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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공사가 지난 4월 24일부터 <KBS 스페셜>, <추적60분> 등 11개 시사·교양·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부분 또는 전면적으로 PD집필제를 실시해 논란이 일고 있다. PD집필제는 그동안 구성작가들이 해왔던 '구성안 작성'과 '원고 집필'을 모두 PD들이 직접 하는 것이다.
 
KBS측은 PD집필제를 추진하려는 이유로 'PD들의 경쟁력 강화'와 '제작비 절감'을 들었다. 반면 KBS작가들은 PD집필제가 한국방송시스템을 고려하지 않고 작가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처사라며 반발하고 있다.
 
KBS 구성작가협의회 비상대책위 정종숙(40) 위원장은 "PD집필제로 방송제작 여건이 더 악화되었다"며 "앞으로 프로그램 질이 저하돼 시청자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8일 여의도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 정종숙 위원장과 인터뷰했다.
 

"PD집필제, PD역량 강화와 연결 안돼"

 

"KBS 교양프로그램의 1/3정도가 PD집필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추적 60분>의 경우 5명의 작가에서 3명으로 수가 줄었고 역사프로그램의 경우 8명이 공동으로 돌아가며 제작하는데 현재 모두 다 그만 둔 상황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40여 개 정도의 일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정종숙 위원장은 PD집필제 문제를 '문화콘텐츠 위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작가들은 방송콘텐츠 생산자로서 30년 동안 구축된 인프라인데 PD집필제는 이런 축적된 인프라 자체를 없애는 매우 무모한 발상"이라고 강조했다. 산업기반만 깔아놓는 게 아니라 콘텐츠가 흘러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하는데 이 자체를 걷어내겠다는 것은 너무나 기계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지난 4월부터 시행한 PD집필제의 폐단이 최근 들어 현실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PD의 파트너인 작가의 역할이 크게 줄면서 고스란히 PD들의 부담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작가의 역할이 빠진 만큼 PD 수를 늘리거나 제작시간을 연장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섭외부터 구성, 가원고, 자료조사까지 모든 것을 홀로 하니 힘에 벅차다는 PD들도 있다. 이 때문에 글을 쓰면서도 공식적으로 집필을 하지 않는 '유령작가'가 생겨나기도 하고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직종도 나타났다. 그녀는 "방송에서 '글구성'이라는 직종이 '스페셜 라이터'나 '스페셜 리서처' 등으로 전환되어 자막으로 올라가는 등 기이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특히 정 위원장은 KBS 측에서 내세운 'PD 역량강화'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역설했다. 그녀는 "PD는 프로그램에서 각각의 전문 인력을 총지휘하는 역할을 한다"며 "PD역량강화에 글쓰기만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1분 30초 정도의 짧은 리포팅 기사와 60분 가량의 프로그램은 기본 성격부터 전혀 다르다는 것. PD는 단순한 방송대본 집필을 넘어 전체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구성하는 연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PD 역량 강화는 작가를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 방송제작 여건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고료 삭감도 동의해 줬는데, PD집필제 통보

 

KBS가 내세운 '제작비 절감' 명분도 궁색하다는 설명이다. 이미 KBS는 누적 적자를 이유로 작년 가을 개편 때 1억 9천만 원, 이번 봄 개편 때 1억 5천만 원씩 원고료 삭감을 했다. 당시 KBS 작가들은 방송국 재정 사정을 고려해 원고료 삭감에 동의했다. 그런데 이번엔 PD집필제 명분으로 작가 수를 아예 줄인다. 정 위원은 "(제작비 절감보다는) 작가 시스템을 무시하는 처사로 KBS가 방송제작 시스템에 대한 기본 인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당초 KBS가 낸 보도자료에서는 작가들이 집필할 때 객관성이 확보되지 않는 이유도 함께 지적됐다. 비대위 측은 KBS와 1차 협상을 했을 때 이에 대해 "모든 작가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항의했고 KBS는 일단 사과의 뜻을 밝혔다.

