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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15일, 분단 55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2000년 6월 15일, 분단 55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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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15선언 9주년이 되는 날이다. 분단 55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나 평화통일 의지를 밝힌 날이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는 전쟁의 기운이 드리우고 있다.

오늘 이명박 대통령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간다. 북한 핵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 간 공조원칙이 이 정상회담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인물연구 노무현 14'는 노무현 대통령이 인터뷰에서 밝힌 참여정부 5년 간의 북한해법 원칙을 담고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 나는 '인물연구 노무현'을 쓰면서 두 전직 대통령이 닮은 점이 적지 않다고 느꼈다. 언젠가 그에 대해 글로 한번 정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그것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을 통해 들을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특히 선배 대통령이 후배 대통령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추모하면서 그 닮은 점을 이야기할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닮은 점 8가지

지난 6월 11일 저녁,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6·15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1천여 명의 참석자가 모인 이 자리에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그는 연설을 '노무현 대통령 생각'으로 시작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이 나와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6·15와 10·4 선언, 이것을 생각할 때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과 저만이 북한을 가서 정상회담을 한 그 사건도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자신이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다"고 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과 제가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습니다. 둘 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노 대통령은 부산상고, 나는 목포상고를 나왔습니다(청중 웃음). 노무현 대통령은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가고 나도 돈이 없어 대학 못 갔습니다(청중 웃음). 노 대통령은 대학 못 간 뒤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됐고, 나는 열심히 사업해서 돈 좀 벌었습니다(청중 웃음). 그 후로 나는 이승만 정권, 노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독재에 분개해 본업을 버리고 정치 들어간 것입니다. 정치 들어가서 다시 또 반독재투쟁 같이 했는데, 이렇게 해서 노 대통령과 저는 참으로 연분 많습니다. 당도 같았고, 그리고 국회의원도 같이 했고, 그리고 북한도 교대로 다녀왔고, 가만히 보니까 전생에 노 대통령과 나하고 무슨 형제간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형님은 내가 되고요(청중 웃음). 해서 제가 노 대통령 서거를 듣고 내 몸이 반쪽으로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것은 지나간 과거만 봐도 여간한 인연이 아닙니다."

그렇게 닮은 점 여덟 가지를 이야기하는 동안 참석자들은 네 번 웃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나는 그 웃음들 속에 눈물이 젖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노무현과 김대중, 두 사람은 연설솜씨도 닮았다. 눈물 젖은 웃음을 자아낸다. 논리가 있고, 시대정신이 있고, 청중을 웃기면서 울린다.

만약… 김대중 전 대통령이 먼저 돌아가시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에 대한 추도사를 했다면? 그 자리에서도 아마 눈물 젖은 웃음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책, 9·19성명에 다 있다

지난 11일 서울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6·15로 돌아가자!'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했다.
 지난 11일 서울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6·15로 돌아가자!'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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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참석자들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은 "우리는 최근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감행하고 미사일 발사를 계속하는 데 대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면서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저해하는 일체의 행동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결책은 이미 나와 있다고 했다. 그 대목을 읽어보자.

"북한 핵문제는 이미 그 해결책이 나와 있다. 북한도 참여한 2005년 9·19 6자회담 공동성명을 준수하면 된다. 9·19성명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6자는 한반도 평화체제수립에 협력하며, 북한에 경제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행동 대 행동' 원칙으로 이행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6자 모두 찬성한 합의다. 이것을 실천하면 북한 핵 문제는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여 반드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합의된 대로 동북아 평화체제를 이룩해야 한다."

9·19성명이 뭐지? 그것이 뭐기에 이미 해결책이 거기 다 나와 있다고 할까? 그것을 잊어버린, 주목하지 못한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9·19성명은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중반기인 2005년에 나온 6자회담 성과물이다. 북한핵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당사국들의 합의를 다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성명이었다.

6·15선언 9주년 기념 행사장에서 채택된 결의문은 말미에서 이명박 정부에 이렇게 당부했다. 한마디로 6·15선언과 10·4선언을 실천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북한과 관계개선 노력을 통해 북한 핵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수용과 실천이 필수불가결하다. 1300년 동안 통일을 유지해온 조상의 업적을 받들고 미래의 후손들에게 민족통일과 평화협력의 시대를 열도록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숭고한 정신과 합의사항을 확인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 민족이 평화와 번영과 통일로 나아가는 길이다."

