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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전쟁

종전 후 전쟁 당사국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과 중국,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 모두 실패하지 않았다고 '주장' 했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의 불법남침과 적화야욕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했다고 '주장' 했다. 김일성 정권은 미제와 이승만 도당의 침략을 막아내고 사회주의 조국을 성공적으로 보위했다고 '주장' 했다.

마오쩌둥 정권은 한반도 전체를 수중에 넣어 중국에 대한 전초기지를 세우려는 미국의 음모를 분쇄했다고 '주장' 했다. 미국 정부는 청사진 없이 북진을 추진한 맥아더의 전략적 부재에 대해서는 실패를 인정했지만, 포로 송환 과정에서 명분상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주장'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들 네 나라 중 어느 하나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의 백성들이 입은 피해는 가장 처절했다.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들의 고통스러운 상처는 반세기가 넘도록 여물지 않았다. 모름지기 남북한 백성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패자였다.

하지만 승자는 가까운 곳에 따로 있었다. 가장 확실한 승자는 전쟁 후 남과 북에서 각각 장기 집권의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성패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일본이 유일하게 성공한 국가였다.

일본은 막대한 전쟁 특수를 챙겼으며, 자위대 출범과 재무장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었다. 한국전쟁 후 일본인 중에는 이른바 '방휼지쟁 어부지리'(蚌鷸之爭 漁父之利, 조개와 황새가 싸우니 어부만 이득을 봄)라고 써놓은 족자를 걸어놓고 키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한편 조수현의 아들 리석주는 소년이 되면서 더벅머리 헤어스타일까지 아버지와 비슷하게 하고 다녔다. 아들은 수학에 천재적인 역량을 일찍부터 나타냈다. 하지만 아들은 반복되는 숫자 계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수현은 이두오에게서 들었던 수학의 중요성을 아들에게 일깨워 주곤 했다.

50년 후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의 무덤에 다녀왔다. 아이가 내게 물었다.

"아버지, 할머니 함자가 '조'자 '수'자 '현'자 맞지요?"
"그렇단다."
할머니 고향은 어디에요?"
"응. 평양이란다."

흙 속에 있는 어머니는 서울 외곽의 정릉 배밭골을 평생 추억으로 간직하며 사셨을 터이다. 당신은 평양보다 그곳을 더 고향처럼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 고향도 평양이잖아요?"
"내 고향은 정릉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릉이요? 정릉이 평양 어디에 있는데요?"
"정릉은 평양에 있지 않고 서울에 있다."
".....서울이요?"
"그래 서울이다."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는 제1환계(First Circle)라는 세상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선의를 가지고 살았으면서도 예수를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단테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이 살고 있었다고 했다. 만약 단테가 동양인이었다면 공자나 노자를 거기에 넣었으려나? 아마 레닌처럼 명민한 사람이나 마크 트웨인 같은 악동도 거기에 살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도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본다.

최근 나는 미국에 다녀왔다. <타임> 지에서는 '창조의 메아리'(Echo of Creation)라는 제목의 과학 기사가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물리학자들은 너 나 없이 입을 모아 경탄을 금치 못했다.

"와우! 대사건이야. 믿을 수가 없어."

온갖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 찬 우주공간은 무수한 타임머신의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위성으로부터 전송된 관측데이터를 분석하던 미국의 과학자들은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마이크로웨이브위성이 빅뱅 후 38만 년이 지난 초기 우주의 정확한 데이터를 전송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별들을 생성시키고 남은 우주의 에너지가 그 후로 수십억 년 동안 우주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이번 위성이 보내온 에너지 분포도는 전례 없이 정확한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그 정밀한 에너지 지도에 넋을 빼앗겼다.

이제 천문학자들이 바라보는 우주는 과거의 것과는 판이해졌다. 프린스턴 고등과학원의 존 바콜은 나에게 말했다.

"리석주 박사의 이번 연구는 우주론을 사색적인 이론에서 정밀한 과학의 장으로 끌어올린 쾌거입니다."

그 후로도 마이크로웨이브 위성은 초기우주에 관한 증거 자료들을 홍수처럼 쏟아냈다. 지금까지의 관측으로는 120억 광년 떨어진 준항성체가 지구에서 가장 먼 천체였는데, 마이크로웨이브 위성이 그보다 먼 곳에서 날아온 천체의 복사를 관측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번 위성은 탑재된 망원경의 규모도 컸을 뿐더러, 위성이 태양계 너머에까지 직접 가서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측량된 우주 끝의 온도는 절대온도인 마이너스 273도의 미세근사치였다.

"놀랍습니다. 리 박사의 추정과 계산이 정확했던 것입니다."

갑자기 나는 우주물리학의 대가로 입신해 있었다. 사실 내가 찾으려 했던 것은 우주 최 변방의 별이었는데, 그것은 나의 추정과 달리 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별을 찾으려고 했던 목적은 십분 성취된 것이었다. 그 결과 우주의 나이는 100억도 아니고 130억도 아닌 137억 년으로 확정되었다. 나는 우주의 나이가 130억 년 이상이며, 인간의 관측으로 137억 광년 거리에 있는 천체까지 측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줄곧 해오고 있던 차였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다음 회에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이 소설이 끝나면 이어서 6`15통일추리소설을 연재할 에정입니다.



태그:#한국전쟁, #마이크로웨이브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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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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