 

"작가는 사전 취재 단계부터 전문가를 만나고 논문 검색을 하는 등 방송제작을 위해 충분한 자료를 모읍니다. 이를 바탕으로 PD와 카메라PD는 현장에서 촬영을 합니다. 작가는 이 영상을 통해 인터뷰가 나온 맥락을 살피고 정보의 오류가 없는지 일일이 재확인합니다."

 

정 위원장은 "오히려 한 사람이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방송을 제작한다면 독단에 빠지기 쉽다"며 "작가가 한 발짝 떨어져서 방송을 보기 때문에 주관성을 탈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작가가 제1의 시청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대책위는 KBS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정 위원장은 PD집필제를 통보하는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가 전혀 없었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했다. 작가협회가 KBS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역할을 했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논의 과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현장 PD들도 의견을 제시할 겨를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통보를 받았다.

 

후배 작가들 위해 펜 놓은 베테랑 작가

 

현재 그녀는 한국방송작가협회의 KBS사태대책위원(위원장 윤청광)으로 활동하고 있다. KBS의 PD집필제가 단순히 KBS작가들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전체의 존립 문제와 연계되어있다는 판단 아래 한국방송작가협회 조직을 다시 꾸렸기 때문이다.

 

KBS사태대책위는 지난 6월 2일 KBS 측과 1차 협상을 했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대책위는 조만간 갖게 될 2차 협상에서도 진전이 없을 경우 전면집필거부 등을 할 계획이다. MBC와 SBS, EBS 작가들도 제작거부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정 위원장은 20년 동안 주로 역사다큐멘터에서 집필을 해 온 베테랑 구성작가다. 지난 5월 4일까지 <역사추적> 프로그램에서 일을 했지만 PD집필제 문제가 불거지자 방송을 접고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후배들, 나아가 작가 전체의 존립문제를 생각했을 때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시간 가량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차분하게 PD집필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지만, 작가의 명예와 생존을 얘기할 땐, 두 눈에 힘이 들어가거나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다음은 정종숙 위원장과 나눈 인터뷰 내용.

 

- 원래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

"주로 역사다큐멘터리에서 구성작가를 했다. 지난 5월 4일까지 <역사추적> 방송에서 일을 했고, PD집필제 문제가 불거지자 방송을 접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 현재하고 있는 역할은?

"한국방송작가협회의 KBS사태대책위원(위원장 윤청광)으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 KBS 구성작가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KBS의 PD집필제 문제가 전체 작가의 존립과 연계되어있어 한국방송작가협회 차원에서 조직을 다시 꾸렸다. 여기서 KBS와 협상 창구역할을 하고 있다."

 

- 일자리가 없어진 작가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교양 프로그램 11개에서 PD집필제를 시행중이다. KBS 교양프로그램의 1/3이다. 20%할당부터 100%할당까지 다양하다. <추적 60분>의 경우 5명의 작가에서 3명으로 수가 줄었다. 역사프로그램의 경우 8명이 풀 제(制)로 돌아가는데 현재 다 그만 둔 상황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40여 개 정도의 일자리가 없어졌다."

 

- 현재 방송제작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다른 시스템 보완이 없기 때문에 PD들은 현재 모든 부담을 떠안고 있다고 들었다. PD 수를 두 배로 늘리거나 제작시간을 늘려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몰래 작가를 채용하는 유령작가시스템이 나오고 있다. 또는 엔딩크레딧에서 작가 명칭을 바꾸기도 한다. 원래 '글구성'이라는 직함이 '스페셜 라이터·리서처' 등 '듣도 보도 못한 직업명'으로 변경되었다.

 

아이템 선정부터 자료조사까지 모든 것을 홀로 하니 힘에 벅차다는 PD들도 있다. PD집필제를 거친 <역사추적>은 이번 주부터 나간다. 얼마나 부담을 겪었는지 이제 슬슬 나타날 것이다. <시사360>프로그램의 경우에는 PD할당률이 없다. 오히려 이런 프로에 PD집필제가 시행돼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럴 경우 방송사고 나기 십상이기에 여기에는 손을 댈 수가 없다. 기준도 없는 모호한 PD집필제다."

 

- PD집필제, 무엇이 문제인가?