6·15선언은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의 결과물이고 10·4선언은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후 발표된 것이다. 6·15선언은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이고, 10·4선언은 두 번째 정상회담의 산물이다.

6·15선언과 10·4선언이 뭐기에

이참에 공부 좀 해보자. 2000년에 분단 55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나 공동으로 발표한 6·15선언에는 어떤 내용이 남겨 있었나. 자주적 방법에 의한 통일 의지가 천명됐으며, 남북 경제협력·이산가족 방문 등이 합의되었다. 무엇보다 통일방안에 대한 공통인식을 2항에 담았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5년 뒤에 이뤄진, 김대중 대신 노무현이 바통을 이어받아 김정일과 합의한 10·4선언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 6·15에서 무엇이 진전되었나?

10·4선언은 6·15정신의 계승을 분명히 하였고 경제-문화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 사업에서 더욱 속도를 내고, 해주 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는 등 경제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10·4선언의 핵심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종전선언을 추진하기로 한 점이었다. 평화정착을 위해 우선 남북의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해 휴전선언을 종전선언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이 점이야말로 10·4선언이 6·15선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성과였다.

한반도에 전쟁 기운이 돌고 있는 2009년 여름, 불과 2년 전에 만들어진 이 선언은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노무현, 10·4정상회담보다 9·19성명에 더 애착

2007년 10월 2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2007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향하며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고 있다.
 2007년 10월 2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2007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향하며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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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언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던 2007년 가을을 생각한다. '인물연구 노무현'을 위한 세 번째 인터뷰는 10.4 정상회담 직후인 10월 20일이었다.

- 성과 있게 정상회담이 끝난 것을 축하드립니다.
"지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250분 정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났는데 그 시간에 여러 의제를 합의했으니까 역사상 그렇게 효율적인 회담도 아마 없었을 것 같아요. 서해 평화협력지대에서 출발을 해가지고 해주공단하고 쭈욱… 사전에 의제를 충분히 조율하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 다 성격이 조금 화끈한 점도 있고, 우리가 의제를 대부분 준비한 것이다 보니까. 우리는 치밀하게 준비를 했고, 김정일 위원장이 화끈하게 받아버린 것 같아요."

정상회담 직후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 지지도가 전보다 10% 정도 올라가 있어서인지 노무현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

- 평양 가는 길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는데요, 군사분계선 앞에 딱 섰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벙벙했지 뭐…. 걸어가는 것은 우리 청와대 의전 비서관이 청와대 비서관실에 제안을 해서 그리 됐는데…. 나는 그게 그거지 뭐 하고 예사로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대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막상 걸어가는 그 순간에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거기에서 내가 좀 긴장을 한 상태여서 실제로 내가 느낀 감동을 보는 사람도 같이 못 느꼈던 것 같아요. 근데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게 '정말 역사적인 사건이구나' 실감이 나요. 상징성이."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 노 대통령은 "나는 오늘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습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올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점 지워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임기 중에 주변의 권유는 많았지만 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북핵 문제가 가닥을 잡기 전에는 정상회담이 안 된다는 것을 항상 나는 기본 전제로 깔고, 그렇게 계속 얘기해왔습니다. 국내에서 나한테 자꾸 정상회담 빨리하라고 다그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서둘러서 하면 북쪽입장만 계속 강화시켜주는 것이고, 나한테 자꾸 정치적 부담만 자꾸 주는 것이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이렇게 말해왔지요."

그래서 남북정상회담 자체를 공로로 내세울 생각은 없다고 했다.

"내가 그 얘기를 왜 자꾸 하냐고 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사리가 있고, 조건이 있다는 것이죠.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정상회담을 했다는 것 자체를 무슨 대통령의 공로로 내세울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10·4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 알맹이가 있었으니까 생색은 낼 수 있지만요. 오히려 내 임기 중에 6자 회담에 집중하고 일정한 진전을 이뤄낸 것이 내 공로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남북정상회담보다는 6자회담의 결실이었던 9·19성명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것을 더 크게 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2005년 그 선언이 이뤄진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한 북핵문제의 최고전문가들이 "해결책은 9·19성명에 다 있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다시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북미갈등·남북갈등이 고조된 상황이기 때문에 당시의 선언이 빛바랜 점도 있지만, 그런 성과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되새김하는 것은 이후 북핵문제 해결에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노무현이 5년간 미국에 준 확실한 정보

2007년 가을 인터뷰에서 이렇게 물어봤다.

