그래서 아내로부터 '또 그 노래냐?'는 눈흘김을 받기도 한다.

따오기 울음소리는 처량하다. 보통강에 저녁놀이 질 무렵에는 더욱 그렇다. 강도 슬픈 것이고 따오기도 슬픈 것인데 강과 따오기가 함께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나는 어려서 따오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어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따오기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는 이 노래는 4절까지 다 불러야 제 맛이 드러난다고 했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이더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구슬픈 소리
날아가면 가는 곳이 어디이더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달 돋는 나라

약한 듯이 강한 듯이 또 연한 듯이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적막한 소리
흘러가면 가는 곳이 어디이더뇨
내 어머니 가신 날 별 돋는 나라

너도 나도 소리 소리 다 같을진대
해나라로 달나라로 또 별나라로
훨훨훨훨 떠다니며 꿈에만 보는
말 못하는 어머니의 귀나 울릴 걸

나는 어머니가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찾기' 신청을 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상봉 희망자 명단에 이두오뿐 아니라 김성식과 박미애까지 적어 놓으셨다.

직녀성은 어머니가 스스로 자기 별로 삼은 별이다. 나는 밤하늘에서 직녀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직녀성은 거문고자리에 있는 청백색의 1등성별이다. 나는 직녀성에 '수현별'이라는 나만의 이름을 붙여 본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의 별로 매김했던 견우성은 육안으로 찾기가 어렵다. 그것은 은하수 가장자리에 있는 3, 4등성의 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직녀성과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밝은 별인 알타미르를 견우성으로 잘못 알고 있다. 아무튼 진짜 견우성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작심하고 찾아 나선다면 못 찾을 것도 없을 터이다. 모르긴 해도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목동과 같은 자연미를 가진 청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견우성에 '두오별'이라는 나만의 이름을 붙여 본다.

김성식 선생은 모름지기 한국의 전형적인 선비 같은 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순수한 학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외세가 좌우하는 분단 현실에 절망했고 민족 분열을 책동하는 무리를 증오했다. 조국의 현실은 그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의 별에 '선비별'이라는 나만의 이름을 붙여 본다.

박미애는 아무쪼록 청순하고 가련한 소녀였을 것이다. 그녀는 나의 아버지 이두오를 짝사랑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녀는 이두오의 사랑을 받은 내 어머니를 조금만치도 미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전쟁 막바지에 어머니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증언 때문이었다. 흉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이 그렇게도 고운 심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그녀의 별에 '소녀별'이라는 나만의 이름을 붙여 본다.

나는 수현별과 두오별은 물론 선비별과 소녀별까지도 미구에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들의 영혼은 밤하늘의 어느 별보다도 아름다운 빛을 뿜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궁극적으로 조국이 통일되어야 가능하다. 137억 광년 너머에 있는 별을 찾아낸 나에게도 그 일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 말대로 확률은 존재한다. (끝)

덧붙이는 글 | 오늘로서 이 소설을 마감합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식민지 시대'를 다룬 <제국과 인간>에 이어 연재한 <전쟁과 사람>은 우리 민족의 '분단'을 말한 소설입니다. 조만간 우리 민족의 '통일'을 이야기하는 추리소설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태그:#따오기, #직녀성, #견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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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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