"문화콘텐츠 위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작가들은 방송콘텐츠 생산자로서 30년 동안 구축된 인프라다. PD집필제는 이런 축적된 인프라 자체를 없애는 매우 무모한 발상이다. DMB가 실패한 것도 바로 콘텐츠 문제가 아닌가? 산업기반만 깔아놓는 게 아니라 콘텐츠가 흘러가게 해야 한다. 콘텐츠 자체를 걷어내겠다는 발상은 너무나 기계적이고 기능적인 생각이다."

 

- KBS의 입장도 콘텐츠 강화다. 특히 PD의 '역량강화'를 들고 나왔다.

"조직원의 역량강화는 어느 조직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에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왜 PD역량강화에 유독 글쓰기만 이야기하고 있는가? PD는 각각의 전문 인력을 총지휘해 하나의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방송제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다. 60분 동안 전체 스토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구성을 해야 한다. 영상을 단순히 1분 30초 뉴스와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유아적인 발상이다.

 

PD역량의 강화 목표는 콘텐츠 질 향상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제작시스템을 잘 만들어야 하는데 시스템 여건은 더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작가는 단순히 집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템 선정, 문제판단 등 PD의 파트너로서 역할을 해 왔다. 이제 이 부분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PD인력의 수나 제작기간을 늘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PD들의 노동 강도는 점점 세질 것이며 제작여건은 점점 악화될 것이다. 단순히 작가를 줄이는 방법에만 의존하다가는 모든 피해가 시청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 그렇다면 PD집단 내에서는 왜 반발이 없는가?

"PD집단은 KBS의 조직원이기 때문에 회사방침에 쉽게 반발하기 어렵다. 하지만 몇몇 PD들은 제작 자율성 침해라는 관점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현재 주어진 PD집필률은 해당 PD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 할당된 것이다."

 

- PD집필제를 제작비 절감차원에서는 볼 수 없는가?

"경비절감차원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지만 명분이 너무 궁색하다. 작년 가을개편 때 1억 9천, 이번 봄 개편 때 1억 5천만 원씩 원고료 삭감을 했다. 일괄적으로 10%씩 삭감한 것이다. 3억 안팎의 돈을 위해 작가를 들어낸다면 어떻게 봐야할까? 왜 작가를 타깃으로 하는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 방송제작 시스템에 대한 기본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 KBS는 작가들이 집필할 때 객관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전 작가를 모독하는 발언이다. 이는 KBS가 그동안 왜곡된 방송을 했다고 자해하는 꼴이다. 작가는 사전취재단계부터 전문가를 만나고 논문 검색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그램 세부방향을 설정한다. 이를 통해 PD와 카메라PD가 현장에 가서 촬영한다. 우린 이 자료를 전부 재확인한다.

 

인터뷰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건지 살펴보고, 잘못된 정보가 있으면 전화를 걸어서 재차 확인한다. 오히려 한 사람이 주로 방송을 만든다면 독단에 빠지기 쉽다. 제1의 시청자 역할을 작가가 하는 것이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만 방송을 읽을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주관에서 탈피할 수 있다. KBS는 협의 테이블에서 사적으로 사과는 했다. 하지만 우린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한다."

 

- PD집필제를 통보하는 과정에는 문제가 없었나?

"KBS는 공영방송. 국민의 방송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다. 공영성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민주적 절차를 지킬 때 갖춰진다. 하지만 KBS는 온당한 절차를 생략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PD집필 강제할당을 시행했다. 예전에는 협의할 사안이 있을 때 작가협회와 논의하는 과정이 있었다. 작가협회는 저작권 문제 등 작가의 권리와 관련해 KBS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 앞으로의 일정은?

"지난 6월 2일 KBS 측과 1차 협상을 했다. 원칙적으로 서로의 인식 차이만 확인했다. 우리는 작가 명예 훼손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PD집필제 철회를 요구했다. 현재 KBS에서 협상팀을 새롭게 꾸리는 중인데 조만간 2차 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 협상테이블에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경우 전면집필거부도 할 계획이다. 이미 작가총회에서 결의한 내용이다. MBC와 SBS, EBS 작가들도 제작거부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덧붙이는 글 | 김상윤 기자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입니다. 


태그:#PD집필제, #정종숙, #KBS, #한국작가협의회,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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