- 지도자로서 북한문제·북핵문제는 어떤 원칙을 가지고 다뤄야 한다고 그동안 생각해왔습니까?

노 대통령은 이 질문에 "그건 참 어려운 문제죠"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런데 북한문제·북핵문제처럼 어려운 사안은 문제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 상황이 아주 변화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본질적 구조는 변함없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본질적 문제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일관되게 그 원칙에 따라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또 나갈 때는 나가고 기다려야 될 때는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

노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9·19성명이 나올 만큼 큰 진전이 있을 줄 몰랐다면서 "운도 따랐다"고 했다.  

"저는 제 임기 동안에 북핵문제가 풀리는 상황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측했던 것보다 좀 더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지요. 그것은 역설적입니다만, 이라크 사태가 장기적으로 풀리지 않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는 점, 그 다음에 이제 미국에서 정치적 구도가 바뀌어버린 것이지요. 의회에서 민주당이 득세해버린 것이지요. 그것이 이제 우리가 예측하지 않았던 사태지요. 말하자면 이라크 사태도 조금 일찍 끝날 줄 알았고 공화당의 우세는 조금 계속될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그것이 역전됨으로써 이 문제가 풀릴 수 있는 계기가 잡힌 것이지요."

노 대통령은 그런 운도 있었지만 참여정부가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대응"한 것이 주효했다고 했다.

"다만 그렇게 외부환경이 변화했다 하더라도 우리 한국이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또 틀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5년 동안 한반도에서 미국이 얻은 확실한 정보는 이것이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원하는 대로 일방적으로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이라든지, 그 이상의 강한 압력의 행사라든지, 또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제재를 순순히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 평화를 깨는 어떤 모험도 단호하게 반대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경험을 거쳐서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국이 마지막에 이 결단(9·19성명 합의)을 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풀려간 한 서너 가지의 요인 중에서 한국정부의 일관성도 분명히 그 사태해결에 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당근과 채찍? 우리 카드를 상대방이 읽게 해줘야"

2007년 청와대 관저 앞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인터뷰 중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2007년 청와대 관저 앞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인터뷰 중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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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좀 내 자랑 같네요"하면서 웃었다. 그러나 힘주어 강조했다.

"평화적으로 그리고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그런 일관적 원칙을 한 번도 바꾼 일이 없습니다. 더욱이 앞으로도 바뀔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계속해서 예고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당근과 채찍이론을 거론했다. 그것을 현실에 적용할 때, 특히 남북관계에서 적용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협상할 때 항상 쓰는 우리의 전략이론이 당근과 채찍이론이거든요. 그러나 채찍이론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그것은 결국 대화론이 아니고 정도를 넘어가게 되기 때문에 결국 판이 깨지는 강경론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 수준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적어도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선에서 채찍론이 적절하게 구사되어야지, 평화를 깨버릴 수 있는 그런 위험한 채찍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런 위험한 채찍을 쓰지 않겠다는 원칙을 강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이 문제 해결에 다가가게 된 것이지요."

노 대통령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에서는, 특히 전쟁이냐 아니냐의 문제에서는 협상의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보통 협상할 때, 내 카드를 보여주지 않는 것. 상대방이 내가 무엇을 할지를 모르게 하는 것이 하나의 협상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그것은 서로 이익을 가지고 나눌 때 하는 것이지요. 북핵문제처럼 아주 중요하고 큰 문제, 말하자면 사태의 향방에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는 아주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방이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내 포지션이 정확할 때 상대방이 산수로써, 전략적 산수로써 계산하고 그다음에 행동하기 때문에 서로 예측하기가 좋은 것이거든요."

대통령의 조건으로 유독 '역사적 안목'을 강조했던 정치인 노무현. 그는 남북문제를 풀 때는 더욱 그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천 년의 역사 속에서 봐야 해결의 원칙이 생긴다"고 했다.

"나는 한건주의, 성과주의로는 절대로 남북관계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반도를 둘러싼 대결구도의 일부일 뿐입니다. 멀리 보면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된 대륙과 해양의 세력 사이의 대결 관계입니다. 근대화 이후에는 그 대결관계의 각축이 더 확실히 있었던 장이 한반도거든요. 이 세계 지도의 구조 속에서 분단이라는 것이 나온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이 전체의 구조를 가지고, 동북아 질서 전체를 바꾸어 나가는 작업을 병행하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작업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단발성 이벤트를 가지고는 역사적 진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죠."

"정권이 바뀌더라도 거역하지 못할 것"

- 그런데 임기를 5개월 정도 남겨두고 남북정상회담을 했는데, 너무 늦지 않았나요?
"나는 이것을 (내 국정의) 중요한 마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북정책의 한 단계 마무리라고 생각한 거지요. 또 남북정상회담이 6자회담의 중대한 합의였던 9·19성명을 실행하는 과정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동력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노 대통령은 정권이 바뀌어도 대북정책의 기조는 이어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남북정상회담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다음에 시간적으로 지금 이것을 어느 정도 매듭을 지어서 그 지도를 그려놓지 않으면, 설계도 또는 지도를 그려놓지 않으면, 의지가 다른 정권이 들어섰을 때 진행과정이 아주 달라질 수가 있거든요. 이것을 지도를 다시 그리고 국민적 합의를 모아놓으면, 다음 정권이 누구이든 간에 영 다른 길로 가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지도를 좀 구체적인 지도를 그려보자. 그렇게 놓고 국민적 합의를 모아서 정착시켜 놓은 것이죠. 참여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국민의 정책으로 매듭을 지어놔야 되는 것이죠."

-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한나라당 후보가 되더라도 큰 틀을 벗어나기 힘들까요?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선거 때이니까, 자기들의 정체성 문제 때문에 시비를 걸지만, 정권 잡으면 여기서의 최대한의 성과를 남기길 바라죠.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북방외교를 했고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고, 남북문제에 있어서 중대한 진전이 있지 않았습니까? 거역하지 못하죠."

거역하지 못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게 예상했지만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고 2년째를 맞이한 지금, 한반도는 전쟁 기운에 휩싸여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예언대로 평화정착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할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

"문상객 5백만 중에 50만이라도..."

지난 5월 28일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난 5월 28일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조문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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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질문에 대한 답의 결정권은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그를 뽑아준 국민들에 달렸을 것이다. 그들이 6·15선언과 그 정신을 이어 만들어진 10·4선언을 되새기고, 공부하고,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그 염원을 거스르기 힘들 것이다. 6·15선언 9주년 기념식에 모인 사람들은 2시간여의 행사 동안 이 구호를 수차례 합창했다.
"6·15로 돌아가자."

이 행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국민들에게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행동하면 그것이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무서우니까, 시끄러우니까, 손해 보니까 회피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 국민의 태도 때문에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죄 없이 세상을 뜨고 여러 가지 수난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의롭게 싸운 사람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는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양심에 합당한 일입니까."

그러면서 노 대통령을 죽인 것은 행동하지 않은 양심, 우리 모두라고 했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만일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고초를 겪을 때 500만 명 문상객 중 10분지 1인 50만 명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해 이럴 순 없다, 매일 같이 혐의 흘리면서 정신적 타격을 주고, 스트레스 주고, 그럴 수는 없다, 50만명만 그렇게 나섰어도 노 전 대통령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억울하고, 희생자들에 대해 가슴 아프겠습니까."

김 전 대통령의 말을 듣고 나를 포함해, 뒤늦은 후회를 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이런 후회 하지 않으려면.

6·15선언? 10·4선언? 9·19성명? 그런 것이 있었단 말이야? 전쟁하지 말자고 합의했단 말이야? 전쟁으로 목숨 잃은 사람들 위해 눈물 흘리고 있는 우리들 가운데 10분의 1이라도 전쟁반대를 더 강하게 외쳤더라면.


태그:#노무현, #이명박, #김대중, #9.19성명, #6.16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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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대표기자 & 대표이사. 2000년 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988년 1월 월간 <말>에서 기자활동 시작. 사단법인 꿈틀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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